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업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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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공업교육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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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공업 분야의 직업에 처음으로 취업하거나 이미 취업한 자의 능력을 향상시킬 목적으로 그 직업에서 요구하는 지식 · 기능 · 태도를 가르쳐 주는 직업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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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공업 분야의 직업에 처음으로 취업하거나 이미 취업한 자의 능력을 향상시킬 목적으로 그 직업에서 요구하는 지식 · 기능 · 태도를 가르쳐 주는 직업교육.
내용

공업 분야라 하면 기계공업·전기공업·금속공업·화학공업·섬유공업·요업·토목건축업·광업 등의 직업 분야를 말하며, 교육 장소는 학교, 일의 현장 또는 실험실 등이 모두 포함된다. 교육 수준에 따라서 기능공 수준·기술공 수준·기술자 수준의 공업교육으로 구분할 수 있고, 또한 학교 급별에 따라서 공업고등학교·공업전문대학·공과대학의 교육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공과대학의 교육을 특히 공과교육이라 하여 공업교육과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1) 고대

공업교육의 뿌리는 고대의 기술교육에 관한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삼국의 신라 때 천문박사·누각박사(漏刻博士)·의학박사·율령전박사(律令典博士) 등을 두어 기술교육을 실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어떠한 형태의 교육이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백제와 고구려를 포함하여 삼국의 고분(古墳)이나 유물 등을 통하여 볼 때, 그들의 공장기술(工匠技術)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는 광종 때 채택한 과거제도에 문신 등용을 위한 진사과(進士科)·명경과(明經科)와 함께 기술관 등용을 위한 잡과(雜科)가 시행되었다. 인종 때는 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과 같은 잡학을 중앙의 국자감(國子監)과 지방의 향학(鄕學)에서 가르쳤다.

(2) 조선시대

잡학은 조선 초기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세종 때는 음양풍수학·산학·의학·화학(畫學) 등을 다루는 관직과 교과과정이 정하여져 잡학교육이 확립되었다. 잡학 중 관상감(觀象監)에서 담당한 음양풍수학은 천문학·지리학·명과학(命課學)을 교과과정으로 하였는데, 특히 천문학은 세종 때 그 발전의 절정에 이르러 혼천의(渾天儀) 등의 천문시계, 자격루(自擊漏)·옥루(玉漏) 등의 물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 같은 민중을 위한 해시계, 측우기(測雨器)와 수표(水標:강이나 저수지 수위를 재기 위해 설치하는 눈금이 있는 표지, 양수표) 등 훌륭한 천문기상학 기기가 제작되었다.

조선의 잡학교육은 세조 때까지도 젊은 문신들을 칠문(七門:天文·風水·律呂·醫學·陰陽·史學·詩學)에 배치하는 등 정책적 지원을 받아 이어졌으나, 그 뒤 성종 때부터는 사대부들의 강력한 반발을 받아 기술 분야에 대한 차별과 천시가 시작되었다.

16세기부터는 유학교육과 잡학교육이 완전히 분리되면서 기술교육이 중인층에 의하여 전습되기에 이르러, 양반에게 더욱 차별대우를 받게 되었고 더욱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이렇듯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계층화된 양반관료 중심의 신분사회에서 전통적인 공업기술은 공장(工匠)에 의해서 전승, 발전되어 왔다.

이들 공장은 세습제로서 관부(官府)에 예속되어 관장제도(官匠制度)에 의하여 관리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독립적인 사장(私匠)도 일부 나타났다. 공장의 교육 방법은 생산 현장에서 장인(匠人)의 지도와 시범에 따라 작업을 도우면서 모방 견습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구사회에 있었던 길드제(guild制)와 같은 독립된 조합에 의한 체계적인 도제제(徒弟制)로는 발전하지 못하였다.

(3) 개화기

나라의 산업도 농업을 위주로 하였던 전통적인 봉건사회는 17, 18세기에 나타난 실학사상에 의하여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에는 개화사상과 연결되어 생산력 증대를 위한 공업화가 주장되고, 이를 뒷받침할 과학기술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기게 되었다.

