인간이 자연의 소재에 행위를 가하여 실체상·시간상·공간상의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그 유용성을 높이는 활동을 생산이라 하고, 자연에서 소재를 얻어내는 생산활동을 채취산업 또는 추출산업이라고 할 때, 채취산업에서 얻은 생산물을 변형시키는 생산활동이 가공산업, 즉 공업이다.
또한,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공업은 수력·축력 등 자연의 힘이 아닌 인공의 힘, 즉 기계력을 이용하는 생산활동을 총칭한다. 따라서, 농업이 기계화되는 것을 가리켜 경제학자들은 농업의 공업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공업에는 ‘근대공업’과 ‘구공업(舊工業)’의 구별이 있다. 구공업은 지역시장을 상대로 자연의 힘을 이용하는 분산적 경제주체에 의한 가공활동으로서, 자본은 주로 유동자본, 즉 상품형태로 존재하고, 고정자본의 비중은 크지 않으며 기계설비보다는 사무실·창고·선박 등의 형태를 취한다.
이에 반하여 근대공업은 국민시장 및 세계시장을 상대로, 인공의 힘을 이용하는 집중적이면서 집권화된 경제주체에 의한 가공활동이며, 자본은 기계설비, 즉 고정자본의 형태로 존재한다. 우리가 공업이라고 할 때는 후자인 근대공업만을 말한다.
채취산업에서의 생산력이 커져 사회성원이 소재형태로 소비하고도 남는 잉여생산물이 생기고, 또 잉여노동을 배출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것들을 가공·변형시킴으로써 다른 종류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활동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공업화의 시초이다.
좀더 엄격히 규정하자면 석기의 타제(打製)도 기계의 생산과 마찬가지로 공업이라고 해야 할 것이나 일반적으로는 그러하지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쌀의 채취와 그 역사를 같이하는 정미활동도 근대공업에 포함시키지 않는 경우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신석기시대에 도구·무기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등장하였을 때부터 구공업은 시작되었다고 하겠으나, 구공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것은 경제적 잉여가 소수 지배자의 손에 집중되고 그들을 위하여 무기·복식품·가구·차량·제사용의 예술공예품 등이 전문화된 기능소유자에 의하여 생산하게 된 때부터이다.
공업은 분석시각의 다름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분류된다. 가장 일반적인 분류는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으로 나누는 것인데, 이는 고정자본비중의 대소에 따른 구분이다. 중화학공업은 다시 중공업과 화학공업으로 구분되는데, 이는 생산물의 성질에 따른 분류이다. 그리고 그 제품의 최종용도에 따라 나눈 것이 생산재공업과 소비재공업의 구분이다.
이 분류는 가장 일반적인 것이지만 엄격한 것은 못된다. 왜냐하면, 재봉틀과 같이 가정에서 소비재구실을 하며 동시에 의복공장에서는 생산재구실을 하는 공산품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프만(Hoffman,W.) 같은 학자는 두 용도 모두에 쓰이는 것을 제외하여 절대로 소비재가 될 수 없는 제품을 만드는 공업을 자본재공업, 절대로 생산재가 될 수 없는 제품을 만드는 공업을 소비재공업이라고 분류하고 있다.
1979년 <광공업통계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통계를 위하여 공업은 여러 가지의 공업으로 중(中)분류되고 다시 389개 공업으로 세분류되고 있다.
농림수산업을 1차산업(Ⅰ), 광공업을 2차산업(Ⅱ), 나머지를 서비스산업(S)으로 구분하는데, 경제가 발전될수록 노동력은 1차산업에서 2차산업을 거쳐 서비스산업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처음 지적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페티의 법칙’이라고 한다.
최근에 와서 공업의 비중이 국민총생산의 20%를 넘고 1인당 국민총생산이 1,100달러를 넘어선 나라를 신흥공업국이라고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공업화 초기에는 산업별 부가가치구성비가 Ⅱ<Ⅰ<S의 형태를 갖지만, 공업화가 진전되면 Ⅰ<Ⅱ<S라는 형태를 가지게 된다.
