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Italia)

이탈리아의 국기
이탈리아의 국기
외교
지명/국가
남부유럽 이탈리아반도에 있는 공화국.
이칭
이칭
이태리(伊太利)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남부유럽 이탈리아반도에 있는 공화국.
개관

정식 국호는 이탈리아공화국(Republica Italiana, Italian Republic)이며, 수도는 로마(Rome)이다. 면적 30만 1340㎢, 인구 6185만 5120명(2015년 현재)이며, 인구의 대부분은 이탈리아인이다. 언어는 이탈리아어이며, 종교는 99%가 로마 가톨릭을 신봉한다. 기후는 알프스와 접한 북부 일부 지역은 겨울에 대륙성기후를 보이나 그 밖의 대부분 지역은 전형적인 지중해성기후를 보인다.

약사

이탈리아의 역사는 서기전 7세기경 이 지역에 살았던 그리스인이나 에트루리아(Etruria)인의 세계까지 올라가지만, 로마에 의한 역사는 이탈리아반도의 통일 시기인 기원전 270년경부터이다. 고대 로마제국은 대제국을 형성하면서 번영을 누렸으나, 395년 동서로 분열되었으며, 동로마제국의 멸망에 이어 476년 서로마제국도 멸망하였다.

그 뒤 중세 교황시대에는 동방무역으로 여러 도시가 번영했으나, ‘신대륙의 발견’ 이후 16세기부터는 주위의 여러 세력에 의해 반도가 분열되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침체되었다. 그 후 19세기 초엽에 분열되었던 도시국가들이 사르디니아(Sardinia) 왕국에 병합되면서 통일운동이 일어났으며, 1860년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고, 1871년 수도를 로마로 옮기게 되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체제상으로는 입헌군주제였으며, 1913년 보통선거가 실시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후 사회주의 세력이 나타나면서 이에 대항하는 세력이 등장, 1929년 무솔리니(Mussolini)에 의한 파시스트 독재 정권이 성립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파시스트 정권이 패함으로써 1946년 6월 총선이 실시되었으며, 새 헌법에 의한 공화제가 1948년 1월부터 출범하였다. 1955년 12월 유엔에 가입했으며, 정체는 공화제이다.

현재 정부형태는 내각책임제이며, 대의기구는 양원제로 국가원수인 대통령은 양원과 각 주의 대표자로 이루어진 회의에서 선출된다. 그 동안 정국을 주도해 온 주요 정당은 기독민주당·공산당·사회당·공화당·민주사회당·자유당·신파시스트당이며, 이들 당은 신파시스트당을 제외하고는 반파시스트운동에 뿌리를 두고 형성, 발전되었다.

1970년대부터 정계가 개편되어 새로운 정당들이 등장했는데, 그들 중 대표적인 것은 올리브연합·공산재건·북부동맹·자유동맹 등이다.

1950년대까지는 전통적인 농업국가로 알려졌으나, 1950년대 후반부터 급속한 경제성장에 힘입어 오늘날 서방 5대 선진국이라고 불릴 만큼 공업국가로 변모되었다. 2015년의 국민총생산은 2조 1443억 달러이며,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4960달러이다. 2015년의 무역은 수출 5214억 달러, 수입 4511억 달러를 보이고 있다.

문화적으로도 고대 이래 찬란한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으며, 현재도 음악과 미술을 비롯한 예술 분야에서는 선진적인 위치에 있다.

한국과의 관계

(1) 역사적인 관계

이탈리아는 비교적 일찍부터 동양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마르코 폴로(Polo,M.)에 의하여 고려(Kauli)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가 이탈리아에 소개된 이후 이탈리아는 우리나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으며,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통해 조선을 알게 된 것은 16세기 이후 중국과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예수회 신부들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두 나라는 중국을 매개체로 피상적으로 서로의 처지를 파악하는 정도였다. 두 나라의 관계에서 마테오 리치(Ricci,M.)는 중요한 인물인데, 그를 통하여 이탈리아는 조선을 자세히 알 수 있었고, 조선은 서양의 학문과 사상을 접하였다. 서학이니 실학이니 하는 사상이 조선에 이입됨으로써 당시의 지성사에 커다란 변혁을 초래하였다. 실학자들은 종교적 신앙을 가진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거나 가릴 것 없이 리치를 통한 예수회의 삶과 서양의 과학사상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탈리아와 조선이 직접적인 교류를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이다. 1866년에 중국과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위하여 극동에 파견되었던 아르미뇬(Armignon) 선장에 의해 준공식적인 접근이 시도되었다. 아르미뇬이 타고 왔던 마젠타호는 우리나라 배와 우연히 만나 서로 친선을 약속하고 선물을 교환하였다.