1876년의 개항과 더불어 외국문물이 들어오면서 개화사상의 영향으로 근대적 과학기술교육 실시의 준비와 계몽이 이루어지다가,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학제(新學制)의 제정과 관학(官學)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관제(官制)에 의한 최초의 실업교육기관은 1899년에 설립된 상공학교(商工學校)이다.

이 학교는 상업과와 더불어 공업과를 설치하여 공업에 필요한 실학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수업연한은 4년이었다. 그리고 1904년 경성농상공학교(京城農商工學校)로 되었다가 1906년 이후 농과·상과·공과가 각각 분리되었다.

이 중 공과는 경성공업전습소(京城工業傳習所)로 개편되었고, 이후 경성공업학교(1922), 경성공립공업학교(1940), 서울공립공업중학교(1946), 서울공업고등학교(1951), 서울기계공업고등학교(1978)로 바뀌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학제 수립 이후 다른 실업교육기관으로는 1897년 우무학당(郵務學堂)·전무학당(電務學堂), 1900년에는 광무학교(鑛務學校) 등이 설립되었으나 얼마 가지 못하여 폐지되었고, 우리 손으로 기술자를 양성하려는 구국운동의 성격을 띤 사립 공업전습소도 지방에 여럿 있었다.

(4) 일제강점기

1910년 국권 상실 이후부터 광복 이전까지의 공업교육은 일본의 식민지정책 수행을 위한 저급한 기능인의 양성과 배출에 힘을 쏟았다. 1911년의 <조선교육령>에서 실업학교는 수업연한 2, 3년의 공업학교·농업학교·상업학교와 일정한 수업연한을 정하지 않은 간이 실업학교의 4종으로 나뉘었다.

공업학교에서는 수신(修身)·일본어·조선어·한문·수학·이과 등의 필수과목 외에 1주 30시간 중 공업과목을 12시간(1학년)∼14시간(2학년), 공업실습을 10시간 이상씩 가르치도록 하였다. 일제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저항으로 1922년 <조선교육령>을 개정하게 되었는데, 실업학교의 수업연한을 3∼5년으로 연장하고 실업학교의 종류에도 상선학교·수산학교와 수업연한 2년 정도의 직업학교·실업보습학교 등을 추가하였다.

이때 고학년에서는 일정기간을 정하여 실습만을 이수할 수 있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장 기타 설비를 학교교육에 대용하고 실업계와 연계를 긴밀하게 하여 학교교육과 실습을 일치시키는 조처를 취하였다. 1938∼1945년에는 일본이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을 치르던 때라서 모든 교육체제와 내용을 일본 황국신민화교육으로 바꾸었으며, 특히 공업교육은 전쟁 수행을 위한 인력 양성과 해당 산업분야의 생산 증강을 위한 현장 실습을 강화하였다.

실업학교 수에 있어서도 1936년까지 1개였던 공립공업학교가 1943년 10개 학교로 늘어났으나, 이 시기에는 학업보다는 체력 단련과 노동력 동원에 치중하여 1944년 1년간 공장·사업장에 동원된 공업학교 학생수만도 1만8559명에 달하였다.

(5) 광복 이후

광복과 함께 출범한 미군정은 단선형 학제를 도입하고 일제하의 3∼4년제 공업학교를 6년제 공업중학교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교육시설·교사·교육장비 등의 부족으로 실효성 있는 공업교육을 실시하지는 못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말 <교육법>이 제정되었으며, 6·25전쟁중이던 1951년 제1차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6년제 중등학교가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분리되었고 6년제 공업중학교는 3년제 공업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

휴전 후 국제연합 한국재건위원회(UNKRA)가 6·25전쟁으로 파괴, 소실된 공업고등학교에 최신 장비를 지원하여 주었고, 공고 교사를 선발하여 미국 연수를 시켰다. 아울러 미국인 공업교육 전문가를 파견하여 공업교육의 질적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우리 나라에 직업 분석을 통한 작업 요소의 추출, 작업 지시서에 의한 요소작업의 지도방법이 소개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정책적으로는 ‘실업 기술교육 5개년 계획(1958∼1962)’을 수립하여 실업교육의 진흥을 꾀하기도 하였으나, 주어진 여건에 비하여 너무 의욕이 앞선 것이었다. 또한 공업교육의 육성이 실효를 거두기 시작한 것은 제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7)의 추진과 더불어, 1963년 <산업교육진흥법>이 공포되어 산업교육의 진흥에 관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의무가 규정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공업교육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 추진과 병행한 ‘과학기술진흥 5개년계획(1967∼1971)’과 ‘실업교육진흥 계획(1972∼1976)’, ‘인력개발 촉진을 위한 실업교육진흥계획(1977∼1981)’, ‘공업계고등학교 운영 개선방안(1982∼1986)’ 등에 의하여, 정부의 정책적 지원 아래 착실한 성장을 거듭하여왔다.