한편, 공업이 있기 전의 자본재부가가치와 소비재부가가치의 비율은 0:100이다. 그러나 공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1:99, ……, 50:50, 51:49’로 소비재부가가치의 비중이 점점 작아진다. 이와 같은 변화를 ‘호프만의 법칙’이라고 하며, 그 비율을 ‘호프만의 비율’이라 한다. 호프만은 그 비율이 5±1.5:1인 상태를 공업화의 제1단계, 2.5±1:1인 상태를 제2단계, 1±0.5:1인 상태를 제3단계, 그 이하의 상태를 제4단계라고 정의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영국·미국 등지에서 1800년을 전후하여 섬유공업을 중심으로 제1차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1860년을 전후하여 철강공업을 중심으로 제2차 산업혁명이, 1900년 전후에 자동차공업·화학공업·전기기기공업 등을 중심으로 제3차 산업혁명이, 1940년을 전후하여 원자력공업·항공기공업·전자공업·합성제공업 등을 중심으로 하여 과학·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우리 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제철기술을 익혀 철가공품을 생산하였다. 무역사를 보면 우리 수출품 중 말이나 곰가죽 등의 토산품도 있지만, 중국과의 무역에서도 각궁(角弓)·비단·갑옷·은제품 등을 수출했고, 일본과의 무역에서는 그 밖에도 철제방패·화살촉·불상·거울·서적 등 높은 문화와 공업수준을 상징하는 공산품을 주로 수출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도 당시의 공업수준을 알 수 있는데, 공업이 처음에는 권력층의 지배체제 및 사회적 욕구와 관련하여 전문화되고 발달한다는 일반법칙은 우리 나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일찍이 우리 공업은 관영공업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즉, 신라에는 비단공장인 조하방(朝霞房)을 비롯하여 20개가 넘는 관영공업 관장부처가 있었으며, 고려의 경우도 공조서(供造署)를 비롯한 9개의 중앙부서에서 공업생산활동을 관장하였다.
한편, 조선시대인 1471년(성종 2)의 경우를 보면, 관영공업을 경공장(京工匠)과 외공장(外工匠)으로 2원화하여 공조(工曹)에 수철장(水鐵匠)을 비롯한 55종 258명의 장인을 둔 것을 비롯, 봉상시(奉常寺) 등 30개 관장부서 밑에 129종 2,841명의 장인을 두어 관영공업을 전담시켰고, 지방의 외공장에는 37개 직종에 3,511명의 장인을 두어 중앙 및 지방의 관수(官需)를 전담하게 하였다.
관수의 일부분은 민간공업에 바탕을 둔 공조(貢租)에 의하여 충당되었는데, 공조의 바탕은 농촌수공업과 전문적 장인의 생산활동에 근거를 두었다. 즉, 농촌에서는 일부 특산품적 수공업을 제지할 때는 대체로 질적인 면에서 소박한 수공업제품을 생산하여 자가소비에 충당하고 일부는 교역하였으며, 품질적으로 뛰어난 특산품적 수공업제품이 관수용으로 징수되었다.
전문적인 수공업자의 규모 및 그 경제적 비중에 대한 수량적 기록은 없으나, 교환경제의 발생과 더불어 우리 경제에도 전문적인 수공업생산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시대부터 사원이 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집단 또는 자급자족적인 농민들과는 조직이 다른 별개의 생활집단으로 등장하면서 그 생활수단의 하나로서 수공업활동을 시작, 그 규모가 커지면서 사원수공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 업종은 고려시대는 직조업·도공업(陶工業)·양조업 등이었고, 조선시대는 그에 더하여 제지업이 추가되었다.
개항은 근대공업제품의 수입 격증과 그로 인한 우리 나라 수공업의 파괴를 가져왔다. 1877∼1882년간에 총 460만 3000원(圓), 연평균 76만 7000원이던 수입규모는 1910년 3978만 1000원으로 52배 가량이나 늘어났고, 1886∼1910년간의 수입총액은 무려 3억 9142만 1000원에 달하였다.
이에 반하여 1877∼1882년 사이 총 510만 5000원, 연평균 85만 1000원으로 출초를 보였던 수출은 1910년 1991만 3000원으로 23배밖에 늘어나지 않았고, 1886∼1910년의 수출총액은 1억 7251만 5000원으로 이 기간을 통하여 총 2억 1890만 6000원의 무역적자를 기록하였다. 이때 수입된 물품은 광산기계·철도건설자재 등의 생산재와 성냥·석유·염료 등 국내 수공업제품과는 경쟁이 크지 않은 상품도 있었으나, 수입의 주종은 섬유제품이었으므로 수공업적 섬유공업은 하루 아침에 붕괴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수출대전의 마련을 위한 농산물의 수출은 1893∼1902년 수출총액의 93.4%인 5334만 7000원에 이르러 국내의 식량수급균형을 파괴시켜 1889∼1903년의 방곡령선포를 불가피하게 하였으며, 또한 금은의 유출도 심하여 1901∼1910년 사이 총 4억 7474만 5000원의 금이 유출되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수입초과로 무역수지적자가 발생하기 시작한 1880년대 초부터 근대공업 및 근대기업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상업기업과는 달리 공업에 있어서는 대한직조공장(大韓織組工場) 등이 설립되었으나 회사설립에 그치고 공장건설은 이루지 못하였으며, 개항장에는 수출과 관련한 정미공장·피혁공장 몇 개, 일본인 거주자용으로 간장·술·과자를 만드는 수공업에서 겨우 탈피한 수준의 공장이 건설되었다.
