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 기술 협력, 해외투자, 통상 · 무역협정, 국제경제기구의 활동 등을 포함한다.
우리 나라 경제협력의 역사는 광복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는데, 광복 전에도 차관도입 · 통상조약 · 외국인투자 등이 있었지만, 그러한 것들은 외국과의 정치 · 사회 · 군사적 변화에 따라 종속적으로 결정되고 좌우되었다. 그러므로 경제협력의 독자적 활동은 광복 후 개방경제시대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광복 후의 경제협력의 중요성은 전후 복구, 1960년대 이후 수출주도적 경제개발계획의 수행을 위하여 더욱 증대되었다. 우리 나라와 외국의 경제협력은 1970년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로 진입하면서 미국과 일본 편향에서 벗어나 다원화 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어서 1990년대 초반에는 공산권 국가인 소련(현재 러시아), 중국 등과 교류시대의 막을 열었고,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세계무역기구(WTO) 및 경제협력기구(OECD)에 가입하는 등 질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WTO 및 OECD 가입은 국내의 관행을 국제 선진 수준으로 끌어 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함으로써 앞으로 우리 나라가 국제경제협력사의 새 장을 열게 되리라 생각된다.
근대에 들어와 첫 외국차관은 개항 후인 1882년 수신사로 파견된 박영효(朴泳孝)가 일본과 협상하여 일화 17만 엔(圓)을 빌려온 것이었다. 이것은 일본이 우리 나라를 정치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이고, 그 이후 일본 독점자본의 우리 나라에 대한 직접투자도 마찬가지였다.
광복 이후부터 1962년까지는 무상원조에 의한 외자도입의 비중이 컸는데, 그것은 대부분 미국의 원조였다. 기술이나 사회간접자본 분야의 원조보다는 식량을 포함한 소비재 중심의 원조는 전후 기아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원조는 우리 나라 농업 발전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1965년 ‘한일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의 청구권 자금(請求權資金)과 국제연합 원조 등도 대부분 무상원조였다. 무상원조는 1962년 2억3530만 달러가 최대였으나 1962년 미국의 대외원조법 개정으로 점차 감소하여 1970년 8260만 달러로 감소되었다.
광복 후 최초의 유상 외자도입(有償外資導入)은 1959년 동양시멘트 공장 확장을 위한 200만 달러의 차관을 도입한 것이었으나, 정부의 외자도입에 대한 노력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이 되어 외자를 받아 들이는 체계가 어느 정도 갖추어진 것은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된 1962년부터였다.
1962년 국내 총투자액은 경상가격으로 455억 원이었는데, 그 중 국내 저축으로 조달된 것은 116억 원이고, 나머지는 해외 저축에 의한 것으로서 투자의 해외 의존도는 75.5%에 달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외자도입은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65년의 한일국교정상화와 <외자도입법> 제정 및 실시를 계기로 급격히 확대되었으며,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거대한 규모로 팽창하여 1984년 308억 달러가 넘게 되었다.
연도 | 1962~1966 | 1967~1971 | 1972~1976 | 1977~1981 | 1982~1986 | 1962~19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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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
공공차관 | 116 | 811 | 2,389 | 5,713 | 6,689 | 15,718 |
(37.2) | (35.9) | (39.9) | (42.1) | (50.7) | (44.5) | |
상업차관 | 175 | 1,355 | 3,044 | 7,344 | 5,329 | 17,247 |
(56.1) | (59.9) | (50.8) | (54.0) | (40.5) | (48.8) | |
소계 | 291 | 2,166 | 5,433 | 13.057 | 12,018 | 32,965 |
(56.1) | (95.8) | (90.7) | (96.1) | (91.2) | (93.3) | |
외국인 투자 | 21 | 96 | 557 | 532 | 1,156 | 2,362 |
(6.7) | (4.2) | (9.3) | (3.9) | (8.8) | (6.7) | |
총계 | 312 | 2,262 | 5,990 | 13.589 | 13,174 | 35,327 |
(100.0) | (100.0) | (100.0) | (100.0) | (100.00) | (100.00) | |
〈표〉 차관 및 외국인 투자(도착 기준) (단위 : 백만달러) | ||||||
*주: ( )안의 숫자는 총계에 대한 백분율. *자료: 主要經濟指標(經濟企劃院, 1987). |
이것은 고도성장 과정에서 국내 저축이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와 외자도입 급증현상은 1970년대 후반의 과도한 중화학공업투자와 1979년의 원유값 급상승 및 국제고금리 추세 때문이었다. 한편, 외자도입의 형태를 보면 공공차관 비중이 늘어나고 고금리 단기차관인 상업차관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차입 주체도 민간이 급격히 줄어드는 대신 금융기관에 의한 차입이 크게 늘어나서 원리금 상환 압력이 가중되고 있다. 외국인 직접투자에 의한 외자도입은 <수출자유지역설치법> · <외국인투자기업노동관계특별법>의 제정 등 그 동안의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규모나 비중면에서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고, 전체 외자도입액 중 10% 이상을 벗어 나지 못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에 심화된 기업(특히 재벌기업)의 사업확장 경쟁과 금융 기관의 무분별한 외채도입, 그리고 충분한 투자수익에 대한 검토 없는 해외투자는 외채를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증대시켰다.
