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서 소재를 얻어내는 생산 활동을 채취 산업이라 하고, 채취 산업에서 얻은 생산물을 변형시키는 생산 활동을 가공산업, 즉 공업이라고 한다.
공업은 농업이나 상업 못지않게 오랜 역사를 갖는다. 인간은 수렵채집 시대에도 자연에서 얻은 소재를 가공하여 도구를 만들었으며, 정주 생활을 시작하면서 자연의 다양한 소재를 이용하여 주거지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전근대에 인간의 생산 활동 중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았다.
수공업에서 기계공업으로의 전환을 가져온 산업혁명은 인간의 생산 활동의 중심을 농업에서 공업으로 바꾸었다. 산업혁명을 계기로 토지를 주요한 생산수단으로 하는 농업사회에서 자본을 주요한 생산수단으로 하는 공업사회로 전환하였으며, 인간은 토지 제약에서 벗어나,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전근대에 산업은 통상 농업, 공업, 상업으로 구분하였다. 현재는 농업, 공업, 상업보다는 제1차산업, 제2차산업, 제3차산업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현재에도 농업, 공업, 상업을 산업 대분류 개념으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농업은 제1차산업을 모두 포괄하는 용어로, 공업은 제2차산업을 모두 포괄하는 용어로, 상업은 제3차산업을 모두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제2차산업을 의미하는 용어로 공업을 사용할 때, 광업을 공업 즉 제2차산업에 포함하는 경우도 있고, 광업을 농업과 같은 채취 산업으로 보아 공업에 포함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통상 광업은 공업과 구분하고, 광업과 공업을 통칭하여 광공업이라 한다. 전근대 공업에는 토목건축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현재도 제2차산업을 의미하는 공업에는 제조업뿐만 아니라 건설업을 포함한다. 전기 · 가스 · 수도업은 근대에 출현한 산업인데, 전기 · 가스 · 수도업은 공업에 포함하기도 하고 포함하지 않기도 한다.
현재 한국에서 사용하는 표준산업분류에는 공업이라는 대분류 항목이 없어서, 표준산업분류의 어떤 항목들이 공업에 포함되는지는 명확하지 않고, 제2차산업의 범위도 나라별로 차이가 있다. 나라에 따라, 전기 · 가스 · 수도업을 제2차산업에 포함하기도 하고, 제3차산업에 포함하기도 한다. 2024년에 개정된 제11차 주1의 대분류 항목 중, C. 제조업, D. 전기, 가스, 증기 및 공기조절 공급업, E. 수도, 하수 및 폐기물 처리, 원료 재생업, F. 건설업은 넓은 의미의 공업에 포함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공업을 좁게 정의하는 사람들은 이 중 C. 제조업만을 공업으로 보기도 한다.
공업은 수공업에서 기계제공업으로, 가내공업에서 공장공업으로 발전하였다. 기계제공업이 발전하면서 기계를 제작하는 기계공업을 비롯한 생산재공업이 발전하였다. 소비재공업으로 분류되는 생산물도 다양화되었는데, 전자기기를 중심으로 한 내구소비재의 발전은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같은 공업의 발전을 파악하기 위해 다양한 분류학적 개념들이 만들어졌다. 공업 형태를 구분하는 분류학적 개념들에 대해 간략하게 고찰한다.
제조 과정에 기계를 사용하는가의 유무에 따라 공업을 수공업과 기계공업으로 구분한다. 경제학에서 기계란 인간 노동의 기술적 보조 수단으로, 도구와는 달리 자율작업 능력을 갖추고, 인간의 노동을 경감하는 동시에 대체하는 작용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힘으로 작동하는 도구를 사용하는 수공업과는 달리 기계제공업은 원동기로부터 동력을 받아 작업함으로써 수공업에 대한 생산력적 우위를 획득하여, 수공업을 대체하게 되었다. 수공업에서 기계제공업으로의 변화는 토지를 주요한 생산수단으로 하는 농업사회에서 자본을 주요한 생산수단으로 하는 공업사회로의 전환을 가져왔는데, 이를 산업혁명이라 한다.
가내공업은 생산자가 생산에 필요한 자본을 직접 소유하고, 주로 자신과 가족의 노동력을 활용하여 공산품을 제작하는 소경영 형태의 공업을 의미한다. 공장공업은 생산자가 고용한 타인의 노동력을 한 곳에 결집하여 분업과 협업의 이득을 추구하면서 공산품을 제작하는 대경영 형태의 공업을 의미한다. 농업에서는 노동자들의 작업을 관리 감독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신과 가족의 노동력을 활용하는 소경영이 일반적이지만, 공업에서는 노동자들의 작업을 관리 감독할 수 있는 작업장 체계를 만들 수 있어서 농업과는 달리 대경영이 발전할 수 있다. 공장공업은 일반적으로 기계제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진전되었지만, 공장제수공업도 있었다.
기계제공업이 발전하게 되면, 공업의 생산에서 기계 생산의 비중이 늘어나는데, 이 기계는 그 자체가 최종적인 소비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기계는 우회적 생산의 이득을 얻기 위한 투자재로 사용된다. 소비재를 생산하는 공업을 소비재공업, 투자재를 생산하는 공업을 투자재공업 또는 생산재공업이라고 한다.
기계제공업의 발전은 생산재공업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뿐만 아니라, 소비자 혁명을 배경으로 하여 내구소비재를 비롯한 소비재공업도 발전하였으며, 과학적 지식의 축적을 배경으로 하여 공산품을 제조하는 데 필요한 천연자원을 대체할 인조 재료를 만드는 화학공업도 발전하였다. 생산재공업, 내구소비재공업, 화학공업 등은 공업구조의 고도화를 가져온 공업이었다. 공업구조의 이와 같은 변화를 포착하기 위해, 공업을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중화학공업은 중공업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통계청에서는 광업제조업동향조사에서 제조업 부문의 중분류 업종을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으로 분류하고 있다. 2022년 광업제조업동향조사에서 채택하고 있는 분류에 의하면, 경공업에 포함되는 산업 중분류는 식료품[C10], 음료[C11], 담배[C12], 섬유제품[C13], 의복 및 모피[C14], 가죽 및 신발[C15], 나무제품[C16], 인쇄 및 기록매체[C18], 고무 및 플라스틱[C22], 가구[C32], 기타 제조업[C33] 등이다. 중공업에 포함되는 산업 중분류는 종이제품[C17], 석유정제[C19], 화학제품[C20], 의약품[C21], 비금속광물[C23], 1차금속[C24], 금속가공[C25], 전자부품 · 컴퓨터 · 영상 음향 및 통신 장비[C26], 의료 정밀[C27], 전기 장비[C28], 기계 장비[C29], 자동차[C30], 기타 운송장비[C31], 기계 · 장비 수리[C34] 등이다.
