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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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개념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거나 효용을 높이는 데 드는 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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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거나 효용을 높이는 데 드는 밑천.
내용

자본이란 재화의 집합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다루는 학문, 사용하는 용도에 따라 차이가 있다. 회계학에서 자본을 자산(資産)·부채(負債)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기업의 총자산가치액에서 총부채액을 공제한 잔액으로 자본금과 잉여금을 의미한다.

경제학에서도 자본의 종류에 따라 개념의 차이가 나타난다. 생산요소로서 자본은 토지·노동 등의 생산요소와 결합하여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생산재를 의미하며, 생산재로서의 자본에는 자본주의 발달의 핵심 요소인 실물자본(實物資本)과 화폐자본(貨幣資本)이 있다.

실물자본은 생산된 생산수단으로서 내구재 일반을 가리키며, 넓게는 공장설비·기계 등의 고정자본뿐만 아니라 재료와 중간생산물도 포함한다.

화폐자본은 수익을 목적으로 사용되는 화폐표시액으로서, 자본의 순환과정에서 구매력의 원본으로 맨처음 투하되어 실물자본을 구입하게 되고, 그것이 최종적으로 생산물이 되어 다시 화폐자본으로 표시된다. 이 과정에서 최종생산물의 소비되지 않은 부분은 다시 자본으로 형성되어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진다.

기타 중요한 자본의 종류에는 사회간접자본·인적자본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자본은 연구 목적에 따라 유동자본과 고정자본, 또는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등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자본의 연구는 자본의 축적과정, 해외자본의 도입, 자본시장연구 등과 관련지어 중요성이 크다.

우리 나라에서 자본 축적이 이루어져 자본을 중심으로 재생산을 하고 산업이 발달하게 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였다. 그 이전에는 단순히 상품을 구매하고 판매하는 데 불과한 미미한 상업자본이 존재하였을 뿐이다.

18세기 후기에 와서는 도시에서뿐만 아니라 지방 시장에까지 상업이 확대되어, 전통적인 특권상인인 시전(市廛)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난전(亂廛)도 번성하여 대상인자본가(大商人資本家)가 출현하였다.

또한, 방납(防納:조선시대에 하급 관리나 상인들이 공물을 대신 나라에 바치고 백성들에게서 높은 대가를 받아 내던 일)을 대신하여 합법적인 공인(貢人:조선시대에 왕궁과 관아에 공물을 납품하는 일을 맡아 보던 사람)이 등장하여 봉건경제체제 해체의 주동적인 구실을 하였다.

수공업 부분에서도 관공장제(官工匠制)가 해체되고 독립자영 수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수공업자도 자유롭게 상행위를 할 수 있게 됨으로써 신생 상공업자들은 스스로 경제력을 배양하게 되고 나아가서 자유로운 자본 축적을 이루어 자본주의로 성장하는 초기 단계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서는 국방수비를 위한 재정지출의 증대로 국민의 조세부담이 늘어나고, 세도정치로 관료들이 부패하여 경제는 발전하지 못하고 위축현상이 나타났다.

농업 부문에서는 지주경영(地主經營)이나 소농경영을 막론하고 경영규모가 확대되지 않았고 기술분화도 없었으며, 오히려 무거운 조세부담으로 농민의 이농현상이 심하게 나타나 농업생산은 감소하였다.

수공업도 대청무역(對淸貿易)이 줄어 들어 시장이 협소해졌으므로 기술개량에 대한 자극이 약화됨에 따라 자본 축적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다.

상업은 도가(都家:동업자들이 모여서 계나 장사에 대해 의논하는 집)의 독점이 강화되고, 군소상인의 자유로운 활동이 크게 저지되었다. 이렇듯 19세기 전반기는 자본 축적의 침체기였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뒤 일본상인들이 대거 진출하여 무역액이 매년 2배 내지 3배로 늘어났으며, 무역품의 내용도 다양해졌다. 개항장에서 외상(外商) 및 외래상품의 상륙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낸 것은 객주와 여각이었다.

