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작제도 ()

도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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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구조
제도
토지소유자가 다른 사람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경작시키는 대가로 지대(地代)를 받는 경작제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토지소유자가 다른 사람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경작시키는 대가로 지대(地代)를 받는 경작제도.
소작제도의 기원

우리 나라의 소작제도는 멀리 삼국시대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삼국시대에도 토지매매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사전(賜田:임금이 내려준 밭)이나 사원전(寺院田) 또는 식읍(食邑:나라에서 공신들에게 내려 그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하던 고을)이 소작제도에 의하여 경영되었으리라고 추정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토지매매가 성행하였다. 특히 그 말기에는 토지겸병(土地兼倂:토지를 한데 합쳐 소유함)과 토지사유화가 진행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토지에서는 몰락한 농민이 소작인으로 전화되어 봉건적 지주·소작제도가 전개되었던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소작제도

소작제도가 기록에 자주 거론되어 나오는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고려사≫의 973년(광종 24) 12월의 기록에는 “진전(陳田:밭)을 개간한 사람은 사전(私田)의 경우 첫 해의 수확물은 전부 갖고, 그 다음 해부터는 토지의 주인과 반씩 나눈다.”라고 쓰여 있다.

얼마 뒤인 1111년(예종 6) 8월의 기록에는 “3년 이상 묵은 진전을 개간한 경우에는 그 수확물을 2년간 전부 전호(佃戶:소작농)에게 주고 제3년에 전주(田主)와 반씩 나눈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들은 고려 초기부터 공전제(公田制) 하에서도 휴경지 또는 폐토지를 뜻하는 진전은 개간·경작에 있어서는 합법적으로 소작제도가 존재하였음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이 시대에는 지주를 전주라고 불렀으며 소작인을 전호라고 불렀고, 소작료율은 생산물의 50%였음이 위의 기록으로도 밝혀지고 있다.

물론 고려 초기에는 공전제도가 비교적 철저하게 실행되었으므로 소작제도는 새로운 개간지나 휴경지의 재개간의 경우에 부차적 제도로서 공인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전에서의 합법적 제도로서 공인된 이상 사전이 증가하고 공전의 사전화가 진행됨에 따라 소작제도는 점차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

고려 중기 이후 공전제도가 붕괴되기 시작하고 고려 말기에 공전제도가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자 소작제도는 전국적으로 보편화되었다.

고려 말기 중앙집권적 봉건국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권세를 장악한 귀족층은 각 지방에 대농장들을 설치하여 지주화되었다. 그들은 권세의 크기에 따라 큰 권세를 가진 귀족들은 대지주가 되고 작은 권세를 가진 귀족들과 신진관료들은 중소지주가 되었다.

종래의 공전을 사전화하여 지주가 된 귀족들은 그들이 사점한 토지의 대부분을 몰락한 농민이나 자기의 노비들에게 소작시켜 소작제도는 전국적으로 일반적인 제도가 된 것이다.

고려 말기의 소작제도에 대하여 정도전(鄭道傳)은 공전제도가 붕괴된 이후 권세 있는 자들이 토지를 겸병하여 부자는 토지가 백과 천에 이르고, 가난한 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어서 부자의 토지를 차경(借耕)하지만 일 년 내내 힘써 일해도 먹을 것도 부족한 데 반하여, 부자는 편안히 앉아 경작하지도 않으면서 전인(佃人)을 사용하여 수확물의 태반을 거두어 들인다고 하였다.

이 때, 정도전이 말한 차경이 바로 고려 말기의 소작제도이다. 이 시기에 소작인인 전인은 역시 생산물의 소작료를 지주에게 납부하였다.

고려 말기의 소작제도에서 소작인은 정도전이 지적한 바와 같이 본래의 자간자점(自墾自占)하는 자경농민이 귀족층의 토지겸병에 따라 몰락하여 전인이 경우와, 노비가 귀족의 대농장에 사역되어 전인이 되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어느 경우에나 권세 있는 귀족인 지주들은 소작인에게 강력한 신분적 규제를 가하였다. 그러므로 자경농민이 소작농으로 몰락할 때에는 신분적 몰락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소작인들은 전반적으로 지주에 대하여 대체로 농노적 지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고려 말기의 소작제도는 봉건적 소작제도였으며, 지주는 농노적 지위에 있는 소작인으로부터 신분적 강제에 의하여 생산물의 50%에 달하는 소작료를 수취하는 전형적인 봉건적 지주였다.