그리하여 겨우 1899년에야 서울의 종로포목상이 중심이 되어 종로직조사가 건설되었고, 1902년 사기제조소·김덕창직조공장 등이 생겼으며, 관영공장으로는 1903년 한성전기, 1905년 인쇄국, 1907년 기와·토관공장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근대공업을 이식하기 위한 노력과 병행하여 1902년에 궁내부 내장사 직조서에 모범양잠소가 설치되어 근대적 양잠기술을 가르쳤고, 각도에 공업전습소를 설립하여 염색과 직조 등에 관한 기술보급에 힘써 공업화를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 특히 일본의 경제적 침탈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02년 이전 9개의 청주·장유 공장을 비롯, 15개에 불과하였던 공장이 1909년 말 정미공장 31개, 통조림공장 3개 등 식음료·담배 공업에 61개 공장, 기와·석회공장 13개 등 중간재공업에 23개 공장, 조면공장(操綿工場) 3개 등 섬유공업에 4개 공장, 기타 22개 공장 등 공장수는 109개로 늘었지만 공업화의 주도권은 일본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즉, 1911년 말 당시 1008만 2482원의 자본금을 가진 270개의 근대공업기업 중 한국인의 공장은 86개(31.9%), 자본금 72만 2632원(7.2%)에 불과하고, 일본인의 공장은 183개(67.8%), 자본금 920만 9850원(91.3%)으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1911년의 공업생산규모는 1963만 9655원으로 집계되고 있다.
1910∼1930. 1910년 8월 일본은 무력으로 우리 나라를 강제 병합하였지만 식민지경영을 본격화할 만한 자본주의적 생산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결과 대한제국 관제를 그대로 온존시키는 한편 1911년 <회사령>을 제정, 회사설립 허가주의를 취함으로써 상품 및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막아 일본 자본의 식민지 유출, 우리 민족자본의 산업자본화, 외국자본의 국내침투를 저지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1905∼1911년 사이의 화폐정리사업을 통하여 근대적 화폐제도를 도입한다는 구실로 우리 나라의 상인자본에 괴멸적인 커다란 타격을 가하였고, 또다시 1910∼1918년 사이의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근대적 토지소유제도를 확립한다는 구실 아래 토지자본과 농촌경제를 파괴하고 친일적인 소수의 대토지 소유주를 탄생시키는 한편, 일본인 스스로가 대지주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리고 <회사령>을 이용하여 이와 같은 민족자본 말살정책에서 살아남은 자본이 근대기업에 투입되고 특히 산업자본화하는 것을 저지하였다. 유형재(有形財) 생산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1911년의 10.6%에서 1930년에는 23.9%로 13.3%가 커졌을 뿐이다.
공업구조는 1930년 당시 엄격한 의미에서 공업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정미공업이 중심이 된 식료품공업이 전체의 57.8%를 차지하였고,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전략산업인 방직공업은 12.8%에 불과하였으며, 제재업과 인쇄업 및 기타를 합한 경공업의 비중이 77.9%를 차지하였다.
중화학공업에서는 식민지의 고갈성 자원이용을 위한 금속공업이 5.8%이고, 성냥·비누·신발 등 일상용품 생산에 편중된 화학공업이 9.4%이며, 공업화의 전략산업인 기계공업은 도량형기의 제작 등에 엄격히 국한된 관계로 1.3%에 불과하여, 전기·가스 산업을 합한 그 비중은 22.1%에 지나지 않았다.
1931∼1945. 1930년까지의 일본의 식민지경영정책은 경제력의 바탕이 되는 공업화를 최소한으로 막고, 일본의 급격한 공업화로 인한 농촌피폐와 농업정체 때문에 공업발전이 저해되는 일이 없도록 일본공업이 요구하는 잉여생산물을 식민지수탈을 통하여 마련함으로써 식민지라는 보조장치를 활용한 경제발전에 주안을 둔 것이었다.
그러한 정책은 산미증식계획·남면북양정책(南棉北羊政策) 등 한국에 대한 기본경제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유역변경방식에 의한 대량발전의 가능성이 생기자, 니혼짓소(日本窒素)·닛산(日産) 등 본국에서의 경쟁에 뒤늦게 출발한 신흥재벌이 한국진출을 시도하였다.
니혼짓소는 1926년 조선수전(朝鮮水電)을 설립, 부전강발전소건설에 착수하여 1929년 송전을 개시하였고, 1927년 조선질소화약회사를, 1930년 흥남비료공장을 가동시켰다. 뿐만 아니라 1930년 일본 본토에서 실시한 <중요산업통제령>을 피하여 미쓰이(三井)·미쓰비시(三菱) 등 일본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재벌들도 한국진출을 서둘렀다.
미쓰이 계는 4개 사 자본금 2,950만 원, 미쓰비시 계는 3개 사 2,500만 원, 노구치(野口) 계는 5개 사 5,020만 원, 이토추(伊藤忠) 계는 1개 사 100만 원 등으로 1932∼1936년 사이에 11개 일본 재벌의 한국진출규모는 21개 사 1억 6120만 원에 달하였고, 재벌 아닌 대기업의 진출도 활발하였다.