각 나라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산업구조나 공업구조의 변화에 정형화된 패턴이 있는지를 고찰하는 연구들이 진전되었는데, 이 연구들에서 발견된 정형화된 변화 패턴을 활용하여, 국가 간 산업구조의 고도화 수준이나 공업구조의 고도화 수준을 비교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변화 패턴으로는 페티-클라크 법칙이라고 불리는 산업구조의 고도화 패턴과 호프만 주2이라 불리는 공업구조의 고도화 패턴이 있다.
17세기에 살았던 정치산술의 저자인 윌리엄 페티(William 주3는 농업보다는 공업에 의하는 것이, 또한 공업에 의하는 것보다는 상업에 의하는 것이 이익이 훨씬 많다고 하였는데, 이것을 페티의 법칙[Petty’s law]이라 한다. 경제발전과 산업구조 간의 관련성을 암시한 페티의 법칙을 각 나라의 산업구조 데이터를 이용하여 정형화된 패턴으로 정립한 사람은 콜린 클라크이다.
콜린 클라크는 산업을 제1차산업, 제2차산업, 제3차산업으로 구분하고, 각 나라의 통계를 세밀히 분석하여,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노동인구가 제1차산업 중심에서 제2차산업 중심으로, 다시 제2차산업 중심에서 제3차산업 중심으로 옮겨간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것을 페티-클라크 법칙이라고 한다.
그러나 각 나라의 산업별 노동 구성의 역사적 변천에 대한 실증적 데이터가 더 엄밀한 자료 비판 위에 재구축되면서, 나라에 따라 산업 구성의 변화가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 명확해져서, 이를 반영하기 위해 페티-클라크 법칙을 수정하는 연구들도 진행되고 있다.
독일의 경제학자 발터 호프만(Walther Hoffmann)은 산업을 소비자가 구입하는 소비재 생산 부문과 생산자가 구입하는 생산재 생산 부문 혹은 투자재 생산 부문으로 분류하고, 각국의 공업구조가 고도화되는 역사적 패턴을 정립하였다. 즉, 각 나라는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공업구조는 생산재 생산 부문의 비중이 점차 증가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정형화된 패턴을 제시하였다.
호프만의 공업 분류는 내구소비재가 아직 발전하지 않았던 시기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서, 내구소비재가 중요하게 된 시기에는 그에 걸맞도록 공업을 새롭게 분류할 필요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대안적인 분류체계로 등장한 것이 공업을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현재는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중화학공업의 비중이 증대하는 현상을 호프만의 법칙으로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제철 기술을 익혀 철 가공품을 생산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대부터 섬유산업이 발전하였다. 일본 동대사의 정창원에 소장되어 있는 신라 촌락 문서에는 뽕나무가 재산으로 등재되어 있어, 고대부터 양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누에고치로부터 실을 뽑아 비단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비단은 값비싼 의류여서 일상복이 되기는 어려웠다. 고려시대에 문익점이 중국으로부터 목화의 종자를 들여오기 이전까지는 삼베와 모시가 주로 직조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목화의 종자가 도입되면 무명 즉 면포도 직조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공업은 수공업으로, 농가에서 가내수공업으로 영위하는 것도 있었지만, 관영공업으로 이루어진 것도 있었다. 신라에는 비단 공장인 조하방(朝霞房)을 비롯하여 20개가 넘는 관영공업 관장 부처가 있었으며, 고려의 경우도 공조서(供造署)를 비롯한 9개의 중앙 부서에서 공업 생산 활동을 관장하였다. 조선 전기에도 수공업은 관장제였으며, 중앙 관청에 배속된 경공장(京工匠)과 지방관아에 속한 외공장(外工匠)으로 구분되어 전국의 모든 장인이 공조(工曹)에 등록되어 국가에 의해 관리되었다. 1471년(성종 2)의 사례를 보면, 관영공업을 경공장과 외공장으로 이원화하여 공조에 주4 등 55종 258명의 장인을 둔 것을 비롯하여, 봉상시(奉常寺) 등 30개 관장 부서 밑에 129종에 2,841명의 장인을 두어 관영공업을 전담시켰고, 지방의 외공장에는 37개 직종에 3,511명의 장인을 두어 중앙 및 지방의 주5를 전담하게 하였다.
관수의 일부분은 민간 공업에 바탕을 둔 공조(貢租)에 의하여 충당되었는데, 공조는 농촌 수공업과 전문적 장인의 생산 활동에 근거를 두었다. 즉, 농촌에서는 일부 특산품적 수공업 제품을 만들었는데, 대체로 소박한 품질의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여 자가소비에 충당하고 일부는 교역하였으며, 우수한 품질의 특산품적 수공업 제품은 관수용으로 징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민간에서 생산된 직물은 자가소비를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넘어서 노비 주6이나 조세 납부의 수단으로 쓰였으며, 각종 거래의 지급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장시에서 거래된 대표적 품목으로 자리 잡았고, 면주전, 저포전, 포전, 백목전 등의 시전에서 거래되거나 정부 또는 왕실에 상납되었다.
민간에서 포목의 직조는 주로 농가의 부업으로 이루어졌는데, 전업적 직물업은 존재하였다고 하더라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반면에, 개별 농가에서 스스로 만들어 소비할 수 있는 간단한 가재도구를 넘어서는 전문적인 장비나 기술이 필요한 품목에 대해서는 독립 수공업이 성립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야철, 유기, 옹기 등을 들 수 있는데, 조선 전기와 달리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서 광범위하게 경영되었다. 독립적인 수공업이 성립하면서, 조선 전기에 관장제로 운영되던 수공업도 조선 후기에는 대부분 민영화되었으나, 이들에 대한 엄격한 관리 체계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주7를 부과하여 수취하였다.
대동법이 시행되게 되면서, 공물 대신에 대동세를 거두었다. 대동세는 공가로 공인(貢人) 계층에게 지급되었는데, 공가를 받고 물품을 상납하는 공인 중에는 물품을 직접 제작하여 상납하는 공인도 있었다. 이들은 장인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사옹원 분원이다. 분원은 원래 관영의 조직이었으나 18세기 중엽 이후로 민영화가 진행되어 사적 영업이 전개되었다. 해마다 두 차례 정례적으로 자기를 상납하였고, 그것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기에 사조가 허용되었으며 18세기 중엽에 본격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상인이 물주가 되어 자본을 대여하거나 스스로 편수의 자리를 차지하여 생산과정을 통제하기도 하였다. 1883년(고종 20)에 정부는 분원을 공소로 전환하고 공가를 지급하여 납품받는 체계를 만들었는데, 이 체계는 갑오개혁기에 해체되었다.