조선시대의 소작제도

소작제도의 확립

조선시대의 건국을 추진한 신진관료들은 1391년부터 과전법(科田法)이라는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토지개혁은 고려 말기의 봉건적 대농장들을 몰수하고 구대(舊代)의 토지문서를 소각하는 한편, 이성계(李成桂)를 추종하는 신진관료들을 중심으로 하여 과전(科田)·군전(軍田)·공신전(功臣田)·별사전(別賜田) 등의 이름으로 토지를 재분배하였다.

이 재분배된 토지에서는 이른바 ‘병작반수(並作半收)’라는, 소작료율 50%의 소작제도 시행을 엄금하고, 부득이 타인에게 경작시킬 경우에도 조(租)를 생산물의 10%만 징수하게 하였다. 또한 이 토지개혁은 토지를 겸병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토지매매를 금지하였다.

과전법을 소작제도와 관련해서 보면 과전법에 의하여 재분배된 토지에서는 반수(半收)는 금하되, 차경은 생산물의 10%만 소작료로 한정하여 허용되었다.

과전법에 포함되지 않은 공전에서는 차경도 금지하였지만, 신개간지의 경우나 토지 없는 백성을 구휼해줄 필요가 있는 경우에도 생산물의 10%만 소작료로 차경을 허용하였다.

과전법의 이러한 조처는 비록 병작반수는 금하였다 할지라도 차경은 남아 있기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소작료가 생산물의 10%로부터 50%로 증가하여 병작반수가 일반화할 소지를 남긴 것이었다.

실제로 과전법 실시 도중에도 지방에서는 병작반수가 관행으로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1406년(태종 6) 토지 없는 백성이나 빈농의 구휼을 위해서는 예외적으로 병작반수도 허용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또한 1424년(세종 6)에는 토지매매를 허락하였으며, 이를 전환점으로 토지사유제가 확립되었으며 점차 토지의 집중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과전법은 공신전과 별사전의 세습과 상속은 허락하였으나 토지국유를 표방하면서 과전과 군전은 1대에 한하고 그 상속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전과 군전도 1대 후에 반납되지 않고 사실상 광범위하게 세습됨으로써, 과전법은 토지사유제도의 발전이라는 대세에 걸려 붕괴위기에 직면하였다.

세조는 1466년에 과전법을 직전법(職田法)으로 개정하고, 성종은 1470년에 직전법을 다시 개편하였으나 실패하여 과전법은 15세기말에 완전히 붕괴하였다.

과전법이 붕괴됨에 따라 종래 부차적·예외적인 것으로 존재하던 ‘병작반수’가 모든 ‘차경’에 적용됨으로써 15세기 말에 병작(並作)이라는 제도로 봉건적 소작제도가 확립되었다.

소작제도가 확립되자 토지겸병의 진전과 함께 ‘병작’이라는 이름의 소작제도는 전국적으로 급속히 퍼져나갔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도작(賭作)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소작제도까지 생겨나 보편적인 토지제도가 되었다.

소작제도의 종류

조선시대의 소작제도에는 병작법과 도작법의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병작법은 농민들 사이에서 타작법(打作法)·절반법(折半法)·반작법(半作法)이라고도 불리던 제도로서, 매년의 수확량을 미리 정한 소작료율에 따라 징수하는 소작제도이다. 소작료율은 고정되어 있으나 소작료액은 풍흉에 따라 증감되었다.

이 방법의 소작료율은 일반적으로 생산물의 50%가 지배적이었다. 이 때문에 농민들은 이를 ‘절반법’ 또는 ‘반작법’이라고 부르기도 한 것이었다.

이 병작법은 조선 초기에 확립되어 조선 말기에도 가장 널리 행해지던 소작제도였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엽의 실학자들이 소작제도의 전형으로서 문제삼은 것도 바로 이 병작법이었다.