아르미뇬은 귀국보고서에서 조선의 배가 아주 청결했으며, 조선의 인삼이 지닌 마력이 대단하다고 적었다. 아울러 그는 조선인들이 천부적으로 자존심이 강하여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아직까지 문을 닫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에 의하면, 조선인들이 자기들의 충고나 상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와 조선이 정부 차원에서 직접적인 교섭을 시도한 것은 1880년 6월에 사보이아(Savoia)라는 제노바 출신 공작에 의해서이다. 피사니호(Pisani號)의 선장으로서, 그의 임무는 두 나라 사이의 통상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한 조선정부와의 접촉이었다. 그는 부산과 원산을 통해 조선 정부와 계속적으로 교류할 의사를 밝혔으나 당시의 강한 쇄국정책에 부딪쳐 실패하였다.

그 뒤 1878년에 제주도 근해에서 상선인 비앙카 페르리카호가 조난을 당하여 산토로(Santoro)라는 선원 한 사람이 조선인에 의해 구조되자, 사보이아는 조선 정부의 친절에 보답한다는 구실로 다시금 대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은자의 나라로만 알려지던 조선은 1882년(고종 19) 미국과, 1883년 독일과 상호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마침내 굳게 닫고 있던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이탈리아 역시 기회를 놓치지 않고 1884년 5월 순양함 크리스토포로 콜롬보호(Cristoforo Colombo號)를 파견하여 관계 수립을 서둘렀다.

북경(北京)에 주재하던 데 루카(De Luca) 공사가 최초로 파견되어 조선과 공식적인 접촉을 하였다. 조선에서는 김병시(金炳始)에게 루카와 회담하도록 하여, 1884년 6월 26일 우호·통상 및 항해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국내 사정으로 인하여 의회로부터 협정 비준 동의를 늦게야 받아내어 비준서의 교환은 1887년 7월에야 이루어졌다. 조선측에서는 서상우(徐相雨), 이탈리아측에서는 크라비오사(Craviosa,F.)가 전권을 맡아 서울에서 비준서 교환식을 거행하였다.

하지만 두 나라는 공식 외교활동을 제3국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진행하였다. 조선측에서는 영국에 주재하던 대표가, 이탈리아측에서는 중국에 주재하던 대표가 임무를 관장하다가 1901년 말경에야 상주 대표가 파견되었다.

이탈리아는 1902년에 상주 영사 말그라(Malgra)로 하여금 신임장을 봉정(奉呈)하도록 하였고, 조선은 그때까지 영국·독일·이탈리아 전권 공사로 있던 성기운(成岐運)의 뒤를 이어 민영돈(閔泳敦)이 신임장을 봉정하였다.

조선은 이탈리아를 통하여 쇠퇴해 가는 국권을 재정립시키려고 노력하였고, 이를 이용하여 이탈리아는 조선으로부터 광산채굴권을 얻으려고 하였다. 광산채굴권은 몇 차례의 어려운 고비를 넘긴 뒤에야 허가되었다. 외교관계가 이루어지자 서울에 상주하던 외교관들에 의해 조선에 관한 정보가 이탈리아에 직접 전해졌고, 그에 따라 관심도 많아지게 되었다.

특히, 조선의 역사·풍습·지리·경제생활·언어·전설·민담 등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해서 소개한 노첸티니(Nocentini,L.)의 업적은 오늘의 학계에서도 널리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인하여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조선과 이탈리아의 관계도 제2차세계대전이 종료될 때까지 두절되고 말았다.

(2) 광복 후의 관계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두 나라는 서로 명시적으로 승인한 바는 없지만, 1953년 11월 24일 두 나라가 공관을 설치하는 데 합의를 함으로써 묵시적인 승인을 하였다. 이탈리아 역시 전쟁의 와중에서 갓 벗어나 1955년 12월 4일에 유엔에 가입했기에 유엔 3차 총회 때 ‘한국 승인에 관한 문제’에 투표권을 가지고 한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11차 총회부터는 확고한 우방의 입장을 유지하였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야기된 전쟁 때 이탈리아는 유엔회원국이 아니었으므로 정규군을 파견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29일에는 야전병원단을 우리나라에 보내 유엔군 부상병과 민간인의 치료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또 유엔한국부흥위원단을 통하여 200만5000달러를 기증하기도 했으며,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 구호에 관한 결의에 따라 의복과 음식물을 기증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과 이탈리아가 상호 외교사절을 교환하기로 합의한 것은 1956년 11월이었다. 우리나라는 김영기(金永琦)를 주이탈리아 초대 특명전권공사로 임명, 1957년 9월 18일 신임장을 제정하고, 20일에 공관을 개설하였다. 우리나라 주재 초대 이탈리아 특명전권공사에는 스팔라치(Spalacci)가 임명되어 1958년 12월 17일에 신임장을 봉정하였다.

