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증권은 신용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재산상의 권리변동을 원활하게 처리하기 위해 생긴 것이다.
넓은 뜻의 유가증권은 일정한 재산에 관한 권리를 담고 있는 증서로서 재산권을 유동화하여 유통되는 것인데, 크게
상품증권(商品證券, 物財證券·財貨證券이라고도 함)·신용증권(信用證券, 通貨證券 또는 貨幣證券이라고도 함)·자본증권(資本證券, 受益證券이라고도 함)으로 분류될 수 있다.
상품증권은 운송중이거나 창고에 보관중인 화물의 청구를 표시하는 화물 대표 증권으로 증권의 소유와 양도는 상품 그 자체의 소유 또는 양도와 같은 효력을 가진다. 창고증권(倉庫證券)·선하증권(船荷證券)·화물인환증(貨物引換證) 등이 있다.
특히, 선하증권은 탁송된 해상운송화물의 인도 청구권을 나타내는 증서인데, 무역거래가 활발해짐에 따라 사용량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신용증권은 거래의 유통수단으로 사용함으로써 화폐를 대용할 수 있는 증권으로 약속어음·환어음·수표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들은 모두 일정한 기한에 화폐를 청구할 수 있는 증서로 주로 지급결제의 수단으로 이용된다.
자본증권은 이자 또는 이윤을 목적으로 투자한 금액을 표시한 유가증권으로 상품증권보다 환금성이 높아 거래가 활발하고 배당이나 이자를 청구할 수 있는 수익증권이다. 주권·공채증서·사채권·금융채권 등이 이에 해당된다.
한편, 좁은 뜻의 유가증권은 다른 종류의 유가증권보다 수량도 많고 사회경제상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자본증권만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유가증권에 관해 종합적으로 다루는 법률이 따로 없고 상법·민법·어음법·수표법 등에서 개별적으로 다루고 있는 상태이다.
우리 나라의 재래식 유가증권에는 어음과 외획(外劃)이 있다. 고려시대부터 재화가 모여드는 도읍에는 위탁매매·보관·숙박·금융 등의 업무를 맡아 보는 객주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객주는 스스로 일종의 신용증서인 어음(於音, 魚驗)을 발행하였고, 정부와 상류층의 예금도 받아들였으며, 대부와 어음할인 등의 업무도 맡아 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어험·음표(音票)·음지(音紙) 등으로도 불리던 신용수단으로서 고유의 어음은 객주를 중심으로 통용되었던 유가증권이다.
이 어음은 대체로 가늘고 긴 종이의 가운데에 금액을 기입하고 한쪽에는 발행날짜와 발행인의 주소 및 성명을 기입하고 날인한 것이다. 그리고 가운데를 세로로 잘라 오른쪽 것은 채권자인 수취인에게 주고 왼쪽 것은 채무자인 발행인이자 지급인이 가지고 있었다.
그 뒤에 그 어음의 오른쪽 것을 소지한 사람이 어음대금의 지급을 청구하면 지급인은 왼쪽 것과 맞추어 보고 꼭 맞으면 어음대금을 지불하였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대체로 어음의 가운데를 절단하지 않고 전지(全紙) 그대로 교부하는 방법으로 거래되고 배서 없이 양도되어 어음 보유자는 누구든지 지급인에게 어음대금의 지급을 청구할 수 있었다.
베나 곡물 또는 동전이 유통되던 조선시대에 어음은 주요 신용수단 구실을 했으며, 신용 있는 사람이 발행한 어음은 화폐처럼 유통되었고 금액이 큰 것은 30만 냥에 달한 것도 있었다고 한다. 객주는 또한 환표(換票)를 발행 또는 인수함으로써 원거리간의 채권과 채무를 결제하기도 하였다.
한편, 원거리간 조세운송의 불편함을 덜기 위해 중앙에 있는 상인으로 하여금 소요금액을 국고에 납부하게 하고, 일정한 증서를 소지한 상인에게 군수가 징수한 세금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이 때 탁지부대신이 군수에 대하여 국고에 납부할 세금을 제삼자인 상인에게 지급하라는 증서가 외획이다.
우리나라에서 오래 사용되어 온 고유의 어음은 1876년 개항 후에도 많이 사용되었고, 일본인이나 중국인도 이용하였다. 그 뒤 일제는 1905년 <약속수형조례 約束手形條例>와 <수형조합조례>를 공포하여 우리 고유의 어음과 외획제도를 폐지하려고 했으나 고유의 어음은 객주를 중심으로 계속 이용되었다.