이에 더하여 1932년 만주제국(滿洲帝國)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운 일제는 만주를 발판으로 한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서 우리의 경제력과 인적·물적 자원을 중화학공업이라는 형태로 결집시켜 활용하려 하였다. 농공병진에서 남농북공(南農北工)으로 경제정책구호가 변화한 것은 이러한 식민지수탈정책의 전환을 말한다.
그 결과 공장수는 1만 4856개로 1911∼1930년 사이의 연평균 200개 증가에서 연평균 815개 증가로 급증하였고, 종사자의 수도 총 54만 9751명으로 연평균 3만 4447명이 늘었으며, 생산액은 20억 5000만 원으로 7.8배, 연평균 1억 3745만 7000원씩 증가하였고 산업상 비중도 37.1%로 커졌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수탈정책은 이러한 공업화에서 한국인을 제외시켰음을 잘 알 수 있다. 즉, 공업에 있어서 1940년 말 당시 한국인 소유의 비율은 5.9%에 불과하였고, 그나마 당시의 전략산업인 금속공업에서는 1.6%, 방직공업에서는 15.5%였다. 이와 같이 생산활동에서 소외된 한국인이 생산물의 분배에서도 소외되었음은 당연하다.
한편, 일제는 우리 나라에 이와 같은 공업건설을 하면서도 대일(對日)종속성의 강화를 노렸으니, 한국공업의 자급률은 1941년 당시 평균 72.7%에 불과하였고, 자주적 공업화의 전략산업인 기계공업의 자급률은 24.7%로 민족말살정책의 첨병이 된 인쇄공업의 7.8%에 이어 두번째로 낮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을 때 우리 나라에는 경공업 분야에 있어 면방직공장인 경성방직(京城紡織), 인조견공장인 가네보(鐘紡), 견직공장인 경성직물, 제사공장인 가타쿠라(片倉), 마닐라로프공장인 조선제망 등이 큰 것이었고, 면방적기 23만 8760추, 역적기 8,512대, 마방적기 9,600추, 역적기 70대, 견직기 9,571대, 모방적기 2,060추, 직기 65대, 메리야스기계 4,369대가 있었다.
식품공업에는 밀가루를 생산하던 조선제분, 제당공장인 대일본제당, 맥주공장인 조선맥주 등이 정미공장 이외의 큰 공장이었고, 그 밖에 고무신공장인 조선고무, 제지공장인 왕자제지 등이 있었다.
중공업 부문에 있어서는 일본 고주파(高周波)중공업 등에서 1944년 당시 선철 43만 5118t, 보통강 7만 2025t, 특수강 2만 249t, 단주강 1만 9253t 등 총 54만 6645t의 철강재를 생산하였고, 마그네슘 생산능력 200t을 가진 일본 마그네슘금속공업, 알루미늄 생산능력 4,000t의 조선질소비료 등의 비철금속공업이 있었고, 요업에서는 조선오노다(朝鮮小野田), 일본경질도기(日本硬質陶器) 등이 큰 공장이었다.
기계공업은 도량형기 등이 중심이던 것이 1940년대에 들어와서 조선시바우라(朝鮮芝浦)의 전동기·변압기, 조선이연(朝鮮理硏)의 피스톤과 링, 용산공작(龍山工作)의 차량제조 등으로 전기기기 및 수송기기 생산이 본격화되었다. 화학공업에서는 유산암모늄(유안) 생산공장인 조선질소(朝鮮窒素), 과인산석회(과석) 생산공장인 니혼짓소, 화약공장인 조선화약 등이 대규모의 근대공업 생산시설들이었다.
1940년 말 당시 공업자본의 94.1%를 차지하였던 일본인 소유의 공장은 광복과 더불어 정부 소유로 귀속되었다. 그런데 정부는 1948년 ‘한국경제의 강화 및 안정을 위한 8원칙’, 1949년 ‘경제안정 15원칙’ 등의 규제정책을 전개하면서도 미국식 자유기업원리를 경제체제의 기본으로 삼고, 그 수단의 하나로 1949년 5월 <귀속재산처리법>을 제정하여 민영화함으로써 귀속공장의 활용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6·25전쟁으로 인한 전시경제의 운용, 방대한 국방비의 조달 등 어려운 경제여건에도 불구하고 국민경제의 계획적 운용을 최대한 피하고 시장경제원리에 입각한 경제입국을 시도하였으며, 1945∼1961년 31억 4500만 달러에 달한 외국원조는 민간자유기업의 육성을 위하여 활용하였다.
이는 정부 주도하의 계획적 개발을 시도하였던 1962년 이후와 대비하여 1945∼1961년의 한국경제를 구별짓는 특징이며, 이러한 특징이 공업화의 속도와 내용, 공업화를 위한 자금원천의 성격 등에도 판이한 상이점을 가지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1945∼1952. 광복과 더불어 시작된 남북분단은 공업활동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광복 직전 98만 8700㎾에 달하였던 발전능력의 91%에 해당하는 90만 9200㎾가 북한에 있었으므로, 1948년 북한으로부터의 송전중단은 심각한 공업용 에너지 부족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의도적 식민지수탈정책의 결과인 기술자 부족이 원활한 공업생산활동을 방해하였다.