도자기업의 사례와 유사하게 상인이 물주 역할을 하게 된 대표적 산업으로 제지업을 들 수 있다. 종이를 만드는 것은 본래 조지서라는 관청의 업무였고, 역시 관장제로 운영되었다. 17세기 이후로 조지서가 민영화됨에 따라 전문적인 수공업자인 지장, 즉 편수가 활약하게 되었는데, 서울의 시전 중 하나인 지전이 물주 역할을 하였는데, 지전은 지장에게 지가를 미리 지급하여 생산하게 하였다.
도자기업과 제지업에서는 상인이 물주 역할을 하는 생산방식이 출현하였지만, 가장 광범하게 영위되었던 농촌 직물업에서는 이와 같은 생산방식이 출현하지 않았다.
서구의 근대적인 공업 제품은 개항 이전부터 중국으로부터 수입되었지만, 개항 이후 근대적인 공업 제품의 수입은 빠르게 늘어났다. 이때 수입된 물품은 광산기계 · 철도 건설자재 등의 생산재와 성냥 · 석유 · 염료 등 국내 수공업 제품과는 경쟁이 크지 않은 상품도 있었으나, 수입의 주종은 섬유제품이었다.
청일전쟁 이전까지 수입된 면제품은 주로 영국 맨체스터에서 생산된 공장제 면직물로 고급품이어서, 조선에서 가내수공업의 방식으로 제작된 토포(土布)와 경쟁 관계에 있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비단이 고급 의류이고, 면직물은 중저가의 의류로 생각되었는데, 영국산 고급 면직물은 비단을 대체하기도 어려웠고, 중저가의 면직물을 대체하기도 어려웠다. 영국제 면제품이 상류층에게 소비된다는 점이 영국 본국에 보고되기도 하였으나, 영국의 제조업자들은 한국 시장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영국산 고급 면직물의 수입이 조선의 전통 면직업이 미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청일전쟁 이후에 일본의 중소 규모 방직공장에서 제조한 투박하고 질기면서도 값싼 일본산 면제품은 조선의 토포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본산 면제품의 수입은 조선의 토포업에 큰 타격을 주었는데, 조선에서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방적토포(紡績土布)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방적토포란 일본에서 기계 방적사를 수입하고, 그것을 재래적인 방법으로 직포하여 만든 토포로서 신토포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조선의 재래 직기는 기계 방적사를 이용하여 직조하기에 적합한 직기는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재래 면업은 강고하게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물레를 이용하여 면사를 만들고 재래 베틀을 이용하여 직포하는 재래적인 토포였다.
일본도 개항기에는 외국산 면제품으로부터 국내 면직물 시장이 타격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재래 면업은 근대 면업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재래 면업이 근대 면업으로 재편되지는 못하였다.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하였지만, 특히 주목해 둘 것은 조선의 재래 면업의 경우 방적과 방직 간 분업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전업적 수공업으로 성립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재래 직기를 개량한 개량 직기의 보급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재래 직기의 경우에는 기계 방적사를 이용하여 직조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기계제 면직물에 대응할 만한 경쟁력을 가지지 못하였다.
비록 재래 면업이 근대 면업으로 재편되지는 못하였지만, 개항기에는 다양한 근대적 이식 공업이 외국인 주도로 발전하였다. 개항장에는 미곡의 수출을 배경으로 근대적인 시설을 갖춘 정미소들이 외국인에 의해 설립되었다. 1889년(고종 26)에 일본인이 인천정미소를 설립한 뒤에, 1892년(고종 29)에 역시 인천에 미국인 타운센트가 정미소를 설립하였는데, 엥겔식 정미기를 도입하고 60마력의 증기기관을 설치하였다. 당시 인천정미소에는 원동기가 4마력의 증기기관이었고, 가공기가 수차용의 돌절구[石臼] 기계 20대였던 것과 대비된다. 석유식 발동기는 1898년(고종 35)에 목포의 이데정미소[井出精米所]에서 최초로 사용하였다. 청일전쟁 이후에 다수의 도정기가 개항장에 수입되었으며, 부산 등지에는 일본인 도정기 제조업자까지 출현하였다. 정미업을 제외하면, 일본인 거주자용으로 간장 · 술 · 과자를 만드는 공장 등이 건설되었다.
조선 정부나 한국인들에 의한 근대적인 공장 건설도 이루어졌다. 1899년(고종 36)에 서울의 종로포목상이 중심이 되어 종로직조사가 건설되었고, 1902년(고종 39) 사기제조소 · 김덕창직조공장 등이 생겼다. 가장 흔하게 만들어진 공장은 직조 공장이었지만, 일본의 오사카방적처럼 대규모의 기계제 방적공장을 설립하지는 못하였다. 관영 공장으로는 1903년(고종 40) 한성전기, 1905년(고종 42) 인쇄국, 1907년(순종 1) 기와 · 토관 공장이 설립되었다. 1902년에 궁내부 내장사 직조서에 모범 양잠소가 설치되어 근대적 양잠 기술을 가르쳤고, 각도에 공업 전습소를 설립하여 염색과 직조 등에 관한 기술 보급에 힘써 공업화를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그러나 공업화가 진전될 수 있는 시장경제 체제가 확립되지 못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907년에 통감부에서 조사한 전국의 공장 통계를 보면, 70개 공장 중에서 소유주가 조선인인 사례는 7개뿐이고, 56개가 일본인 공장이었다. 공장의 설립 연도는 19051907년이 50개, 19001904년이 12개, 1892~1899년이 6개여서,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공장은 매우 적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이래로 자본을 축적하여 성장한 조선인 상인이 자본가로 전화한 사례를 찾기도 어렵다.