1876년 개항 후, 근대 금융기관이 진출하고 주식회사가 설립되어 기업활동을 함에 따라 근대적인 어음·수표와 주식·사채 등의 유가증권도 나타났다. 근대적인 의미의 유가증권은 금융기관이나 기업의 변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1880년 원산에 일본의 제일은행(第一銀行)이 진출한 이후 인천·서울·목포·군산 등에 지점이나 출장소가 설치되어 금융업무를 담당하였다.
1894년 이후 우리나라 사람에 의하여 조선은행(朝鮮銀行)·한흥은행(漢興銀行)·제국은행(帝國銀行) 등이 설립되었으나 여러 가지 사유로 모두 폐점하였다. 다만, 1899년에 설립된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 1903년에 설립된 한성은행(漢城銀行), 1906년에 설립된 한일은행(韓一銀行) 등이 영업활동을 계속하면서 유가증권을 보급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이 처음으로 발행한 자본증권은 1899년 대한천일은행이 주식회사 조직으로 설립할 때 나타난 유가증권이고, 채권(債券)은 1905년 정부가 <국고증권조례 國庫證券條例>를 반포하고 발행한 200만 원(圓)의 단기 국채이다. 그러나 주식은 발기인이 인수했고 국채는 당시 중앙은행인 제일은행이 인수함으로써 일반 투자자간에 증권매매는 없었다.
그 뒤 주식회사제도에 따라 회사가 설립되고 운영됨에 따라 1911년 유가증권 현물간옥조합(有價證券現物間屋組合)이 생겨 유가증권의 거래시장이 마련되었고, 1931년에 제정된 <조선취인소령 朝鮮取引所令>에 의하여 조선취인소가 설립되어 유가증권이 서서히 유통되었다.
1945년 광복 후 우리나라는 스스로 경제를 운용함에 따라 유가증권 중에서 공채·사채·주식 등 자본증권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유가증권의 일종인 공채는 공공기관의 채무이므로 법을 근거로 발행되고 상환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949년<국채법>에 따라 건국 국채를 발행한 후 산업부흥국채·재정증권·도로국채·양곡기금채권·통화안정증권 등 각종 공채가 발행되고 유통되었다.
1949년에는 대한증권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주식과 채권이 상당량 거래되었고, 1956년에는 대한증권거래소가 설립되어 자본증권이 비교적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계획을 시행함에 따라 외국자본뿐만 아니라 국내 자본을 조달할 필요성이 높아졌으므로 더욱 큰 규모의 증권시장이 필요하였다.
1962년에 <증권거래법>이 공포되었으며, 1968년에 <자본시장육성법>이 제정되었고, 1970년에는 <기업공개촉진법>이 제정되는 등, 제도적으로 주식과 사채가 거래되는 자본시장이 적극 육성되었다.
1963년에 상장회사가 15개 회사이며 상장주식 자본금은 약 169억 원이었는데, 1975년에 상장회사가 189개 회사이며 상장주식 자본금은 약 6,434억 원으로 증가하였다. 1988년에는 상장회사가 502개 회사이고 상장주식 자본금은 12조 5,603억 원에 달해, 주식의 거래액은 58조 1,206억 원이며 채권의 거래액은 8조 5,453억 원에 이르렀다.
1993년에는 상장회사가 693개 회사이고 사장주식 자본금은 28조 8,010억원으로 높아졌고, 1997년에는 상장회사가 776개 회사이며 상장주식 자본금은 45조 1,530억원에 달였으며, 주식 거래량은 무려 121억 2,500여 만주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1988년 이후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와 한국전력공사 등이 국민주를 발행함에 따라 주식이 일반인에게도 널리 보급되었다. 한편, 1960년대 이후 대외 지향적 성장정책에 따라 무역 규모가 늘어나자 선하증권의 이용도 급증하였다. 경제발전으로 인해 1980년대 말부터는 예금통화의 비중이 높아져 수표의 사용량이 늘어났고, 어음 교환량도 큰 폭으로 늘어났다.
예를 들면 1987년에는 어음의 1일 평균 교환 장 수는 123만 장이었고, 교환금액은 5조 1923억 원에 이르렀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신용경제로 이행함에 따라 1990년대 이후부터는 수표·어음 등 통화증권과 주식·채권 등 자본증권의 유통량이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