1944년 당시 기술자 총 8,476명 중 한국인은 19.3%인 1,632명에 불과하였고, 부문별로는 경공업이 1,066명 중 338명으로 31.7%, 중화학공업은 5,063명 중 743명으로 14.7%, 토목건축업은 2,347명 중 551명으로 23.5%였으며, 기술자 비율이 가장 컸던 인쇄와 제본업에서도 56명 중 24명으로 42.9%, 가장 작은 금속공업에서는 1,214명 중 133명으로 11.0%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요인에 추가하여 사회·정치적 불안정도 작용한 결과, 1946년의 공업생산은 1939년 불변시장가격으로 1억 5219만 2000원으로 1939년 수준의 28.8%로 떨어졌다.
그러나 1946년 이후 공업생산은 급속도로 회복되어, 1949년 당시 면직물은 1946년의 2.3배, 고무신은 10.3배, 시멘트는 2.5배, 강철은 3.9배 늘어, 변압기 등 일부 품목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업생산에서 광복이 전의 수준을 회복하였다. 이러한 공업활동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것이 6·25전쟁이었다.
6·25전쟁을 통한 공업의 파손규모는 절대액으로는 건물·기계설비·원자재 및 제품 등을 합하여 파손규모가 총 11억 5300만 달러에 달하였으며, 비율로는 건물의 44%, 시설의 42%가 파괴되었다. 국민소득이 공식적으로 추계된 최초의 해인 1953년의 국민총생산이 13억 5300만 달러였으므로 1억 1530만 달러의 손실은 그 8.5%에 해당하였다.
그 결과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1951년 시멘트·철강·변압기 등이 1946년 수준을 크게 밑돌고, 면직물·종이 등이 1946년 수준을 약간 웃도는 등 공업생산은 크게 위축되었으며, 1952년에 있어서도 섬유공업·고무공업·요업·전기기기공업 등이 1949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제지공업·화학공업·금속공업·기계공업 등은 약간의 성장을 하였으며, 수송용 기기공업만이 2.3배의 생산증대를 실현할 수 있었다.
1953∼1961. 휴전이 되면서 공업은 섬유공업·식품공업 등의 소비재공업과 비료·시멘트·판유리 등의 중간재공업을 중심으로 급속히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1953∼1961년간에 총 22억 8250만 달러, 연평균 2억 5360만 달러씩 제공된 외국원조가 공업재건을 위한 자금 및 기술적 기반이 되었다.
이와 같은 원조규모는 1945∼1952년간에 제공된 총 8억 5250만 달러에 비하여 연평균액으로는 2.3배가 넘는 것이었으며, 특히 1955∼1958년간에는 연평균 3억 1690만 달러로서 총 12억 6760만 달러에 달하는 원조가 집중적으로 제공되었다. 이에 따라 원조는 공업생산액을 1953년 3253억 원에서 1961년에는 8560억 원으로 2.6배, 부가가치를 1043억 원에서 2498억 원으로 2.4배 증가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1975년 불변시장가격 기준).
이 기간 중에 제공된 원조의 28% 가량이 계획원조, 즉 시설재원조였으며 그 중 31% 가량이 광공업 부문에 투입되었고, 63% 가량이 교통·전력을 비롯한 사회간접자본 부문에 지출되고, 나머지 6% 정도가 1차산업에 배정되었다. 원조의 72%가 비계획원조, 즉 소비재 및 원자재원조에 집중된 것은 해마다의 방대한 국방비지출을 감당하기 위한 때문이었다.
산업별로 보면 중화학공업이 3.9배가 넘는 생산액 증가를 실현하여 경공업의 2.3배 성장을 크게 웃돌았다. 그 중에서도 제1차금속공업이 7.5배 성장하였고, 비금속광물제품공업이 4.3배 커졌으며, 목재 및 목재제품공업이 1.6배 성장으로 가장 뒤졌다. 비록, 성장률에 있어서는 경공업을 앞질렀지만 중화학공업의 비율은 경공업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낮아 1953년의 18.5%에서 1961년의 28.0%로 9.5%가 커졌을 뿐이다.
1961년에 있어서 가장 큰 공업은 음식료품 및 담배공업으로 그 비중은 36.4%였고, 그 다음이 섬유·의복·가죽 공업으로 26.5%를 차지하였다. 비교적 빠른 성장을 보인 비금속광물제품공업은 3.0%로 가장 작았다. 이와 같은 성장은 공업의 국민경제적 비중을 높이게 되었다. 1953년 8.9%이던 공업의 부가가치구성비는 1961년 13.5%로 4.6%가 커졌다.