이들 객주와 여각은 17, 18세기 이래 전통적인 특권 시전에 대항하면서 성장한 상인층으로 서울의 한강과 지방의 각 포구에 자리잡고 도읍으로 운송되는 재화를 매점함으로써 자본을 축적하였다. 이들은 육의전을 비롯한 특권 시전상인들과는 달리 봉건적 상업질서를 붕괴시키면서 성장한 혁신적인 상인들이었다.

1883년에 체결된 한영통상조약(韓英通商條約)에 따라 외국상인들의 지방 행상이 허용되어 일상(日商)과 청상(淸商)이 상업망을 지방까지 확장하게 되자 민족상인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족상인간에 상업을 조직화하고 상업방식을 혁신하여 외상에 대항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의 선두에 선 것도 객주 및 여각 등 진취적인 상인이었다.

이와 같이 개항 이후의 회사설립은 이들 객주와 여각에 의한 것이었으나, 그들은 회사설립 자체를 일종의 특권으로 생각했고, 그 결과 회사는 설립과 더불어 일종의 특권단체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회사의 특권적 성격은 1895년의 갑오개혁에서 전통적인 육의전 특권이 폐지되고, 정부의 적극적인 상공업 장려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각종 산업 부문에서 많은 기업회사가 발생하면서 더불어 약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민족회사는 조직 및 기능면에도 점차 근대적 기업회사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민족자본에 의한 기업활동은 189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크게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상사회사(商社會社)뿐만 아니라 산업의 각 부분에 걸쳐 근대 기업회사가 설립되었다.

금융 부문에서 1896년 조선은행이 한국 최초의 은행으로 설립되었고, 한흥은행(漢興銀行)·제국은행(帝國銀行)·한성은행(韓城銀行)·한일은행 등이 잇따라 설립되었다. 이러한 민족은행의 설립에는 귀족의 토지자본과 거상들의 상업자본이 중심 구실을 했다.

육운업(陸運業)에서는 1897년 마차회사(馬車會社)가 설립되어 인천∼서울 간의 운송을 담당하였다. 광업 부문에서는 1900년에 해서철광회사(海西鐵鑛會社)가 설립되었으나 자본·기술의 부족으로 본격 채굴은 할 수 없었다. 기타 철도부설업·기선업 등에 진출하였으나 자금 부족과 일본의 방해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갑오개혁 이후 각종 산업 분야에서 근대 기업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당시 회사설립에서는 일반 서민 출신의 기업가는 귀족 또는 관료 출신의 기업가와 합작하는 것이 특색이었다. 그 이유는 자금 또는 회사설립 및 운영면에서 좀더 손쉽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0년 일본의 한국 강점 후, 민족자본의 성장을 방해하는 일제의 수법이 더욱 악랄해졌다. 1910년부터 계획,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은 한말에 일본인이 불법으로 취득한 토지를 법적으로 확인하고, 국유지 및 미개지를 일인 농사회사(日人農事會社)에 불하하였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구지주층을 포섭하여 식민지농정의 협력자로 삼으려 하였고, 전래의 소작제를 허용함으로써 민족자본의 성장을 방해하였다. 즉, 소작농이 대량으로 늘어나고, 농업이 영세 경영으로 악화되어 농업자본의 축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1910년 2월 제정, 공포한 <조선회사령>은 조선에서의 회사설립을 허가주의로 규정하였다. <조선회사령>의 명분은 조선산업 발전을 위한다는 것이었으나 그 속셈은 일본 정부의 조선 개발정책에 따라 조선 내에서의 근대 공업건설을 견제하는 데 있었다.

1910년대 민족자본의 실태는 1917년 당시 공장 수는 1,358개이나 일본인 소유 736개 소, 조선인 소유 609개 소, 기타 13개 소인데, 조선인이 경영하는 부문은 피혁·제지·요업·금속·세공업 등 전통적 수공업 분야로서 자본금이 얼마되지 않았다.

반면에 제분업·연초제조업·제염업·인쇄업·제철업 등 비교적 거액의 자본이 필요한 공업은 일본인 소유 공장이 단연 우위에 있었다. 마땅히 공장별 평균 자본액은 일본인 소유 공장이 5배 이상이나 높았다.