한편 고급기술공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전문대학교육은 1963년 8월 5년제 고등전문학교의 법제화로 태동하였다. 그 뒤 5년제 고등전문학교는 기술인력 공급의 느린 속도와 너무 긴 수학기간으로 인한 중간 탈락자의 속출로 1970년부터 2년제 전문학교로 개편되었다. 다시 1979년부터 성격이 유사한 2년제 전문학교와 초급대학이 직업기술고등기관인 2년제 전문대학으로 개편되었다.

공업계 중등학교는 1970년대에 이르러 급성장하였으며, 이는 같은 기간 우리 나라의 높은 경제성장과 관련지어 이해할 수 있다. 특히 1973년 정부의 중화학공업 추진 선언에 맞추어 공업고등학교를 기계공업고등학교(1973년부터), 시범공업고등학교(1976년부터), 특성화 공업고등학교(1978년부터)와 일반 공업고등학교의 4개 유형으로 나누어 과감한 투자를 통해 집중 육성한 결과였다. 이와 같이 공업고등학교의 실기교육 수준과 교사의 자질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공업교육은 많은 시련을 겪게 된다. 산업구조가 기술집약형으로 전환되고 산업기술의 자동화에 따른 기능공 수요의 질적 변동 등에 따라 특성화제도 역시 1981년대 특성화 공업고등학교와 일반 공업고등학교의 2개 유형으로 통합조정되었고, 교육 내용도 지나친 실기 중심 교육에서 기초과학 및 기초공학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공고 특성화정책이 후퇴하면서 실업고등학교에 대한 지원이 감소하였고, 이에 따라 공업고등학교 지원자 수가 급속히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1980년대는 공업교육이 양적 규모면에서나 질적 수준면에서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 소득의 향상, 산업구조의 급격한 개편 등으로 생산직 관련 기능 인력의 부족이 국가 문제로 등장하였다. 이에 교육 부문 직업교육 확충 방안을 마련하였다. 일반 고등학교 일부 또는 종합 고등학교 보통과를 공업계 학과로 개편하고, 기존 공업고등학교 학급을 증설하는 한편, 일반 고등학교 직업반을 활성화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정부에서는 이른바 신경제 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공업고교의 2·1체제>방안을 내놓았다. 공업고등학교에서 2년간 기초교육을 마친 다음 나머지 1년을 산업 현장에서 훈련을 받는 새로운 체제로 1994학년도 신학기부터 시행되었으나 아직 그 성과를 판단할 수는 없다. 정부에서는 일반계 고등학교와 실업계 고등학교의 학생수 비율을 50:50으로 조정하여 기능인력의 확충을 도모하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하였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앞으로 공업교육은 산업사회의 급속한 변화에 신축성 있게 대응할 수 있도록 폭넓은 기초교육과 응용력이 높은 전문교육을 동시에 시행해야 한다. 이와 함께 공업고등학교 졸업생들의 고등교육 기회의 확대 등을 제도화함으로서 학생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탄력 있는 교육제도가 요망된다.

또한 산학협동 교육의 합리적 추진으로 학교교육이 산업체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학생의 적성을 기초로 인간교육을 실시하여 기술과 인격이 조화된 직업인 교육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공업교육이 내실화될 때, 이를 통하여 배출된 기술인력들이 미래 정보화사회에서 중추적 기능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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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敎育史 上·下』(李萬珪, 乙酉文化社,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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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業·技術敎育論』(李茂根, 培英社, 1983)
「韓國近代技術敎育史定立을 위한 基礎硏究」(金振淳 外, 忠南大學校 工業技術硏究所 論文集 6, 1983)
『한국교육연감』(한국교육신문사, 1997)
『교육대사전』(서울대학교 교육연구소 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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