정약용(丁若鏞)은 이 시대의 병작법 소작제도의 폐해를 들면서 지주는 앉아서 놀며 생산물의 10분의 5를 거두어 들이고, 소작인은 소작료로서 생산물의 10분의 5와 지세 10분의 1을 합하여 총생산물의 10분의 6을 납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개탄하였다.

병작법 소작제도에는 다시 예분법(刈分法)과 곡분법(穀分法)의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예분법은 속분법(束分法)이라고도 불렀으며 작물을 베어 탈곡하기 전에 소작료를 배분하는 방법이고, 곡분법은 탈곡하여 알곡을 징수하는 방법이다. 예분법은 주로 북부지방에서 성행하였고, 곡분법은 주로 남부지방에서 성행하였다.

한편, 도작법은 도조법(賭租法)·도지법(賭地法)이라고도 하며, 원칙적으로 소작료액을 미리 협정하여 매년의 수확량에 관계없이 일정의 소작료를 징수하는 소작제도이다. 따라서 도작법에서는 풍흉에 의하여 소작료가 증감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도작법은 임진왜란 뒤에 전국에 보급된 소작제도로서, 크게 보아 다음의 두 가지 방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집수(執穗)·두지정(頭支定)·집조(執租)라고 통칭되었던 것으로, 매년 작물이 성숙한 후 베어 들이기 전에 지주가 간평인(看坪人)을 파견하여 소작인 입회하에 작황을 조사하고 그 수확 예상량을 추정하여 소작료를 정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소작료율은 대체로 일정하나 소작료액은 풍흉에 따라 변동하는 일이 많았다. 이것은 도작법 안에서는 부차적인 방법으로 간주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둘째는, 정도법(定賭法)·정도조(定賭租)·영정도지(永定賭只)·영세(永稅) 등으로 통칭되던 것으로, 풍흉에 관계없이 미리 소작료액을 정하여 일정의 소작료를 징수하는 방법이다.

이 정도법의 소작료액을 정하는 표준은 ① 평년작을 표준으로 하는 방법, ② 토지의 매매가격을 표준으로 하는 방법, ③ 토지의 면적을 표준으로 하는 방법의 세 가지로, 이 가운데 가장 널리 사용된 것은 평년작을 표준으로 하는 방법이었다.

도작법 안에 포함된 집수법과 정도법은 그 내용이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분화되어 별개의 종류의 소작제도로 전개될 요인을 내포하고 있었다.

정도법은 사전에 소작료액을 일정하게 고정하여 풍흉에 관계없이 고정액의 소작료를 징수하는 방법으로서, 본래의 도작법이라고 할 수 있다.

도작법은 병작법처럼 보편적으로 시행된 것은 아니었으나, 지역별로는 전라도에서 비교적 많이 행해졌고, 다음으로 경상도에 많았다.

그 밖의 지방에서는 주로 소작지를 원격지(遠隔地)에 둔 대지주하에서나 또는 역둔토(驛屯土:역의 給田으로 준 屯土로 주둔군의 식량을 자급하기 위해 마련된 땅)와 궁방전(宮房田)에서 행해졌다.

통계가 나와 있는 경상도의 경우를 사례로 들어보면 병작법이 약 68%이었고, 도작법이 약 32%의 분포율을 나타내고 있다.

소작료율과 소작료 형태

소작료율은 소작제도의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다. 병작법은 그 별명이 ‘절반법’으로 불릴 만큼 대부분의 경우 생산물의 50%가 소작료율이었다.

때때로 병작법의 소작료율이 생산물의 3분의 1이 되는 경우나, 또는 지주가 지세·종자·경작비를 전담하고 생산물의 3분의 2를 징수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극히 드문 경우였다.

병작법의 가장 일반적인 부담내용은 소작료를 생산물의 50%로 하여, 지세는 지주가 부담하고 종자는 소작인이 부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지세와 종자의 부담관계는 지방에 따라 매우 다양하여 소작인의 실제의 부담비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었다.