1990년대 들어서는 외채 중에서 고금리의 단기외채 비중이 급격히 상승했는데, 동남아시아에 외환경제 위기가 발생하자, 우리 나라의 경제 · 금융 · 외자도입 구조는 취약성을 드러냈다.
1997년 말에 시작된 외환 · 경제 위기는 1998년 여름 현재 170만 명에 달하는 실업인구를 만들어 내는 등 큰 충격으로 다가 오고 있다. 경제 위기 이후 정부는 갖은 노력을 통해 IMF로부터 570억 달러의 긴급자금을 지원받는 등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62년부터 시행된 <외자도입법>에 의거 기술도입을 인가 및 허가제로 하여 국내 기술개발에 촉진작용을 할 수 있는 기술을 도입대상으로 하는 한편, 대가는 선불금 3만 달러 이하로, 계약기간은 3년 이하가 되도록 규제하였다.
그러나 1978년 1차로 그 동안의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다시 1979년 <외자도입법시행령>을 고쳐 2단계 자유화 조처를 단행하였는데, 그 동안의 포지티브제(Positive System)를 네거티브제(Negative System)로 전환하여 기술도입 자유화품목을 70% 수준까지 확대하였다. 또한, 계약기간도 10년 이하, 선불금도 50만 달러 이하일 때는 신청 즉시 자동 인가하도록 하였다.
1962년부터 1983년까지 도입된 기술은 모두 2,478건이며, 그 중 광공업이 89.2%로 거의 전부를 차지하였고, 사회 간접자본은 10.1%, 농업은 0.7%, 임업과 수산업은 단 1건도 없었다. 나라별로는 일본에서의 도입이 56.3%로 가장 많았고, 미국이 23.3%, 프랑스가 2.9%, 기타가 9.1%로 되어 있다.
도입된 기술은 노하우(know · how)가 50% 이상을 차지하고, 특허권의 합병이 40%, 상표가 10% 정도이며, 그 동안 지불된 로열티는 1983년 5월 말 현재 7억 4200만 달러이며, 그 중 33.4%가 일본에 지불되었다.
우리 나라의 해외진출은 건설수출과 해외 직접투자 및 인적투자를 들 수 있다. 해외건설 진출은 1965년 타이에 처음 진출하였고, 1973년 사우디아라비아 고속도로 건설과 기타 중동지방의 여러 건설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러한 건설진출로 1976년 중동시장을 석권하였으며, 따라서 용역 · 인력 진출은 높은 부가효과를 가져와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1982년 현재 총 32개 나라에 58개 건설회사가 진출하여 573억 달러 상당의 수주실적을 기록하였다. 지역별로는 사우디아라비아 · 리비아 · 이란 등 중동 14개 나라에 54개 업체가 참여하여 총 건설수주액의 약 85% 차지했으며, 그 밖에 동남아시아 · 태평양지역 · 중남미 순으로 되어 있다.
해외 직접투자는 1959년 대한중석광업이 뉴욕에 부동산을 취득한 것을 효시로 하여 1978년 이후부터 자원확보형 해외 직접투자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업종별로 보면 1978년 이후 자원개발수입을 위한 광업 및 임업투자와 수출시장 확보를 위한 무역업투자가 활발하여 1978∼1982년 중 이 부문의 투자비율이 총투자액의 62.9%에 이른다.
지역별 투자비중은 동남아시아지역이 26.4%로 가장 높고, 북아메리카 · 오세아니아 · 중남미 · 중동 등의 순서이다. 1982년 말 현재 누계는 총 458건에 3억 3800만 달러에 이른다.
