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진항 ()

산업
인물
일제강점기 때, 만주 진출을 위해 만몽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해방 이후 고려인삼흥업사장, 농림부장관, 농협중앙회 회장 등을 역임한 실업가 · 관료.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0년(고종 37)
사망 연도
1972년
본관
곡부(曲阜)
출생지
경기도 개성
정의
일제강점기 때, 만주 진출을 위해 만몽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해방 이후 고려인삼흥업사장, 농림부장관, 농협중앙회 회장 등을 역임한 실업가 · 관료.
개설

본관은 곡부(曲阜). 경기도 개성 출생. 개성의 실업가 공성학(孔聖學)의 둘째아들이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개성 제일공립보통학교에서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서울에 올라와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수년간 수학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의 도시샤중학[同志社中學]에 편입하였다. 졸업 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학과에 입학, 수학하다가 유럽으로 건너가 런던대학에서 2년, 그 뒤 다시 프랑스의 소르본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였다.

1932년 7월 시베리아철도로 만주를 거쳐 귀국하여 가업(家業)을 정리, 만주 진출을 꾀하기 시작했다. 1935년 만주의 농장지를 답사하고 그가 소망하던 농장을 요하(遼河) 연안의 오가자(五家子)에 건설했는데, 이것이 바로 농지 20만 평으로 시작된 오가자농장(뒤에 고려농장이라 개칭)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만주척식주식회사(滿洲拓殖株式會社)를 설립하고 이로부터 농지와 영농자금을 보조받고 있었으나, 만주로 이주한 우리 농민들은 만인(滿人)의 소작으로 삶을 이어 나가는 실정이었다.

만주에서 이런 정경을 목격한 그는 농장을 건설하여 그들에게 자작농가를 창립하는 일이 보람있는 일임을 절감하고 오가자농장을 건설했으나 규모가 너무 작았다.

다음해 일단 귀국하여 고향 유지 20여 명을 설득, 자본금 50만 원의 만몽산업주식회사(滿蒙産業株式會社)를 설립하였다. 다시 북만주의 호란하(呼蘭河) 근처에 있는 평안참(平安站)에 농지 2,000여 정보를 개간하였고, 또 그곳에서 하얼빈(哈爾濱)을 향하는 중간지점인 안가(安家)에 약 5,000정보에 이르는 지점을 점거하고 농장건설에 착수하였다.

그는 이상향의 건설을 목표로 하여 만주로 진출했으며 그 실현을 위해 만몽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던 것이다. 이것은 비단 그 한 사람 만의 이상(理想)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건너간 민족기업가 및 민족지도자들의 공통된 이상이며 신념이었다.

전통적인 삼포경영에서 시작된 그의 가족 기업은 3대에 걸쳐 근대적 대농장으로 전개되었으며, 그의 이상사회 건설은 경기도 양주군의 목축농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광복 후 주프랑스공사, 1950년 농림부장관, 1957년 농협중앙회 회장, 1961년 고려인삼흥업사장, 천도교 교령 등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한국기업가사』(조기준, 박영사, 1983)
『이상향을 찾아서』(탁암공진항희수기념문집간행위원회, 1970)
집필자
황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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