한편 도작법의 소작료율은 그 별명이 삼분법(三分法)이라고 불릴 만큼 생산물의 3분의 1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어서 도작법의 소작료율이 낮을 때에는 생산물의 4분의 1, 높을 때에는 2분의 1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도작법의 소작료율은 생산물의 3분의 1이었으며, 대체로 병작법보다 그 소작료율이 낮았다. 이 때문에 도작법에서는 종자뿐만 아니라 지세도 소작인이 부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소작료형태는 대부분이 현물이었고 도조법 중 정도법의 경우에 가끔 금납(金納)이 행해졌으나 이것은 드문 형태였다. 즉, 조선시대의 소작제도의 소작료 형태는 현물이 지배적이었고 화폐소작료는 드물었다.

때때로 지주가 소작지를 원격지에 소유하고 있어서 현물소작료가 심히 불편함을 느낄 경우나 또는 지주가 특히 현금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현물소작료를 당시의 시가로 환산하여 금납하였다. 이것을 특히 대금납(代金納)이라고 불렀다.

현물소작료는 보통 각 소작지의 직접생산물로 징수되었지만, 그것은 소작제도의 종류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즉, 병작법의 경우 소작료를 징수할 때 그 토지에서 경작된 작목을 그대로 징수하였다. 따라서 이 경우 현물소작료의 농산물 작목은 매우 다양하였다.

한편 도작법은 대체로 그 지방의 주요 생산물로 소작료를 징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논에서는 벼, 밭에 대해서는 콩(지방에 따라서는 보리 또는 조)이 소작료의 작목으로 사용되었다.

소작료의 징수시기는 병작법의 경우 수확기에 소작인이 지주에게 예취(刈取) 또는 탈곡의 시일을 미리 통보하면 지주는 당일에 자기의 대리인을 보내어 입회시켜 소작료를 수납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도조법의 경우에는 음력 10월 하순부터 11월 상순에 걸쳐 지주가 소작인에게 개창(開倉:관아의 창고를 열고 公穀을 내던 일)의 통지를 하고 이때부터 소작료를 징수하여 12월말에 마감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소작기간과 소작계약

일반적으로 소작기간은 미리 정하는 예는 드물고, 소작료를 태납(怠納)하지 않는 한 무기한 지속되었다. 즉, 소작인은 지주에게 소작료를 내지 않거나 경작을 현저히 태만하게 하지 않는 한 소작지 반환을 요구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소작인의 소작지 경작은 소작기간에 대한 계약 없이 수 년 또는 수십 년 계속되었고, 자자손손이 대를 이어 그 관계가 지속되는 경우도 많았다.

소작계약은 병작법의 경우에는 보통 소작인이 지주 또는 그 대리인인 마름과 직접 구두계약으로 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때로는 구두계약 성립 후 지주가 소작인에게 또는 소작인이 지주에게 각서 형식의 문서를 교부하였다.

도작법에서는 거의 모두가 문서계약으로 소작계약이 시행되었다. 지주가 소작인에게 교부하는 문서(계약서)를 패지(牌旨) 또는 차첩(差帖)이라고 불렀고, 소작인이 지주에게 교부하는 문서를 지정표(支定標) 또는 도지표(賭支標)라고 불렀다.

소작관리방법

소지주나 영세지주는 스스로 소작지를 관리하였으나, 대지주나 중지주 또는 원격지에 소작지를 가지고 있는 지주는 자기의 대리인인 ‘마름’을 두어 소작지를 관리시켰다.

마름은 한자로는 사음(舍音)으로 표기되었고, 지방에 따라서는 대택인(大宅人)·농막주인(農幕主人) 등으로 불리었다. 평안도 지방에서는 소작인 중에서 신용 있는 자를 뽑아 마름에 임명하여 수작인(首作人)이라고 불렀다. 마름은 소작지의 근처에 살면서 지주를 대리하였다.

마름의 구실은 ① 소작료의 징수, ② 소작인의 선정과 해제·변경, ③ 징수한 소작료를 지주에게 완납, ④ 소작료의 간평(看坪), ⑤ 소작료의 보관과 판매, ⑥ 소작인의 감독, ⑦ 조세대납(租稅代納), ⑧ 재해소작지의 복구, ⑨ 소작지의 개량과 지목변경, ⑩ 소작료의 증감, ⑪ 종자의 보관 등이었다.

