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는 민족을 구성하고 통합하며 민족 단위의 국가 형성을 위한 정치사상이다. 기독교에 기반을 둔 중세유럽의 보편주의적 세계의 해체, 신분제도의 차별을 배제하는 근대 국민국가의 탄생과 더불어 나타난 근대적 이데올로기 담론이다. 국민국가의 형성에는 다른 국가와는 구별되는 국민경제라는 생활공동체의 재생산이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내적 봉합과 국가적 통합을 주창하는 민족주의라는 담론이 강력히 요청되었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 3.1운동을 통해 단일한 민족 구성원이라는 역사적 체험을 했고 이후 혈통과 언어, 문화와 관습을 강조하는 종족적 민족주의의 특징을 강하게 띠고 있다.
민족주의는 근대적 이데올로기이자 담론이라 할 수 있기에 그 역사적 연원이 근대사회의 성립과 밀접히 관련된다. 민족주의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과 주장이 있기에 한 가지로 정리하는 것이 매우 곤란하다. 대체적으로 영국 기원론, 프랑스 기원론과 함께 최근에는 아메리카 식민지의 크레올(Creole)로부터 출발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홉스봄(Eric J. Hobsbawm)은 19세기 말 이후 시민권 확산 등과 같은 동질화 프로그램이 가동되면서 민족주의가 확산되었다고 주장하며 앤더슨(Benedict Anderson)은 18세기 남미 크레올에 의해 민족됨에 대한 감각이 발달하기 시작한 반면 유럽은 19세기 들어와서야 민족주의가 전파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민족주의의 유형 또한 한스 콘(Hans Kohn)에 의해 시민적 서구형과 종족적 동구형을 구분한 이래 다양한 구분법이 논의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유형 구분은 원초론과 근대론으로 대별된다. 즉 원초론은 민족이 고대로부터 존재해왔다는 주장이며 근대론은 근대 이후의 새로운 현상이라는 주장이다. 앤서니 스미스(Anthony Smith) 같은 학자는 원초론과 근대론의 종합과 절충을 시도해 원초적 요소에 기반한 근대적 민족주의를 강조했다. 또 다른 구분법으로는 제국주의 국가의 민족주의와 식민지 경험을 간직한 지역의 저항적 민족주의를 나누는 방법이 있다.
민족주의는 민족 개념과 긴밀하게 관련되는데, 민족이 먼저 존재했고 민족주의는 그 이데올로기로 나타났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민족주의가 먼저 나타나 유행하면서 민족을 형성시켰다는 주장으로 대립된다. 또한 민족을 구성하는 요소를 주관적 측면과 객관적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즉 언어, 역사, 문화, 관습과 같은 요소가 민족을 구성하는 객관적 요소라면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과 의식은 주관적 요소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객관적 측면은 종족적 요소를 강조하는 것이고 주관적 측면은 공통의 심리상태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르낭(Ernest Renan) 같은 사람은 ‘민족주의는 매일매일의 국민투표’라고까지 주장했다. 한편 양자의 종합을 시도한 경우도 있는데 스탈린은 민족을 ‘언어, 지역, 경제생활 및 문화의 공통성 속에 나타난 심리상태이자 역사적으로 구성된 사람들의 견고한 공동체’라고 규정하여 오랫동안 사회주의 진영의 공인된 견해였다.
기원과 유형에 대한 다양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는 중세 유럽의 기독교에 기반한 보편주의적 세계의 해체와 특수한 지역국가로의 재편, 그리고 영국의 명예혁명과 프랑스 대혁명 등의 사회혁명의 효과와 밀접하게 관련되면서 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보편적 세계 속에서는 특수한 민족단위의 존재가 불가능할 것이며 신분제로 갈라져 있는 조건 하에서는 동질적 민족을 상상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민족주의는 국민국가(nation state) 형성과 밀접하게 관련되면서 나타났다.
국민국가 형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조건이 이른바 국민경제라고 하는 생활공동체의 구성이다. 정치적 측면에서 민족주의를 통한 민족 형성이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경제적 재생산 과정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그 지속성을 보장하기 힘들었다. 특히 19세기 산업혁명을 통한 통합적 국민경제의 형성이야말로 국민국가의 견고한 토대를 구축할 수 있게 만든 결정적 계기였다고 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번성한 도시국가 대신 영국에서 나타난 국민국가가 일반적인 근대 국가형식으로 수용된 결정적 이유도 국민경제 단위의 우월한 생산력 때문이었다.
국민국가에서 민족주의가 중요해진 것은 내적 통합을 위해서였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신분을 대신해서 계급 · 계층으로 구분된 사회였고 자유와 평등을 내세웠지만 현실적 불평등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이러한 내적 균열을 봉합하고 국가적 통합을 위해서 민족주의라는 통합 이데올로기가 절실해진 것이다.
