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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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인물
일제강점기 경남은행 전무, 경남은행장 등을 역임한 경영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9년(고종 26)
사망 연도
1984년
본관
파평(坡平)
출생지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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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경남은행 전무, 경남은행장 등을 역임한 경영인.
내용

1887년(고종 24) 부산 출생으로, 본관은 파평(坡平), 아버지는 동래부사·사천군수를 지낸 윤홍석(洪錫)이다.

1901년 15세 때 박영자(朴英子)와 혼인하고 같은 해 장인 박기종(朴琪淙)이 설립한 개성학교에 입학했다.

1904년 동래감리서(東萊監理署) 주임이 되어 총무와 섭외를 담당했으며, 일본어에 능통해 일본영사관을 출입하며 대일관계 사무를 전담, 처리했다. 1905년 을사조약 후 동래감리서 주임직를 사임하고 구포에 강습소를 만들어 육영에 주력했으며, 이후 학교로 승격시켜 사립구명학교(구포국민학교)를 설립했다.

1908년 장우석(張禹錫)과 함께 구포저축주식회사(龜浦貯蓄株式會社)를 설립, 운영하여 1911년 임시주주총회를 개최, 은행으로 개편할 것을 결의하고 실무작업에 들어갔으나, 총독부의 방해공작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12년 구포은행 설립을 이끌었으며 감사역으로 취임했다. 구포은행은 1912년 부산지점을 개설했고, 1915년 행명을 경남은행(慶南銀行)으로 개칭해 본점을 부산으로 이전했다.

이후 주식지분을 늘리는 한편, 경남지역의 지주들을 참여시켜 세력을 규합해 자신의 주식소유를 1011주로 늘려 이 은행의 최대주주가 되었다.

1917년 정기주주총회에서 전무취체역에 피선되어 은행의 실질적 경영권을 확보했으며, 전무재임시 은행 영업이 번창해 마산·하동에 지점을 신설하고, 주일은행(主一銀行)을 흡수, 합병하기도 했다. 이로써 자본금을 100만 원으로 증자해 영남 최대의 민족계 은행으로 발돋움했다.

해외 독립운동가에 대한 자금지원을 위한 대부에 협력해 일본 경찰의 요시찰 인물로 낙인찍혀 1920년 자진 사임했으며, 34세 때 일본 동경에 체류하면서 게이오대학[慶應大學] 경제학부에 입학해 수학하면서 김성수(金性洙) 등과 교유하기도 했다.

1923년 귀국해 경남은행장에 취임했으나 1924년 은행장을 사임하고 취체역으로만 있다가 대구은행과의 합병으로 경상합동은행(慶尙合同銀行)이 발족하자 은행계를 은퇴하고 농장경영에 주력했다.

기업활동으로는 조선철도·남선합동전기·남선해륙운수·조선 운송·남선흥업·경춘철도주식회사 등의 주주로 활동했고, 특히 경성방직의 설립시에는 김성수의 부탁을 받고 경남 일대의 주주모집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해방 후 경상남도 재무부장을 역임했다.

참고문헌

『한국기업가사』(조기준, 박영사, 1983)
『실록재계백화(實錄財界百話)』 3·4(배명진, 국제신보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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