개항기에 출현한 근대적 이식 공업은 일제강점기에 들어 보다 빠르게 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업구조의 고도화도 진행되었다. 1920년대까지의 공장공업은 주로 간장 공장 · 된장 공장 등과 같은 한국에 진출한 일본인들의 공산품 수요를 맞추기 위한 공장, 제사업 · 조면업 · 정곡업 · 정련업과 같은 일본으로 반출되는 자원의 운송비 절감 목적으로 행해지는 자원 가공형 공장, 메리야스나 고무신과 같이 한국인의 수요 증대에 기반한 공장 등이 발전하였다. 하지만 1930년에 들어와서는 일본의 「중요산업통제법」의 규제를 피하면서 조선의 노동력과 전력 자원을 활용하기 위한 일본 재벌계 자본에 의한 공장 건설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37년 이후에는 한국에 진출한 일본 재벌계 자본이 주도하는 중화학공업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에 공장의 정의는 몇 차례 변하였다. 1929년 이후에는 공장은 5인 이상의 직공을 사용하는 설비를 갖거나 상시 5인 이상의 직공을 사용하는 것으로 정의되었지만, 1928년 이전에는 직공 수 기준 이외에 다른 기준 예컨대 생산액이나 원동기 보유 등의 조건을 충족하는 것도 공장으로 파악되기도 하여, 직공 5인 이하의 공장이 포함되어 있다. 즉 1913~1928년 동안에는 1929년 이후보다 더 넓은 대상이 공장으로 파악되었다.
공장의 범위가 1929년 이후 더 적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장 수를 보면, 1913년에는 524개였는데, 1940년에는 13.7배 늘어난 7,157개가 되었다. 공장의 산업별 구성을 보면, 전 기간에 걸쳐 경공업 공장이 중화학공업 공장 수를 능가하였지만, 1930년대에는 경공업보다 중화학공업 공장이 빠르게 늘어나, 경공업 공장의 비율은 1913년에 80%에서 1940년에는 64%로 감소하였다.
공장 수가 늘어나면서 공장 종업자 수도 늘었다. 1911년 공장 종업자는 1만 6286명이었는데, 1940년에는 19배 늘어난 30만 8705명이 되었다. 경공업 공장 종업자가 중화학공업 공장 종업자보다 더 많기는 하였지만, 중화학공업 공장 종업자가 더 빨리 증가하여, 1940년에는 양자의 규모가 거의 같아졌다. 공장 생산액도 공장 종업자 수와 유사한 성장 추세를 보여주는데, 중화학공업의 성장률은 1930년대에 들어와 특히 더 빨라져서 1940년에는 중화학공업 공장 생산액이 경공업 공장 생산액을 능가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공장의 발전은 노동생산성의 성장이 견인하고 있었다. 공장 종업자 일인당 실질 생산액[1935년 불변가격]은 1911년에는 1,820원이었지만, 1940년에는 3,540원으로 증가하여 연평균 증가율은 2.33%였다. 근대 공업 부분의 높은 노동생산성은 농업 부문으로부터 근대 공업 부문으로 자원의 이동을 가져오면서, 생산성 향상의 이득 위에 구조적 보너스도 더해져,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공장 종업자 일인당 실질 생산액 증가율은 경공업보다 중화학공업에서 더 빨랐는데, 시기별 증가 추세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경공업은 1910년대에서 1920년대 중반에 걸쳐 빠르게 증가하였지만, 중화학공업은 1930년대에 들어와서 빠르게 증가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공장의 규모에 이르지 못한 가내공업도 무시할 수 없는 규모였다. 일제강점기 초에 공산액의 대부분은 가내공업에 의한 생산이었다. 이 시기에는 공산액에서 가내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80%를 웃돌았다. 이후 공업화 과정에서 공장 생산의 비중은 크게 증가하였지만, 가내공업의 성장은 상대적으로 저조하여 1930년대 말에 공산액에서 가내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 전후로 감소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자급적 생산이나 국지적 거래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와 같은 열악한 교통 조건 속에서 우량종자의 보급이나 주8의 개선 등에 의한 농업생산의 증가는 공산물의 자급적 생산 또는 국지적 생산 및 거래를 강화한 측면이 있는데, 이는 1910년대 가내공업의 증대로 나타났다. 그러나 교통 사정이 개선됨에 따라 열악한 교통 사정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자급적 가내공업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지만, 시장형 가내공업은 성장하였다. 일제강점기 가내공업이라고 하면 자급적 가내수공업 단계에 머물렀던 전통적인 가내공업, 특히 전통적인 면직물업을 떠올리지만, 가내공업에서 전통적인 면직물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았다. 한국의 공업화가 전통적인 가내공업을 해체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였던 것이 가내공업이 상당한 규모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 측면도 있지만, 개항 이후 새롭게 이식된 가내공업들이 식민지기에도 빠르게 성장하였던 것이 가내공업의 규모를 유지하고, 또 증가 추세를 만들어 내는 데 기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근대적 공업을 발전시킨 주체는 한국에 정착한 일본인 기업가들이었다. 한국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일상적인 생활 물자를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만 의존할 수 없었다.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많아지자, 자신들의 수요에 기반한 식료품 공장들을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의 수출 자원의 경우, 운송비를 줄이기 위한 가공 공장들인 정미소, 조면 공장, 제련 공장 등도 만들어졌으며, 한국에서 사용되는 기계나 설비의 수리 공장 등이 만들어졌다.
일본 제국은 일본은 공업지대로 한국은 농업지대로 하는 식민지적 분업 체계를 한국에 구현하고자 하였지만, 한국에 정착한 일본인이 한국에서 근대적인 공업을 일으키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한국에 정착한 일본인 기업가는 일본은 공업지대, 한국은 농업지대라는 식민지적 분업 체계의 구도를 허물면서 한국에서 공업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강화하고 있었다. 일본인 공장은 한국에 정착한 일본인 또는 한국에 진출한 일본계 자본이 운영하는 공장인데, 공업 업종으로 보면, 식료품 공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50%를 밑돌았다. 금속 · 기계 기구 · 화학의 비중을 보면, 1920년에는 15.2%였는데, 1930년에는 19%로, 1938년에는 31.9%로 증가하였다.
한국인 공장 수는 1920년에는 일본인 공장 수보다 적었지만, 일본인 공장보다 빠르게 늘어나서, 1938년에는 한국인 공장 수가 일본인 공장 수의 1.5배에 달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공장 규모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인 공장의 규모가 한국인 공장의 규모보다 컸기 때문에, 공장 규모를 고려하면, 1938년에도 공장 생산에서 일본인 공장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인 공장의 업종을 보면, 일본인 공장과 마찬가지로 식료품 공업의 비중이 높기는 하지만, 정곡업 공장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1930년을 제외하고 보면, 한국인 공장에서 식료품 공업의 비중은 일본인 공장보다 작았다. 일본인 공장의 경우 도시에 거주하는 일본인 식료 시장을 바탕으로 식료품 시장이 크게 성장하였지만, 한국인 공장의 경우 비식료품 공장의 비중이 더 높았다. 한국인 공장의 경우 금속 · 기계 기구 · 화학의 비중은 일본인 공장에서의 동종 산업의 비중을 능가하는데, 1920년에는 32%, 1930년에는 25.8%, 1940년에는 39%였다.