또한 이러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전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주민집단에게 수용되기 위해서는 군대, 교육, 언론, 문화, 스포츠 등의 역할이 중요했다. 징병제에 기반한 국민군은 대다수의 성인 남성을 단일한 운명 공동체로 규율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교육은 동일한 교육내용을 통해 공통의 집단 기억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중세의 성경을 대신했다는 신문은 매일매일의 공시적 일체감을 확산시켰고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은 공통의 감각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스포츠 또한 민족 단위의 경쟁 구도를 자연스럽게 확산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상의 과정이 진행되는데 있어서도 자본주의적 산업혁명이 핵심적 역할을 했다. 산업화를 통해 도시화, 대중사회화가 진행되었고 대규모 밀집 군중에 대한 대중정치가 가능해졌으며 언론, 문화, 스포츠 또한 대규모의 물적 토대에 기반해 번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앤더슨 같은 학자는 이러한 문화적 과정을 가능케 한 것을 인쇄 자본주의(print capitalism)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에 민족과 민족주의가 수용되는 시기는 대체적으로 20세기 초반으로 여겨진다. 초창기에는 ‘nation’과 민족이 서로 대칭되지 않는 등 일정한 혼란이 있었지만 1910년대 이후로 ‘nation’의 번역어로 민족이 고정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민족과 민족주의 개념은 중국과 일본에서 ‘nation’과 ‘nationalism’을 번역한 것인 바 당시 한국사회에서도 그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nation’과 ‘nationalism’의 번역어는 국민과 국민주의, 국가와 국가주의, 민족과 민족주의 등 다양할 수 있는데 이 중에서 민족과 민족주의가 지배적 번역어로 채택된 사정은 한국의 식민화 과정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이었다. 즉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식민지 상황이었기에 국가라는 용어로의 번역은 현실적으로 힘을 가지기 힘들었다.
식민화 이전에도 척사위정, 의병운동, 1894년 농민전쟁 등에서 반외세적인 흐름이 존재했지만 근대적 민족주의를 형성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한국에서 본격적인 민족주의가 나타난 것은 식민화 경험을 통해서였다. 특히 1919년 3 · 1운동은 한국 민족주의의 획기적 계기가 되었는데, 3 · 1운동을 통해 비로소 전 주민집단이 동등하고 단일한 민족 구성원으로 재현될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 제국주의라는 이민족 지배자를 타자로 상정하고 그에 대립되는 주체로서 단일한 민족집단을 상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3 · 1운동 이후 한국의 민족주의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민족주의는 현실의 정치적, 사회문화적 운동이자 담론과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며 특정 인구집단의 감각과 감수성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등 매우 광범위한 차원을 갖는다. 일제시기 한국에서 운동으로서의 민족주의는 크게 보수적 우파와 좌파 사회주의 계열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주로 국내에서 단계론적 관점에서 계몽운동, 실력양성운동에 치중하였고 후자는 노동자 · 농민에 기반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해외에서도 다양한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는 대표적 사례였다. 임시정부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근대적 공화국 형태를 취했으며 다양한 정치세력의 이합집산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사회주의 계열은 전위당 건설과 대중운동, 그리고 무장투쟁 중심으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주의는 현실에서 다양한 이념과 사상과 결합하여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민족주의가 이차적 이데올로기라는 특징을 갖기 때문이다. 즉 그 자체로 민족주의는 구체적 내용을 갖기 힘들고 다른 사상과 이념과 결합하여 특정한 내용을 갖춘다고 하겠다. 한국 민족주의의 이념적 지향 또한 보수 우파의 자본주의 지향과 좌파 진영의 사회주의 지향으로 대별되지만 그 사이에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이 나타났다. 우파 진영의 민족주의도 극우파적 파시즘과 결합하거나 자유주의와 결합하는 등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식민지 시기 이래 극우 파시즘적 이념 지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기도 했는데, 국가지상 민족지상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중국 국민당의 영향을 받은 이범석과 민족청년단은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내세우며 극우적 성향을 드러냈고 파시즘적 이데올로기로 평가되는 이승만 정권의 일민주의가 또 다른 예라 할 수 있다.
민족 대신 계급을 강조하는 사회주의는 공식적으로 민족주의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규정하여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회주의도 민족주의를 적극 활용했으며 북한의 주체사상은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더군다나 북한의 주체사상은 개체성이 용납되지 않는 일사불란한 동원체제와 혈통, 유기체적 집단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20세기 전반기 파시즘의 영향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반면 해방 이후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자유주의와 결합된 민족주의가 형성되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은 열린 민족주의 또는 시민 민족주의로 표현되면서 하나의 뚜렷한 흐름을 형성했다. 요컨대 해방 이후 한국 민족주의는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와 함께 파시즘 내지는 권위주의적 민족주의가 뒤섞인 채 전개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한국 민족주의의 중요한 특징은 저항 민족주의로 시작해 지배권력의 동원이데올로기로까지 나아갔다는 점이다. 즉 일제 식민지기에 제국주의 반대라는 저항 민족주의를 출발했지만, 해방 이후 남과 북에서 각각 지배권력의 체제 정당화 이데올로기로 동원되기도 했던 것이다. 북한이 주체사상이라는 단일한 이데올로기를 형성했다면 남한 지역에서는 이승만 정권의 일민주의가 있었고, 박정희 정권에서는 민족중흥과 조국근대화를 내세운 경제적 민족주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60년 4 · 19 혁명 이후로 민족주의가 지배권력에 저항하는 담론으로 전화되기도 했다. 1960년대 한일협정 반대투쟁이나 1970∼80년대의 통일운동은 반정부 운동의 성격을 가지는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한국 민족주의는 정치적 운동 뿐만 아니라 문화적 차원에서도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제 식민지기 이래 조선학 운동이 그 시초를 이룬다고 하겠는데, 민족문화, 민족정신을 강조하는 문화적 민족주의 또한 중요한 흐름으로 지속되어 왔다. 특히 한국은 서구 근대에 대한 강렬한 콤플렉스를 기반으로 급속한 근대화 과정을 거치게 되었고 이것이 역으로 민족문화와 민족사에 대한 강조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이렇듯 한국 민족주의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왔지만 혈통과 언어, 문화와 관습을 강조하는 종족적 민족주의의 특징을 강하게 띠고 있다. 또한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으로 국가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저항 민족주의가 아닌 팽창적, 공격적 민족주의 성향을 보일 가능성이 점차 커진 상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