한편, 중화학공업의 급속한 성장에 힘입어 소비재산업에 대한 자본재산업의 비중도 커져서 호프만비율은 1953년의 12.61:1에서 1961년의 6.45:1로 변화하였다. 이 기간중 공업부문의 고정자본형성액은 4766억 3000만 원으로 총 고정자본형성액 1조 8441억 9000만 원의 25.8%에 달하였다(1975년 불변시장가격 기준). 그러나 한계고정자본계수는 평균 1.4로 극히 낮았다.
공업이 국민총생산성장에 미친 기여율은 1954∼1961년 사이 평균 26.9%로서 단일산업으로서는 가장 컸지만, 국민총생산 성장률 그 자체는 연평균 3.9%로 극히 낮았다. 경제성장의 원동력인 국민총투자율은 연평균 12.4%였는데, 그 66.1%가 해외저축, 즉 원조였고 나머지 33.9%가 국민저축이었다.
1인당 공업생산액은 1953년의 5.9달러에서 1961년의 11.0달러로 2배 가량이나 커졌지만, 1960년 미국의 1인당 공업생산액 800.9달러의 1.4%, 일본의 158.5달러의 6.9% 수준에 불과한 미미한 것이었다.
1954∼1959년 사이 초기의 목표성장률 15.0%, 연평균성장률 8.8%라는 내용으로 짜여진 ‘한국경제재건계획(네이산보고서)’을 거부하고, 방임적 시장경제체제 확립에 노력하였던 자유당 정부와는 달리, 공화당 정부는 1962년부터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연속실천을 통한 계획적 개발체제를 지향하였다.
계획화의 기본방침으로서 ‘첫째로 되도록 민간인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는 자유기업의 원칙을 토대로 하되, 기간 부문과 그 밖의 중요 부문에 대하여서는 정부가 직접 관여하거나 또는 간접적으로 유도정책을 쓰는 지도받는 자본주의체제를 지침으로 하고, 둘째로 우리 경제의 궁극적인 진로는 공업화를 통한 산업의 근대화에 있다.’는 정책태도를 밝혔다.
이와 같은 정책태도는 우리 경제의 특징을 명령경제체제로 바꾸어 갔다. 정부는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통하여 공업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의 민간활동의 큰 테두리를 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계획목표량 할당 및 그 완수와 관련하여 크고 작은 모든 활동에 있어 규제와 명령을 강화시켜 갔다.
이 기간중의 공업화와 이를 주축으로 한 경제활동은 노동력의 무제한 공급상태에 있었던 1962∼1973년의 전기와 제한적·탄력적 공급으로 변화한 1974∼1981년의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기에 있어서 공업은 전면적 보호주의 위에서의 급속한 중화학공업화로 일관되었다. 이는 1950년대의 공업건설이 1958∼1960년 사이 소비재산업 과잉생산공황을 가져온 데 대한 경계와 중화학공업의 낮은 비율로 인한 낮은 공업자립도에 대한 우려 등에도 일부 기인하지만, 그보다는 당시의 집권세력 및 경제관료가 가지고 있던 중상주의적 국가건설이념에 더 큰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집권층은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철강·자동차·정유·비료 등 주요 중화학공업부문의 공장건설을 위한 차관교섭단을 미국·서독·일본 등에 파견했으며 ‘사회경제적 악순환의 시정’이라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기본과제와 상관없이 중화학공업화에 전념하였다.
공업화를 통한 산업의 근대화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1962∼1973년간의 총투자율은 연평균 21.5%로 커졌고, 그 60.4%가 국민저축을 통하여 자주적으로 조달되었다. 그런데 저축의 39.6%를 담당한 외국자본에도 변화가 생겨 이 기간중 무상원조는 총 12억 8190만 달러, 연평균 1억 680만 달러로 1953∼1961년 평균의 42.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대신 유상의 차관 및 외국인 직접투자가 총 43억 9320만 달러, 연평균 3억 6610만 달러로 커졌다.
이와 같이 조달된 내·외자를 합한 투자총액(고정자본형성)은 13조 3820억 6000만 원에 달하였는데, 그 가운데 25.2%에 해당하는 3조 3741억 8000만 원이 공업 부문에 투자되었고, 공업투자의 32.8%에 해당하는 1조 1081억 원이 중화학공업에, 나머지 67.2%인 2조 2661억 원이 경공업에 배분되었다.
이처럼 규모가 커진 공업투자에 힘입어 1962∼1973년의 공업은 연 19.5%라는 높은 복리성장률로 성장하여, 국민총생산 성장에 대하여 31.4%라는 기여율을 보였다. 그 결과로 경제성장률은 9.0%로 커질 수 있었다. 그리하여 1인당 공업생산액은 기간 말인 1973년 당시 95.6달러로 커져 1961년의 11.0달러에 비하여 8.7배 가까이 성장한 수치를 보여주게 되었다.
공업건설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공업생산총액은 1962∼1973년간에 8.8배 이상 커졌는데, 이는 같은 기간중 16.0배 가량이나 증가한 중화학공업생산에 이끌린 결과였으며, 중화학공업의 비율도 50.8%로 경공업을 능가하게 되었다.