한국인들은 한국에 정착한 일본인 또는 한국에 진출한 일본계 자본으로부터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한국인이 한국에 정착한 일본인 또는 한국에 진출한 일본계 자본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적 우위와 선점자의 우위를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와 같은 역량을 갖추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 정착한 일본인 또는 한국에 진출한 일본계 자본은 한국인 기업의 발전을 촉진하는 측면과 억압하는 측면이 모두 존재하였다. 민족별 공장 통계를 보면,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인 공장 수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 공장의 발전은 한국인 공장의 발전을 억압하는 측면보다는 촉진하는 측면이 더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광복은 일본 제국적 분업 체계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공업은 일본 제국의 분업 체계의 일환으로 작동하고 있었으므로, 일본 제국적 분업 체계의 해체는 한국의 공업 생산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광복과 더불어 시작된 남북분단도 공업 활동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다. 일제강점기에 남한과 북한은 통합된 시장으로서 긴밀한 분업 관련이 있었는데, 남북분단으로 이와 같은 분업 관련이 해체되면서 한국의 공업 생산에 심대한 충격을 준 것이다. 특히 광복 직전 98만 8,700㎾에 달하던 발전 능력의 91%에 해당하는 90만 9200㎾가 북한에 있었으므로, 1948년 북한으로부터의 송전 중단은 심각한 공업용 에너지 부족을 가져왔다.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공장에서의 노무 구조는 기술자는 일본인, 노무자는 한국인이라는 식민지적 차별의 체계였으므로, 광복 후 일본인 기술자가 주도적으로 운영하던 공업들은 기술자 부족으로 원활한 공업 생산을 하기 어려웠다.
이와 같은 다양한 충격 속에서 공업 생산은 극도로 위축되었지만, 1946년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까지는 회복의 추세에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회복되고 있던 공업 활동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한국전쟁으로 공업 부분이 입은 피해는 절대액으로는 건물 · 기계설비 · 원자재 및 제품 등을 합하여 총 1억 5300만 달러에 달하였다. 국민소득이 공식적으로 추계된 최초의 해인 1953년의 국민총생산이 13억 5300만 달러였으므로 1억 1530만 달러의 손실은 그 8.5%에 해당하였다.
1953년부터는 다시 경제 재건이 이루어졌다. 소비재공업으로 면방직, 제당, 제분 등 삼백 공업과 고무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1953~1960년간에 전체 공업 부가가치가 2.44배가 되었는데, 소비재공업 부가가치는 2.31배가 되었다. 소비재공업의 성장에는 이승만 정부의 환율 및 조세정책도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 정부는 실수요자제 아래 있던 면방직업체나 모방업체, 제분업체, 제당업체 등에 대해서는 가장 낮은 주9을 적용해 원조 물자를 값싸게 불하하였다. 또 그 밖의 경우에도 원조 물자 불하 입찰에 참가자를 제한하여 낮은 공매 환율로 물자를 불하하였다. 이렇게 값싸게 원조 물자를 불하받은 면방직업체 등은 생산비를 낮출 수 있었다. 그리고 관련 완제품의 수입을 억제함으로써 제품 가격이 높게 형성되었다. 그밖에 저금리의 금융 지원, 세제상 우대까지 더해져 제조기업은 큰 이익을 보았다.
이 시기에는 원조 물자와 관련하여 소비재공업이 발전하였지만, 생산재공업은 소비재공업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여,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생산재공업의 비중은 다소 증가하였다. 물론 1953년에 생산재공업의 비중은 매우 작았기 때문에, 생산재공업이 빠르게 성장하기는 하였지만, 1950년대 말에도 생산재공업의 비중은 20%가 되지 않았다.
소비재공업보다 생산재공업이 더 빠르게 성장한 데에는 일본에의 경제적 의존을 막기 위해서 소비재공업보다 생산재공업, 곧 기간산업을 육성하려고 한 이승만 정부의 공업화 정책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일본의 재건을 돕기 위해 비료 등의 대한 원조 물자를 일본에서 조달하였는데, 이승만은 그 물자를 한국에서 생산하도록 미국이 지원해 달라고 요구하였고, 생산재 공장의 건설에 직접 관여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비료, 시멘트, 판유리 등 민간자본이 쉽게 착수할 수 없는 생산재 공장은 정부가 건설하였다. 정부는 1955년부터 충주에 비료 공장을, 문경에 시멘트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하였으며, 1956년에는 인천에 판유리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이 중 건설 비용이 막대한 비료 공장은 정부가 계속 운영하기로 하였으나 나머지 두 공장은 건설 후 바로 민간에 불하하는 방침을 택하였다.
이 시기의 공업화는 수입대체 공업화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지속하기 어려웠다. 첫째, 이 시기의 공업화는 원조에 의존한 공업화였다. 공업화를 위해 필요한 원자재와 기계는 수입하여야 하는데, 이 외화는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은 점차 원조를 줄이려 하고 있어서, 원조에 의존한 수입대체 공업화를 지속하기 어려워졌다. 둘째, 수입대체 공업화는 국내 시장을 바탕으로 공업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1950년대에는 재건 수요가 컸기 때문에, 재건 수요가 수입대체 공업화를 견인하는 시장적 기초가 될 수 있었지만, 재건이 어느 정도 완료되면 재건 수요는 사라지는데, 국민 생활은 여전히 빈곤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국내시장을 바탕으로 해서는 공업화를 진전하기 어려웠다.
박정희 정부는 1962년 1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발표하였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10년 후에 소득을 두 배 이상으로 올리겠다는, 즉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7% 이상으로 하겠다는 경제개발의 비전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규모 투자계획을 수립하였다. 이것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첫해인 1962년도 총투자율을 높은 수준으로 올려놓았는데, 국내 저축으로는 투자 재원을 마련하지 못하였으며, 외자도입도 이루어지지 않아 외화 순자산은 1961년 말 1억 4000만 달러에서 1963년 말에는 2500만 달러로 격감하였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경제성장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본형성율을 높여야 한다는 자본 이론에 기반한 계획으로서, 당시 신생독립국가들이 대체로 수용한 경제개발 정책이지만, 국내 저축률도 낮고 외자도입도 어려운 상황에서 제대로 실행되기는 어려웠다. 그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개발계획을 수립하고, 목표대로 높은 자본형성을 한 나라들의 대부분도 경제성장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중요한 것은 자본형성 그 자체가 아니라 자본형성을 통해 구현되는 생산성의 향상이었다. 생산성의 향상을 도모할 수 있는 자본형성의 체계를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설계도를 가지지 못한 경제개발계획이어서, 투자 재원 조달의 문제가 해결되어도 성공할 수 있었을지는 알 수 없다.