그러나 소작지의 개량, 지목변경과 소작료의 증감과 같은 중요사항은 사전에 지주의 승낙을 얻고 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소작제도의 성격

조선시대의 소작제도는 양반신분의 지주가 양인 또는 노비신분의 소작농으로부터 신분적·경제외적 강제에 의하여 잉여생산물의 전부를 직접적으로 수취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시대 특히 조선 전기의 소작제도는 전형적인 봉건적 소작제도라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후기로 접어들면서 봉건적 소작제도에도 약간의 변화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8세기에 들어서면 사회적으로 신분제도가 붕괴되어가고, 경제적으로 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하면서 소작제도내의 각 계층의 신분구성과 지주·소작인관계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5세기의 소작제도는, 지주가 모두 양반신분이었으며, 주로 자기의 노비를 소작인화하여 소작지를 경작시켰고 양인이 몰락하여 소작인화하는 경우에도 신분적 강제를 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18세기의 소작제도는 한편으로 양인신분의 서민지주(庶民地主)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로 소작인의 구성도 양인신분의 농민이 몰락하여 대거 소작인화하여 지주의 소작인에 대한 신분적·경제외적 강제가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사노비 출신의 소작농이 자기 주인이 아닌 타인의 토지를 소작하는 일이 많았으며, 이 경우에는 신분적·경제외적 강제가 작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미 18세기 이후의 소작제도에는 신분적·경제외적 강제가 해체되어가고 있었다. 이것은 이 시기의 소작제도가 봉건제 해체과정의 소작제도로 전개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전국적으로 보급되고 있던 화폐·상품의 유통과 도시근교를 중심으로 한 상업적 농업의 성장의 영향하에, 소작제도 내부에서도 신분제도의 붕괴과정과 더불어 봉건성 분해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1876년의 개항 후 더욱 급속해진 화폐·상품의 유통은 소작제도 내부의 경제적 관계의 침투에 큰 작용을 하였다. 특히 1894년의 갑오농민혁명운동의 영향으로 실현된 갑오경장에서 신분제도의 폐지와 사노비를 없앰으로써 사노비출신 소작농의 신분적 지위를 자유롭게 하였다.

물론 이러한 법제상의 노비해방만으로는 지주의 소작농에 대한 신분적 강제가 곧바로 완전하게 철폐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노비제도가 갑오경장 이전에 크게 붕괴되었고, 신분제도 전체가 급격히 붕괴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1894년의 양반신분제도 폐지와 사노비혁파에 의한 최후의 노비해방이 지주의 소작인에 대한 신분적·경제외적 강제를 폐지한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1894년 이후의 소작제도에서는 신분적·경제외적 강제는 완전히 철폐되고 그 유제(遺制)만 남게 되었다. 지주의 소작인에 대한 규제가 신분적 강제의 ‘유제’에 따르는 것은 봉건적 소작제도가 반(半)봉건적 소작제도로 바뀌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조선시대의 소작제도는 1894년의 갑오농민혁명운동과 갑오경장을 전환점으로 하여 그 이전은 봉건적 소작제도이고, 그 이후는 반봉건적 소작제도라고 볼 수 있다.

민족항일기의 소작제도

토지조사사업과 소작제도

일제는 1910년 한국을 강점하자 1910∼1918년 사이에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이라는 것을 실시하였으나, 조선 말기의 반봉건적 소작제도를 조금도 개혁하거나 변혁시키지 않았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조선시대에 확립된 토지소유권을 신고주의(申告主義)의 방법으로 재법인하여 등기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한국 농민의 토지를 무상으로 빼앗았을 뿐, 종래의 반봉건적 소작제도를 바꿀 정책적 의도가 처음부터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일제가 토지사유권의 재법인 과정에서 지주의 사유권을 유임한 배타적 권리로 재법인하여 주고, 소작농의 권리인 경작권·도지권·개간권·입회권 등의 모든 권리를 소멸시킴으로써, 일방적으로 지주의 권리만을 강화시켜준 데 있다.