1920년대는 공장공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기업 수는 일본인 소유와 거의 비슷해졌다. 1930년대 민족자본은 조선인 회사 수의 비율이 42%이나 공칭 자본총액 비율은 13.2%로 2억 1381만 원, 불입자본금 비율은 11.2%로 1억 2266만 원이었다.

우리 나라 사람이 경영하는 회사를 업종별로 분석하여 보면 회사 수는 상사회사·공업·운수창고업·잡업 등의 순서이며, 자본면에서는 공업·상업·잡업·임수 산업 순위가 된다. 즉, 1930년대에는 특히 공업 부문의 진출이 두드러졌던 것이다.

1937년에 일본은 중일전쟁을 감행함과 동시에 모든 기업활동을 전시 경제체제로 개편하였으며, 1940년에 접어들어 전세가 불리하자 총독부는 국책회사를 설립하고 민간기업체를 이에 통합하는 방침을 세웠다. 1942년에 공포된 <중소기업정리령>은 특히 조선인 기업체가 정리대상이 됨으로써 민족자본은 더욱 위축되었다.

결과적으로 일제하의 산업의 발달은 자본·경영·기술 모든 면에서 완전히 일본인 독점적인 지배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따라서 민족자본이 성장할 수 없었고 우리 국민들에게 직접적인 혜택을 주지 않는 전형적인 식민지 수탈의 형태였다. 이러한 식민지 산업화는 일본의 산업을 보완하는 구조일뿐이었다.

8·15광복 후의 혼란과 6·25전쟁으로 인한 생산시설의 파괴 등이 한국의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광복 후 농지개혁과 귀속재산 처분 등 자본조달의 기회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농지개혁은 단행된 다음해에 전쟁이 일어났고, 계획성이 부족하여 농촌의 유효자금을 산업자금으로 흡수하지 못했다. 다만 곡물투기상과 고리대금업자에게 비정상적인 자금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귀속재산의 처분도 불하과정에서 정치적 이권이 개입하여 극소수의 특정재벌의 원시적 자본 축적의 수단으로 이용되었을 뿐 산업자본 형성에 기여하지 못하였다.

1950년대 들어서 막대한 외국원조가 있었으나 대부분 국방비 조달과 인플레이션 저지를 위한 소비재 도입에 치중된 결과, 외국원조는 자본재로 활용되지 못하고 소비재에 치중됨으로써, 부당한 소비성향을 상승시키고 국내산업의 위축을 초래하였을 뿐 자본조달에는 실패하였다.

그리고 자본조달의 또 한 방법으로 외자도입을 들 수 있는데, 특히 1960년 후반부터 외자는 국내의 기간산업 발전과 사회간접자본 투자에 집중되었다. 우리 나라의 자본 축적은 1960년대 초반부터 급증하였다. 이는 경제개발계획의 실시와 공업화 추진에 따른 정부와 민간부분의 활발한 투자활동에 기인한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 총자산의 규모가 파악된 것은 1968년과 1977년의 국부조사를 통한 3개 연도뿐이다. 총자산은 1968년 약 39조 원에서 1987년에는 약 371조 원으로 증가하였다. 국내 총자본 형성액은 1965년 1,288억 원, 1970년 6,825억 원, 1980년 12조 713억 원에서 1988년에는 37조 3661억 원으로 증가하였다.

영세자본을 모아 거대한 산업자본을 만들 수 있는 자본시장은 1956년 증권거래소가 설립되고 1962년 <증권거래법>이 제정됨으로써 제도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으나, 1960년 후반까지는 자금공급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1968년 <자본시장육성법>의 제정으로 비로소 기업공개 및 주식 분산의 촉진, 증권 관련기관의 확충, 거래제도의 개선 및 증권업무 영역의 확대 등으로 자본시장 육성기반이 마련되었다.

1972년 <기업공개촉진법> 등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육성으로 자본시장은 눈부시게 발전하여 1990년 9월 현재 상장회사는 650개 회사에 상장자본금은 23조 원을 넘어서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자본주의성립사론』(조기준, 대왕사, 1977)
『한국경제사』(최호진, 박영사, 1981)
『한국경제사』(조기준, 일신사, 1982)
『한국자본주의사연구』 Ⅰ∼Ⅲ(김준보, 일조각,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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