박정희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성장 목표를 낮추고, 투자계획을 줄이는 것으로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수정하였지만, 여전히 생산성의 향상을 도모할 수 있는 자본형성의 체계를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설계도를 마련한 것은 아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새로운 활로가 출현하였다.
기업가들이 수출 증대 방안을 모색하고, 또 성과를 낸 것이다. 이것은 당시 외화 부족의 문제에 시달렸던 박정희 정부에게는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공산품 수출 증가에 박차를 가하였다. 1964년 6월에 상공부는 수출진흥책을 내놓았으며, 1964년 하반기부터 박정희 정부는 수출제일주의와 수출입국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해 수출이 1억 달러를 돌파한 기념으로 수출의 날을 제정하였다. 이후 정부는 수출 증대에 총력을 기울이고, 제반 지원 체제를 갖추었다. 이른바 수출지향 공업화가 개시된 것이다. 수출진흥책 중 대표적인 것은 저리 수출금융이었다. 이는 은행 일반대출금리보다 낮게 수출업자에게 대출해 주는 것이었다. 수출용 원자재에 대해서는 관세가 면제되었다. 정부는 매월 대통령 주재 하의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열어 수출 진흥 방안을 논의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는 섬유 의복, 합판, 가발 등 경공업품을 중심으로 수출이 매년 급증하였고, 관련 공업이 급성장하였다.
섬유공업은 1963년에 이미 제조업 전 취업자의 27%, 생산액의 23%, 부가가치의 20%를 차지하는 제1의 산업이었다. 노동력이 풍부한 한국의 경제 여건에 비추어 수출 신장 가능성이 가장 큰 산업이기도 하였다. 최종 제품인 봉제품[와이셔츠 등]과 메리야스 제품[스웨터 등]의 수출과 내수가 증가하자 직물과 실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고, 그를 공급하기 위해 기존 면방직업의 시설 최신화와 나일론, 아크릴, 폴리에스터 등의 화학섬유 공장의 건설이 진행되었다. 이 중 합성섬유 공장의 건설은 섬유공업의 새 장을 열었다.
1950년대에 전쟁으로 파괴된 건물의 건축이 활발해져 목재 수요가 증가하였고, 이에 목재산업이 발흥하였다. 복구 수요가 일단락되자 목재산업이 불황에 빠졌는데, 목재업자들은 새 활로로 일본의 합판 가공업을 참고하여 합판 가공을 시작하였다. 합판 가공 역시 노동집약적 품목으로서 우리나라에 적합하였다.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대미 합판 수출은 품질개선을 통해 1960년대 중엽 이후 급증하였다. 1970년대 초에는 합판이 제2위의 수출 품목이 되었고, 한국은 세계 1위의 합판 수출국이 되었다.
가발 제조는 우리나라 여성의 섬세한 손재주, 풍부한 노동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내에서 조달할 수 있는 원료 등 면에서 1960년대 전반 우리나라에 딱 맞는 업종이었다. 그렇지만 한국인들은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하여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판매하거나 타인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을 쓰는 것을 금기시하는 문화였다. 그래서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가발 제조는 거의 없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가발이 새로운 패턴 소품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서울통상의 최준규는 이와 같은 시장 동향을 파악하고 가발 제조에 뛰어들었다. 저렴한 인건비를 이용해서 가발을 만들면 수출을 늘릴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당시 가발 시장은 중국산 인모(人毛)로 만든 홍콩 가발이 주도하고 있었다. 미국은 중국산 인모로 만든 홍콩 가발의 수입을 일시 금지하였는데, 이 조치는 한국산 가발이 미국 시장에서 성장할 기회를 주었다. 1964년 13만 달러에 불과하던 가발 수출액은 1965년 162만 달러, 1966년 1068만 달러를 거쳐 1970년에는 9357만 달러로 뛰어올랐다.
한국의 명목 수출액은 19621970년간에 연평균 40%씩 증가하였다. 특히 섬유류, 합판, 가발 세 품목의 수출이 급증하여 세 품목의 수출은 1970년경에는 전체 수출의 2/3에 달하였다. 19611970년에 섬유 의류 수출액은 85배로 커졌는데, 그중에서도 의류 수출액은 6만 7000달러에서 2억 1357만 달러로 3,200배로 커졌다. 같은 기간 중 합판 수출액은 120만 달러에서 1억 200만 달러로 85배가 되었으며, 1961년 3만 달러에 불과하던 가발 수출액은 1970년 9400만 달러로 역시 3,100배 이상으로 급증하였다. 당시 전형적인 수출 현장이란, 여공이 재봉틀로 박음질해서 아동복, 와이셔츠를 만들거나, 편물기로 스웨터, 내의를 짜는 곳이었다.
그러나 수출 수요의 증대가 고도성장을 낳은 것은 아니었다. 수출 수요는 1960년대 후반에 GDP의 13.5% 정도에 불과하였다. 수출 급증과 함께 투자율이 높아진 것이 고도 경제성장을 낳았다. 총고정자본형성률은 1960년대 초 78%였으나, 빠르게 상승해 1970년을 전후해서는 20%에 육박하였다. 그 결과 1966년에는 최초로 두 자릿수의 성장률을 기록하게 되었다.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은 진입장벽이 높지 않아서, 다른 저개발국들의 진입이 이루어지면서 그 장래가 밝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경제의 선진화를 이룰 수는 없었다. 자본집약적이며 기술집약적인 산업으로 공업구조를 고도화하지 않으면 고도성장을 지속하기도 어렵고, 경제의 선진화를 이루기도 어려웠다. 중화학공업화를 통해 산업구조를 고도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국은 수출 경공업의 발전에 머물지 않았다. 경공업품을 수출하는 공업화 전략이 선택되었을 무렵 그와 함께 중화학공업화도 추진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1960년대에 비료 공장과 석유화학단지, 종합 제철소의 건설을 추진하였으며, 1970년대에는 여러 중화학공업의 전면적 발달을 추진하였다. 이 점에서 한국의 공업화는 경공업의 발전과 중화학공업의 발전을 동시에 추진한 복선형(複線型) 공업화였다.