산업별로는 정유공업이 속하여 있는 화학물·석유·석탄·플라스틱 공업이 1961년 대비 22.7배 이상 커져 전체 공업의 25.5%를 차지하는 가장 큰 공업이 되었고, 철강공업을 포함한 제1차금속공업이 15.6배 이상 커졌으며, 경공업에 있어서도 섬유·의류·가죽 공업이 식음료품·담배 공업을 앞질러 두번째로 규모가 큰 공업이 되었다.
이 시기의 공업화는 수출에 의하여 주도된, 따라서 ‘값싸고 품질이 좋고 풍부한 노동력’이라는 유일한 비교우위 요인을 바탕으로 하여 경공업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가능한 최대한의 자급자족을 위하여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공업화이었다.
이것은 1962∼1981년간의 공업투자총액 10조 4645억 원 중 61.8%에 해당하는 6조4633억 원이 비교우위 없는, 즉 수출·산출고비율이 작은 중화학공업에 투자되었다는 것에서도 뒷받침될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공업발전은 크게 두 가지 공업에 의하여 선도되었다. 하나는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한 반도체공업 등 첨단기술산업이고 다른 하나는 1990년대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한 석유화학산업이었다. 1981∼1994년간에 공업생산은 3.4배 증가하였는데 중화학공업생산은 4.1배 증가한 반면 경공업생산은 2.3배 증가한 데 불과하였다.
또 중화학공업 중에서도 1980년대 공업발전을 주도하였던 제1차 금속공업생산은 1.9배 증가한 데 비하여 화학물·석유·플라스틱공업 생산은 2.6배, 조립금속제품·기타 공업은 7.5배나 증가하였다. 1961∼1981년간에는 제1차 금속공업생산은 83.6배나 증가했는데, 화학물·석유·플라스틱공업 생산은 53.4배, 조립금속제품·기타공업은 45.9배 증가하였을 뿐이었다.
첨단기술산업 중 반도체공업을 보면 1994년 현재 그 생산액은 9조 8000억 원으로 공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1년의 1.7%에서 3.3%로 커지고 전자공업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16.4%에서 26.9%로 커졌다.
1995년 당시 품목별 반도체 생산실적은 개별소자 3억 8000달러, IC 157억 4000달러(그 중 메모리분야가 149억 1000달러, 비메모리 분야가 10억 3000달러로 메모리 부문에 집중되고 있다), 조립 49억 2000달러로 생산액은 총계 210억1000달러에 이르고 있다. 이 같은 생산기반을 토대로 1995년 수출실적은 190억 1000달러에 이르고 있다. 이에 반하여 수입은 30억 3000달러에 불과하다.
1980년대 후반에 일시 정체를 보이던 컴퓨터산업은 1990년대 들어 국내정보화 기반이 확충되면서 생산과 수출이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1995년 당시 컴퓨터본체 생산은 1조 1000억 원, 주변기기 생산은 4조 2000억 원으로 1991년에 비하여서는 2.0배 이상 커졌고 수출도 44억 1000달러로 1.8배 가량 증가하였다.
한편, 기종별 컴퓨터 보급상황을 보면 1995년 현재 범용컴퓨터 실제 가동대수는 1만 8238대인데 그 중 슈퍼컴퓨터 가동대수는 10대이고 초소형컴퓨터 가동대수는 1만 2981대였다. 워크스테이션 가동대수는 9만574대이고 개인용컴퓨터 보급대수는 534만 9000대에 이르고 있다.
일반기계공업이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1년의 6.8%에서 1994년에는 6.6%로 오히려 작아지고 있다(생산액 기준). 그 밖에 1995년 당시 섬유기계생산액은 1조 원, 농업기계생산액은 1조 5000억 원, 건설·광산·기계 생산액은 2조 2000억 원, 운반하는 기계생산액은 2조 8000억 원에 불과하다. 이에 반하여 NC공작 기계생산액은 53조 4000억 원으로 1991년의 21조 3000억 원에 비하여 2.5배 이상 커지고 있다.
또 산업용 로봇 분야에서는 생산은 1991∼1995년간에 12조1000억 원에서 12조 7000억 원으로 5%밖에 신장되지 못하였지만 수입은 2조 7000억 원에서 8조 1000억 원으로 증가하여 총공급은 14조 5000억 원에서 20조 8000억 원으로 커졌다. 이 역시 공업이 첨단화하고 있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1994년 당시 석유화학공업생산액은 10조 2000억 원으로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그 비중은 3.4%에 불과하다. 그러나 석유화학제품 생산능력은 1990년대 들어오면서 급격히 확충되어 에틸렌 생산설비는 1989년의 연산 115만 5000t에서 1994년에는 357만t으로 3.1배 가량 커졌고 합성수지·합성원료·합성고무 등 3대 유도품 생산능력도 451만 5000t에서 848만 3000t으로 1.9배 가량 커졌다.