그리고 인력진출은 1963∼1981년까지 70만 명 이상으로 이 중 85% 이상이 건설노무자이다. 지역별로는 중동과 동남아시아지역이 전체의 9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엔고현상과 국내 임금 상승으로 인하여 우리 나라 기업의 해외 투자가 급증하였다. 우리 기업의 해외투자 대상국은 주로 중국과 동남아인데,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 대한 투자는 지역 내 국민경제간의 관계를 더욱더 밀접하게 만들고 있다.
1876년 8월 강화도조약에 의거 작성, 체결된 한일통상장정은 개항 후 최초의 통상조약이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무관세조약(無關稅條約)으로서 일본이 강제로 맺게 한 것이었으므로 국제경제협력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으며, 1882년 한청상민 수륙무역장정(韓淸商民水陸貿易章程)도 마찬가지였다.
명실상부한 근대적 관세제도가 시작된 것은 1882년 5월에 체결된 한미수호 통상조약부터라 할 수 있다. 이 조약에서는 관세 자주권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 뒤 영국 · 이탈리아 · 러시아 등을 비롯한 나라들과 계속 통상조약이 체결되었으나, 1910년 일본의 국권침탈로 다시 국제경제협력은 일본의 강압에 그 기반을 송두리째 상실하였다.
광복 이후 1948년 12월 ‘한미간의 원조협정’이 이루어져 구제원조가 본격적으로 실시되고, 1952년 5월 미국과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면서 방위원조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뒤 외국과 경제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특히 무역량 증대를 목적으로 무역거래방법 · 절차 및 상호이익을 도모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무역협정문(貿易協定文)과 합의의정서(合意議定書) 등을 기초로 하여 많은 나라와 무역협정을 체결해 왔다.
1964년 이후에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에 부응하여 1966년 일본과 무역협정을 맺었으며, 그 이전 1961년 자유중국과의 무역협정, 같은 해 필리핀과도 역시 협정을 맺었다. 그 밖에 아시아지역 여러 나라들과는 물론, 1956년 이미 미국과의 우호통상 및 항해조약, 1965년 서독과의 협정 등으로 구미지역 · 태평양지역 등 세계 각국과 무역협정을 체결하여 교역과 함께 경제협력을 하고 있다.
우리 나라는 여러 국제경제기구에 가입한 이래 많은 차관협정을 체결하였고, 관세상의 대외교섭과 쌍무협상 등을 벌여 왔다. 국제금융기구와 경제협력 관계를 보면 1955년 8월 국제통화기금(IMF) 및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 가맹함으로써 처음으로 국제경제협력관계를 맺었다.
그 뒤 국제개발협회(IDA)가 설립됨에 따라 1961년 5월 이 기구에 가맹하였고, 1964년 3월 국제금융공사(IFC)에도 가맹함으로써 국제개발은행그룹의 가맹국이 되었다. 또한, 1965년 12월 마닐라에 설치된 아시아개발은행(ADB)에는 그 설립단계부터 준비위원국으로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이 은행 설립을 계기로 대만 · 베트남과 더불어 3개국 중앙은행총재회의를 개최하는 한편, 국제통화기금 · 국제개발은행그룹 및 아시아개발은행 등 여러 국제금융기구에서 한 그룹을 형성한다는 데 합의하고, 3개국을 대표하는 상협이사(常協理事) 및 대표이사로 선임되었다.
이로써 우리 나라는 이들 국제금융기구에서의 지위와 발언권을 더욱 강화함과 동시에 국제금융무대에 적극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국제통화기금과는 1965년 이래 계속 스탠드바이차관협정을 체결하는 동시에 국제통화기금 상주 기술고문을 통한 기술지원을 수입해 왔고, 국제개발은행그룹 및 아시아개발은행에 대해서는 각종 차관 및 투자를 신청하여 경제개발계획 수행에 큰 도움을 입었다.
한편, 비금융적인 국제경제기구로서는 1949년 준회원국으로 가입했다가 1954년 정회원국이 된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AFE)와의 경제협력관계를 비롯하여, 1965년 1월 발족된 국제연합통상개발회의(UNCTAD)에는 창설과 동시에 가입하였다. 1967년 4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1990년대 말에는 경제협력기구(OECD)에 가입하였다.
이로써 우리 나라는 위의 세 기구, 즉 관세에 관한 국제기구에 가입하여 그 동안 관세상의 국제협력을 도모하고 무역자유화 경향에 따른 선진국의 후진국에 대한 특혜부여 협상 및 후진국간의 교역증대 등에 관한 협상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선진국의 관세제도 및 행정을 조사, 연구하고 정보의 수집 · 교환 등으로 관세행정을 발전시키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면서 경제협력에 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