이것은 일제가 지주계급을 엄호하여 식민지통치의 계급적 기반을 지주계급에서 구함으로써, 한국인 지주계급과 구조적으로 유착하며, 일본 자본이 토지를 점유할 때의 편리와 지배권 강화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그 결과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하여 조선 말기의 반봉건적 지주제도는 그대로 이행(移行)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 지주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일본인 지주의 권한은 크게 강화된 반면, 소작농은 모든 권리를 잃고 더욱 불안정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토지조사사업으로 농업인구의 토지에 대한 비율은 변하지 않았지만 소작농이 가진 권리의 소멸은 소작농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극도로 불안정하게 만들어 소작지 획득경쟁을 갑자기 격화시켰으며, 이것은 소작조건을 악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자작농 및 자작 겸 소작농이 완전한 소작농으로 몰락하게 만들었으며, 소작농의 생활상태를 더욱더 어렵게 만들었다.

소작제도의 종류

일제하의 소작제도의 종류는 일반소작과 특수소작으로 나누어진다. 일반소작은 소작농의 여러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던 소작제도를 말하며, 특수소작은 도지권 등 소작농의 권리가 주어지거나 고지제도가 주어진 소작을 일컫는다.

일반소작은 다시 기본적으로 소작료 징수방법의 차이에 따라 정조법소작(定租法小作)·타조법소작(打租法小作)·집조법소작(執租法小作)의 세 종류로 나뉘었다. 이는 조선시대의 병작법이 타조법으로 바뀌었고, 도조법이 정조법과 집조법으로 나눠진 것이었다.

정조법은 농민들에 의하여 보통 도지(賭只)·정도(定賭)·지정(支定)·정도지(定賭只) 등으로 불리던 소작제도로서, 소작계약 체결시에 지주와 소작인이 일정한 소작료액을 협정한 다음 원칙적으로 그 해의 풍흉에 관계없이 해마다 일정한 소작료를 징수하는 소작제도다.

정조법은 비교적 수확량의 변화가 적은 소작농지에서 행해졌는데, 주로 밭[田]에서 많이 행해지고 논[畓]의 경우에는 이른바 수리조합소작지(水利組合小作地)에서 주로 행해졌다.

타조법은 농민들에 의하여 보통 타작(打作)·병작·반작(半作)·반조(半租) 등으로 불리던 소작제도로서, 지주 또는 그 대리인이 소작인과 함께 입회하여 수확시에 실수확물을 약정한 소작료율에 따라 징수하는 소작제도이다.

따라서 타조법에서는 소작료율은 변동하지 않았으나 소작료액은 고정되지 않고 해마다 풍흉에 따라 크게 변동하였다. 집조법은 농민들에 의하여 보통 집수·간수(看穗)·간평·검견(檢見) 등으로 불리던 소작제도이다.

수확 전에 소작지의 작물이 토지에 서 있을 때 지주 또는 그 대리인이 소작인 입회하에 작황을 검견·간평 또는 평예(坪刈) 등의 방법으로 수확예상량을 추정해서 약정한 소작료율에 따라 소작료를 징수하는 소작제도이다.

따라서 집조법의 소작료율은 약정에 의하여 고정되어 있었으나 소작료액은 해마다 풍흉에 따라 크게 변동하였다. 집조법은 토질이 불량하고 재해가 심하면 검견이 어려우므로 비교적 토질이 양호하고 재해가 적은 소작지에서 행해졌다.

작황은 대체로 지주 측이 검견하여 평가하므로 예상수확량을 과대하게 추정하여 실제의 소작료액이 부당하게 증가하는 폐해가 있었다.

조선농회(朝鮮農會)가 편찬한 ≪조선의 소작관행≫이라는 조사자료에 의하면, 1920년경 전국적으로 논에는 정조법이 24.2%, 타조법이 50.8%, 집조법이 25.0%의 비율로 행해졌으며, 밭에는 정조법이 50.9%, 타조법이 46.4%, 집조법이 2.7%의 비율로 행해졌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의 소작관행≫이라는 조사자료에 의하면 약 10년 후인 1930년경에 전국적으로 논에는 정조법이 32.0%, 타조법이 52.0%, 집조법이 16.0%의 비율로 행해졌으며, 밭에는 정조법이 60.6%, 타조법이 38.0%, 집조법이 1.4%의 비율로 행해졌다.