중화학공업을 건설하고 운영하기에는 민간의 역량이 미흡하였기 때문에, 한국의 중화학공업화는 국가 주도로 출발하였다. 1960년대에 착수된 비료 공장, 석유화학 콤플렉스, 종합 제철소, 그리고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화는 모두 국가 주도로 진행되었다. 어느 산업을 발전시킬 것이며, 어느 업체, 몇 개 업체가 해당 산업에 진입할 것인지, 또 어떤 방식으로 공업화를 할지는 모두 국가가 결정하였다. 정부는 1973년 6월에 중화학공업 육성 계획을 발표하였다.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화학공업을 6대 전략 업종으로 하여, 차후 8년간 총 88억 달러의 자금을 투자하여 1981년까지 전체 공업에서 중화학공업의 비중을 51%로 늘린다는 계획이었다.
정부는 새로 선정된 중화학 기업들에 금융, 세제, 인력을 집중적으로 지원하였으며, 관련 중소기업 육성을 위해 「중소기업계열화촉진법」도 제정하였다. 가장 중요한 유인은 국민투자기금의 투융자, 산업은행의 장기 저금리 대출, 정책금융을 통한 일반은행의 우대 대출 등 금융지원이었다. 국민투자기금은 국민투자채권 발행과 금융기관의 예탁금을 주요 재원으로 하였다.
기능공 양성에 주안을 둔 인력개발도 추진되었다. 정부가 노동-기능 집약적인 조립 가공 부문부터 중화학공업화를 계획하였으므로, 특히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기능공의 공급 부족이 예상되었다. 대다수 기능공은 민간 기업체 사내 직업훈련소에서 양성하되, 정부는 공업고등학교의 확충과 특성화 및 각종 지원 제공에 힘썼다. 1973년 8만 8000명이던 공업고등학교 학생 수는 1980년에는 20만 명으로 2.3배가 되었다. 이렇게 배출된 기능공이 한국 중화학공업의 핵심 기술 인력으로 성장하였다.
1973~1979년의 기간 동안 중화학공업에 총 4조 1360억 원의 투자가 이루어졌다. 이 중 내자가 61%, 외자가 39%였다. 전체 투자금의 86%가 시설 설비 투자였다. 중화학 투자가 대대적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총고정자본형성률은 1970년대 초 20% 이하에서 1970년대 말에는 30%를 넘었다. 1980년 전체 제조업에서 중화학공업의 비중은 54%가 되었으며, 1981년 공산품 수출에서 중화학 제품의 비중은 49%가 되었다.
수출은 1970년대에도 급증세를 이어갔지만, 그 주력품은 빠르게 바뀌었다. 1960년대의 주력 수출품 중 섬유 의류 수출액은 1970년대에 12배가 되어 1위 수출 품목의 자리를 지켰으나, 4.4배 증가한 합판은 8위로 떨어졌으며, 가발은 수출액 자체가 감소하여 주요 수출 품목에서 탈락하였다. 그 대신, 1979년에는 신발, 전기기기, 수송기기, 철강제품 등이 주요 품목으로 등장하였다. 1979년에 전기기기품은 수출 품목 중 2위, 철강제품이 3위, 선박이 5위가 되었다. 그리고 신발이 4위에 올랐다. 섬유 의류와 신발 등 경공업품도 5위 안에 머물렀으나, 중화학품이 2, 3, 5위를 새로 차지하여 경공업품에서 중화학품으로의 수출 대체가 진행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인플레이션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 일어날 수 있는데, 이 시기의 인플레이션도 다양한 요인들이 중첩되어 일어난 것이었다. 1970년대 후반 중화학공업화에 필요한 재원의 일부를 통화 증발로 마련한 것, 1976~1978년에 중동 건설 수주 호조에 따라 해외 부문에서의 통화 증발이 일어난 것, 1978년 12월 이란 회교 혁명이 일어난 후 혁명정부가 서방 석유 회사[메이저]를 축출하자 생산이 격감하고 공급망이 교란되어 국제유가가 폭등한 것 등이 인플레이션을 심각하게 하였다. 1979년에 들어와 경제기획원 등 여러 유관 기관에서 중화학 투자 조정의 목소리를 냈다. 결국 그해 4월 투자 조정을 담은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이 발표되었고, 5월에는 중화학 투자 프로젝트를 유보 중지하기로 하였지만, 하반기에는 기업의 선투자가 계속되는 등 혼선이 이어졌다. 이 상황에서 10·26사건이 일어나, 단순한 투자 조정을 넘어선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전면적 재검토가 의제로 떠올랐다.
1970년대까지 정부가 중화학 투자를 결정하였으나, 1980년에 성립한 전두환 정부의 집권 세력은 산업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칠 생각이 없었다. 1970년대의 산업정책에 비판적이던 이코노미스트 그룹이 경제정책의 주도권을 쥐었다. 하지만 1980년대에는 정부가 뒤로 물러났음에도 민간 주도로 대규모 중화학 투자가 이루어졌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기업의 투자에 대해 정부가 위험을 분담하는 체계가 형성되었는데, 금융시스템 속에 빌드 업 되어 있던 이 위험 분담 체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성장한 민간 대기업들은 정부의 계획과 관계없이 혹은 정부의 의사를 거스르고 대규모 투자를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해 있었는데, 1980년대 초 현대의 승용차 양산 투자와 삼성의 반도체 투자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한국 경제는 1980년의 한국전쟁 후 최초의 마이너스 성장의 충격에서 빠졌지만, 이후 빠르게 회복하여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9811982년에 78%를 기록하였고, 1983년과 1984년에는 13%, 10%의 고도성장을 기록하였다. 제조업은 1983년, 1984년에 17%, 20%라는 강한 성장세를 보였다. 그리고 1986~1988년에 3저 호황이 왔다. 그 결과로 한국의 수출은 급증하였다. 수출액은 1985년 300억 달러였으나 1988년에는 600억 달러가 되어 3년 만에 두 배가 되었다. 증가율은 1986년 14.6%, 1987년 36.2%, 1988년 28.4%였다.
19861988년간 제조업 성장률은 연 17%에 달하였다. 중화학공업이 급속히 성장해서 1980년 60%에 못 미쳤던 중화학공업의 비중이 1990년에는 71%로 되었다. 5대 수출 품목도 바뀌어 1980년 섬유류-전자제품-철강제품-신발류-선박이던 것이, 1990년에는 전자전기-섬유류-철강제품-선박-화공품이 되었다. 그리고 19861988년의 3년간 한국의 무역수지가 흑자로 돌아섰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 1990년대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7%대로 나쁘지 않았다. 1990년 6,000달러이던 일인당국민소득이 1995년에 1만 달러를 넘었다. 몇몇 업종의 기업이 미증유의 고수익을 올리면서, 장래를 낙관하고, 공격적이며 경쟁적인 투자에 나섰다. 거침없는 투자와 과열 경기를 뒷받침한 것은 해외 부문에서의 대규모 차입, 특히 단기외채 도입이었다.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전 해인 1996년 국제통화기금이 작성한 한국 보고서는 한국 경제에 큰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내외금리차가 크다는 점은 지적하고 있다. 국내 이자율보다 해외에서 조달하는 자금의 이자율이 현격히 낮았기 때문에, 1990년대 중엽의 수년간 단기외채를 중심으로 외자가 대거 도입되어 기업의 투자자금으로 쓰였다. 한국의 해외 채무는 1994년 말 898억 달러이던 것이 1997년 9월에 1706억 달러로 거의 두 배로 늘었다. 전체 외채 중 단기외채가 1040억 달러에 달하였다. 그러나 정부 당국은 이것이 어떤 체계적 위험을 가져올지 알지 못하였다.