3대 유도품 생산능력을 품목별로 보면 합성수지는 320만 3000t에서 623만 3000t으로 1.9배, 합섬원료는 107만 2000t에서 200만 5000t으로 그 역시 1.9배 늘었으나 합성고무 생산능력은 24만t에서 24만 5000t으로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1986∼1998년간에 기초유분생산능력은 926만t으로, 특히 에틸렌 생산능력은 4억 2900만t으로, 합성수지는 843만 1000t, 합섬원료는 517만 5000t으로 증설되었으며 합성고무 생산능력도 1996년까지 42만 5000t으로 확충되었다.
조선공업이 1970년대에 이미 수출산업으로 출발, 성숙한 데 이어 자동차산업도 1980년대 중반부터는 국제경쟁력을 갖춘 성숙산업이 되어 수출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1981년에 57만 2000대였던 자동차 생산대수는 1996년에는 955만 3000대로 커졌고, 특히 승용차 생산은 26만7000대에서 689만 4000대로 커졌다. 이 같은 생산증대를 바탕으로 1985년에 12만 3000대에 불과하였던 자동차수출도 1995년에는 108만 3000대로 늘어났다.
이 같은 첨단기술산업 등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1950년대 후반 이후부터 1970년대 전반까지 한국공업의 생산과 수출의 핵심역할을 하였던 섬유산업 등 전통공업은 상대적으로 크게 쇠퇴하게 되었다. 1995년 당시 면직물생산은 2만 9408㎡로 국내수요 7861만 1000㎡의 37.4%를 충족시켜줄 뿐이다. 모직물공업의 경우 사정은 약간 좋으나 그 역시 생산 1억 150만㎡, 국내수요 9107만㎡로 자급률은 111.4%에 불과하다.
첨단기술공업이 중심이 되어 우리 나라 제조공업성장은 1980∼1995년간에 연평균 10.0%라는 비교적 높은 성장률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에 31.0%이던 제조업의 부가가치 구성비는 1988년에 일단 32.5%로 정점에 도달한 다음 줄어들기 시작하여 1995년에는 26.8%로 떨어졌다. 제조업 비중이 일정한 크기에 도달한 다음에 다시 하락한다는 것은 선진공업사회에서도 공통적으로 경험했던 현상이다.
이 같은 탈공업화가 근자에는 이른바 정보통신혁명에 의하여 가속화되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제조업의 부가가치 구성비가 작아지는 것은 경제발전과정의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에서 1980년대 후반 이후 일어나는 제조업 부가가치구성비 하락을 자연적 추세현상이 아니라 돌발적 왜곡현상으로, 또 시기에 맞는 것이 아니라 시기상조한 것으로 보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1988년의 건축붐을 계기로 임금이 급격하게 상승하여 공업건설 및 경영을 위한 채산성을 악화시켰다는 점이다. 1983∼1987년간에는 연평균 4.4% 오른 데 불과했던 건설업 임금상승률이 1988∼1992년간에는 17.7%로 커졌다. 이로 인하여 임금 일반이 급상승하기 시작하여 전산업 평균임금 상승률은 1983∼1987년간의 9.4%에서 1988∼1992년간은 17.6%로 커졌고, 제조업 임금상승률도 10.2%에서 19.5%로 커졌다.
둘째는 이 같은 고임금에도 불구하고 특히 1989년경부터는 사람 구하기가 힘들어지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1963∼1973년간에는 실업률이 연평균 5.8%, 제조업 실질 임금상승률은 2.3%, 경제성장률은 9.6%이어서 노동시장은 나름대로 노동력 무제한 공급 단계적 성격을 가졌었다. 그리고 1974∼1989년 사이에도 실업률 3.8%, 제조업 실질 임금상승률 8.2%, 경제성장률 8.6%로 한국경제는 노동력의 제한적, 탄력적 공급양상을 보였다.
그러던 것이 1990∼1995년간에는 실업률 2.4%, 제조업 실질 임금상승률 7.7%, 경제성장률 8.3%로 노동력의 완전비탄력적 공급단계로 이행하였다. 이 같은 과잉고용, 즉 만성적 노동력부족이 공업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등장하였다.
끝으로 비싼 이자, 비싼 세금, 이른바 준소세라고 불리는 기업의 경영 외적 부담, 그리고 비싼 물류비용·토지비용 등이 고비용생산구조를 정착시켰다. 그래서 기업은 이 같은 생산상의 불이익을 덜기 위하여 때마침 실현된 한·중 국교정상화, 한·베트남 수교 등에 힘입어 종래의 동남아시아에 더하여 중국·베트남 등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업의 해외진출은 국내산업의 공동화(空洞化)현상을 가속화시켰던 것이다.
1981∼1992년간에 공업부문에 대한 투자총액은 135조5996억 원이었다. 이는 그 기간 중 투자총액 520조4874억 원의 26.1%에 약간 못 미치는 크기다. 이는 같은 기간중 제조업의 부가가치 구성비, 즉 공업구조가 평균하여 30.2%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공업투자가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