민족항일기의 소작제도 종류의 변화 추세를 보면, 집조법소작과 타조법소작이 점차 정조법소작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논은 집조법소작이 정조법소작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었고, 밭은 타조법소작이 정조법소작으로 바뀌는 추세에 있었다.

그러나 정조법소작의 소작률이 상승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추세가 소작농의 부담을 줄인 것은 아니었다. 일제하의 특수소작으로서 비교적 성행된 것으로 고지제도(雇只制度)가 있었다.

이것은 토지경작의 특정 작업을 일괄하여 다른 사람에게 맡겨 경작하는 제도였다. 고지를 주는 농지의 주인을 고지주인(雇只主人)이라 하고, 고지를 청부받는 사람을 고지군(雇只軍) 또는 고지청부인이라고 불렀다.

이 밖에 소작제도의 계약기간을 기준으로 하여, 소작제도의 종류를 정기소작과 부정기소작으로 나누기도 하였다. 정기소작은 소작기간을 수 년 간으로 미리 정하여 그 기간에는 지주가 소작인을 교체할 수 없는 소작이었다. 부정기소작은 소작기간을 미리 정하지 않고 지주가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지 소작인을 교체할 수 있는 소작이었다.

지주와 소작농의 종류

지주는 그가 농촌에 거주하는가 않는가를 기준으로 하여 부재지주(不在地主)와 재촌지주(在村地主)로 구분되었다. 대지주와 중지주는 대체로 도시에 거주하면서 소작지는 마름[舍音]에게 관리시키는 부재지주였다.

일본인 지주들도 거의 모두가 부재지주로, 직접 농업경영에 참가하거나 경작에 투자하지 않으면서 수확 후에 소작료만을 징수해가므로 때로는 이를 기생지주(寄生地主)라고도 불렀다.

재촌지주는 또한 경작지주(耕作地主)와 불경작지주(不耕作地主)로 구분된다. 경작지주는 농촌에 거주하면서 자기의 토지의 일부는 머슴을 고용하여 경작하고, 다른 일부는 소작인에게 소작을 주는 지주이다.

불경작지주는 비록 농촌에 거주한다 할지라도 경작에는 전혀 참가하지 않고 자신의 토지 전부를 소작을 주는 지주였다. 재촌지주는 대체로 소지주인 경우가 많았으며, 따라서 소작지를 관리할 때에도 따로 마름을 두지 않고 직접 소작지를 관리하며 징수하는 게 보통이었다.

일제하의 소작제도는 소작지에 대해서 토지개량과 농업경영에 직접 참가하지 않는, 기생지주인 것이 큰 특징이었다. 소작의 종류는 일반적으로 순소작(純小作) 또는 소작(小作)과 자소작(自小作)으로 구분되었다.

순소작은 소작농이 자기의 경작지 전부를 소작지로 경작하는 것이고, 자소작은 소작농이 일부의 토지는 자작지를 경작하고 나머지 일부의 토지를 소작으로 경작하는 것이었다.

재촌지주와 소작농은 자기들끼리 촌락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기도 하였다. 재촌지주가 거주하는 촌락을 지주촌이라고 불렀고, 주로 소작농들만 모여사는 촌락을 소작촌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소작료와 소작조건

일제시대의 소작제도에서 소작료율은 모두 현저히 상승하였다. 조선 말기 도조법의 소작료율은 생산물의 약 33%였다.

일제시대에 도조법의 정도법이 분화되어 정립된, 정조법소작에서는 소작료율이 생산물의 55∼60%에 달하게 되어 크게 상승하였다.

역시 도조법에서 비롯된 집조법소작에서는, 권한이 더욱 강화된 지주가 예상수확량을 검견함으로써 소작료율은 생산물의 60%에 달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타조법소작에 있어서는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소작료율이 생산물의 50%였으나, 이른바 수리조합소작지에는 수리비(水利費)를 지주가 부담한다는 이유로 소작료율이 약 55%로 증가하였다.

결국, 일제시대의 소작제도의 소작료율은 가장 일반적인 경우 평균 생산물의 55∼60%의 범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 말기의 소작료율인 33∼50%보다 훨씬 증가한 것이었다.