1997년 1월에 한보, 3월에 삼미, 4월에 진로와 대농 등 중견 그룹의 연쇄 부도가 일어났다. 7월에는 재계 8위인 기아자동차가 부도 위기에 몰렸다. 이런 상황에서 8월에는 태국 등 동남아시아에서 외환위기가 일어났다. 동남아 국가들은 외자를 빌려 중화학공업 등에 대규모 투자를 하면서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되었다. 동남아에 적으로 투자하던 일본 은행들은 자국 내 대형 보험사 도산 등 금융위기 때문에 국제결제은행[BIS]이 정한 자기자본비율을 맞추기 위해 자금을 회수하였다.
여기에 국제 투기 자본까지 가세해서 동남아국 통화를 집중적으로 매도하여 통화가치 폭락을 유발하였다. 일본 금융기관들은 한국 은행들에 대한 채권도 무차별적으로 회수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은행들은 이 갑작스러운 자금 회수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이에 1997년 8월 25일 한국 정부가 은행 외채에 대해 지불보증을 하였으나, 그해 9월 말 현재 정부 보유 외환은 단기외채의 41%에 불과하였다. 서울 증시에서도 외국인의 주식 매도로 주가가 폭락하였다. 환율은 폭등하였다. 한국 정부는 마침내 백기를 들고, 11월 21일 국제통화기금에 긴급 융자 신청을 하였다.
외환위기의 원인에 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국제통화기금과 미국 정부의 견해인 근본 요인론이다. 한국 경제는 중복 과잉투자와 기업과 금융의 부실화, 정책 미스, 경상수지 적자,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10] 등 경제 시스템의 총체적 부실화가 진행되어 위기가 발생하였다는 주장이다. 또 하나는 자기실현론이다. 한국의 채무상환 능력은 문제가 없었고 일시적으로 유동성이 부족하였을 따름이며, 시장 참여자들의 갑작스러운 기대의 변화가 자기 실현되어 외화 인출 및 지급불능 사태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첫 번째 견해가 지배적이었고, 이에 기반한 구조개혁이 단행되었다.
외환위기가 동반한 환율의 상승은 수출 증가를 촉진하였다. 역사적 평균보다 오랫동안 낮게 유지된 원화 가치는 생산 자원을 내수산업에서 수출산업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수출과 무역의 비중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품목별로는 전자기기, 기계, 운수장비 수출이 많이 증가하였다. 1997~2017년간에 전체 수출이 4.2배 증가한 가운데, 전자기기, 기계 및 운수장비 수출은 5배 증가하였다. 이 제품 수출액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7년 50%에서 2017년 59%로 높아졌다. 지역별로는 대중국 수출과 수입이 증가하였다. 대중 수출은 2000년 이후 급속히 증가하여, 중국이 2003년 미국을 제치고 1위 수출대상국가가 되었다. 대중 수출 비중은 2005년 21.8%를 거쳐 2010년에는 25.1%에 달하고 그 후 수준을 유지하였다. 2010년 대중 수출은 대미, 대일 수출을 합한 것보다 더 컸다.
이 수출 증가는 전자기기, 기계, 운수장비 업종의 한국 기업이 세계화의 흐름에 올라타 글로벌기업으로 변신한 덕분이었다. 반도체와 휴대폰 등 전자부품 및 전자기기, 자동차, 조선, 화학 등에서 한국 산업이 글로벌 가치사슬에 깊숙이 편입되었다. 특히 1990년대부터 전기 및 전자기기의 수출을 위한 생산 네트워크가 일본, 한국과 대만, 주11, 중국 등 아시아에 집중적으로 형성되었는데, 한국의 전기 및 전자기기 제조업이 그 수혜를 입었다.
그러나 성장은 균질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대분류 업종 내에서도 명암이 엇갈렸다. 전기 및 전자기기가 두드러지게 성장하였으며, 기계 및 장비가 그 뒤를 따랐다. 제조업 중 컴퓨터, 전자 및 광학기기업의 비중은 1999년 20.2%에서 2017년 27.8%로 급증하였다. 기계 및 장비 제조업 비중도 6.0%에서 9.0%로 커졌으며, 화학제품 제조업과 운송장비 제조업은 그 비중을 유지하였다. 반면, 음식료품 제조업, 섬유 및 가죽제품 제조업, 목재 종이 인쇄업, 비금속광물 제품 제조업 등은 비중이 축소되었다. 특히 섬유 및 가죽제품 제조업의 비중은 7.7%에서 3.3%로 격감하였다. 이러한 산업의 동향을 낳은 제1의 요인은 세계화에 편승할 기회의 유무였다. 컴퓨터, 전자 및 광학기기 제조업은 아시아에 형성된 세계 전자 생산기지 네트워크에 참여함으로써 급성장하였고, 기계장비 제조업과 운송장비 제조업과 화학제품 제조업도 국제무역의 확대에 힘입어 성장하였다. 반면 여타의 제조업과 대부분의 서비스업은 세계화의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아 정체하였다.
이 시기 크게 성장한 전기 전자‧기계‧운송장비 등 고생산성 업종의 취업자 수는 많이 늘어나지 않았다. 취업자들은 저생산성 서비스 부문에 흡수되었다. 그 결과 제조업과 서비스업 간에 취업자 일인당 소득격차가 확대되었다. 제조업은 세계화, 자유화, 중국의 부상이 제공한 거대한 기회를 잡아 빠르게 성장하고, 그런 기회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된 다른 부문은 정체하거나 상대적으로 성장률이 낮았다. 이 기술 진보와 세계화에 따른 산업구조와 취업구조의 변화가 소득격차를 확대시켰다. 전기 전자‧기계‧운송장비 등 고생산성 업종의 성장 기반을 강화하면서, 서비스 부문에서도 고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도록 서비스산업의 재구축이 시대적 과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