소작료 형태는 1920년경, 현물소작료가 94.6%, 화폐소작료가 5.4%의 비율로 행해졌다. 1930년경에는 논의 경우 현물소작료가 93.9%, 화폐소작료가 6.1%의 비율로 행해졌다.

이 화폐소작료 중에서 순수한 금납(金納)이 2.3%였고 대금납(代金納)이 3.9%였다. 밭의 경우에는 현물소작료가 92.1%, 화폐소작료가 7.9%의 비율로 행해졌으며, 이 화폐소작료 중에서 금납이 3.9%였고 대금납이 4.0%였다.

따라서 화폐소작료의 비중은 조선시대와 비교할 때 약간 늘어났지만, 소작료형태의 화폐화 경향은 매우 완만하고 미미한 수준이라 볼 수 있다.

한편 소작계약의 형태에 대해서 알아보면 1930년경에는 구두계약이 약 73%였고, 문서계약이 약 27%의 비율로 행해졌다. 구두계약은 보통 소작을 희망하는 소작인이 지주 또는 마름을 찾아가서 지주측에서 제시하는 계약사항을 소작인이 받아들임으로써 성립되었다.

문서계약은 보통 지주가 문안을 작성하여 소작인의 동의서명을 받고 소작증서를 교부함으로써 성립되었다. 문서계약은 주로 정조법소작에서 많이 행해졌고 다음이 집조법소작에서이며, 타조법소작에서 가장 적게 행해졌다.

또한 소작료 형태에서 보면, 화폐소작료의 경우 문서계약이 많았다. 지주의 종류로는 재촌지주보다 부재지주의 경우 문서계약이 많았다.

소작기간은 미리 수 년 간의 소작기간을 정하는 정기소작은 1930년경에 논의 경우 19%에 불과하고 나머지 81%가 소작기간을 미리 정하지 않는 부정기소작이었다.

실제로 행해졌던 소작기간을 보면 조선 말기에는 10∼20년의 장기소작이 대부분이었으나, 1920년경에는 토지조사사업에 의한 경작권 등 농민의 여러 권리가 없어져 1∼3년의 단기소작으로 변화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계약상 소작기간의 유무에 관계없이 지주나 마름의 일방적 의사에 의하여 소작계약이 해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편 조선시대의 소작제도에는 관습적으로 소작농의 경작권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토지조사사업으로 경작권이 부정된 결과, 소작농은 자기의 소작지에 대한 소작권을 갖지 못하였다.

그 결과 소작농의 지위는 극도로 불안정해져, 지주의 뜻에 따라 언제든지 소작계약을 해제당하고 소작지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1934년 이전까지의 소작쟁의의 초점이 소작료의 고율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작기간의 단기성과 부정기성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가 명백히 나타났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 이후 경작권의 소멸로 말미암아 생산력이 부진하고 소작쟁의가 격증하자 미봉책으로 1934년 <조선농지령>을 제정, 공포하여 다시 소작권의 일부를 설정해보려고 시도하였다.

<조선농지령>은 일반작물에는 3년, 영년작물(永年作物)에는 7년 동안 소작농의 소작권을 설정했으나, 일반작물의 소작기간이 너무 짧아서 실효가 없는 미봉책이었으며 소작권을 근본적으로 설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일제강점기의 소작제도는 지주가 신분적·경제외적 강제의 유제에 의거하여 생산물의 55∼60%에 달하는 고율소작료를 소작농으로부터 징수하는 반봉건적 소작제도였다.

이러한 소작제도 하에서는 생산력이 증대될 수 없었다. 이 같은 고율소작료로는 생산순증가분이 모두 소작료로 흡수되어 지주가 빼앗아가고, 소작농에게는 생산력을 증대시킬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일본의 공업화에 필요한 식량을 한국으로부터 공급받기 위해 한국인의 식량소비수준을 가능한 한 줄이고 최대한의 잉여식량을 빼앗아 일본으로 수송하려 하였다.

따라서 이를 위해 총생산물의 55∼60%를 현물소작료로 징수하는, 반봉건적 소작제도보다 더 적합한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 소작제도를 1945년까지 무력으로 엄호한 것이었다. 반봉건적 소작제도는 8·15 광복 후 1950년 농지개혁에 의해 법제상으로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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