이에 앞서 1957년에는 주미 대사로 있던 양유찬(梁裕燦)이 이탈리아를 친선 방문하여 양국간의 우호관계를 증진시킨 바 있다. 그러다가 한·이 공동성명을 통하여 1959년 4월 16일 대사관으로 승격시키면서 우리나라는 같은 해 9월 9일 김영기 공사를 초대 대사로 신임장을 제정하였다. 이탈리아측에서는 1959년 1월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시킴과 아울러 같은 해 9월 9일에 스팔라치를 초대 대사로 신임장을 제정하였다.

또한, 통상관계가 밀접해짐에 따라 우리 정부는 1978년 7월 12일 밀라노에 총영사관을 설치했고, 나폴리에 명예영사관을 개설하였다. 그리고 우리측에서는 밀라노에 무역진흥공사 무역관을, 이탈리아측에서는 서울에 대외무역공사 사무소를 설치하였다. 또한, 두 나라는 경제인들의 모임인 경제인협회, 국회의원들의 친선협회를 비롯하여 민간 차원의 친선협회를 각각 두고 있다.

우리나라와 관계되는 대외정책에서 이탈리아는 전통적으로 우호관계를 유지해 왔고, 우리의 유엔 가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제29·30차 유엔총회에서도 한반도문제의 서방측안에 찬성, 공산측안에 반대하였다.

두 나라의 우호관계는 호혜평등에 입각하여 주요 인사들의 상호 방문과 통상·문화의 교류를 통하여 더욱 증진되고 있다. 유럽공동체의 핵심 회원국 중 하나인 이탈리아는 한국의 대 유럽·중동과 동구진출에 있어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

양측은 민간인 차원의 건설협회 상설 협의기구를 구성하여 대 중동 한이하청공사(계약액, 7400만 달러)를 수주하기도 했으며, 우리측에서 상업 차관 7700만 달러를 들여오기도 했다. 이탈리아에 수출하는 주요 품목은 선박, 승용차, 합성수지, 냉여강판 등이며, 수입 품목은 주로 가죽제가방, 낲타, 밸브, 의약품 등이다. 2015년의 경우 우리나라의 대 이탈리아 수출액은 35억 3100만 달러, 수입액은 58억 2400만 달러이다.

두 나라가 맺은 협정으로는 특허권·상표등록 협정(1961.3.), 무역협정(1965.3.), 문화협정(1970.6.), 과학기술협정(1984.2.) 등이 있으며, 1986년 4월에 무역·기술협력 증진에 합의한 바 있다.

문화적으로도 두 나라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나폴리의 동양학 대학에서 한국학을 위한 강좌를 개설하고 있으며, 한국은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이탈리아어과를 창설(1963)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수많은 인재를 양성해 왔다. 두 대학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하여 1984년 양국의 수교 100주년 기념으로 서울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한 바 있고, 이탈리아측도 로마에서 기념 학술대회를 가졌다.

현재 이탈리아에는 대한무역진흥공사를 비롯한 많은 업체들이 진출해 있으며, 1998년 6월에는 교민 수와 체류자가 약 2,500명에 달하였다. 또 그 해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381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다.

이탈리아는 북한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지 않고 있으나, 1977년 7월부터 무역대표부 상호 설치에 관한 협정을 맺고 있다. 1986년 이탈리아의 대 북한 수출은 1840만 달러, 수입은 210만 달러였다.

우리나라를 이탈리아에 처음으로 소개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는 우리나라가 카울리(Cauli)라고 소개되고 있다. 그 뒤 카를레타(Carletta)가 1594∼1602년에 세계 여행을 하다가 우리나라에도 들러 소년을 하나 데리고 간 일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안토니오 코레아(Antonio Corea)이다.

오늘날 이 안토니오 코레아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코레아 씨들의 집성촌이 로마 남쪽 600㎞에 있는 알비시(市)에 있는데, 주민 300여 명이 코레아 성(姓)을 가지고 있다. 알비시는 1989년 8월 한국인과 이탈리아인의 만남을 상징하는 ‘평화의 만남’이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철자상 약간씩 다르지만 우리나라가 코레아라는 이름으로 자주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말경 중국과 일본에서 활약하던 선교사들에 의해서이다.

특히, 예수회에 소속되어 있던 고메스(Gomez,P.)·프로에(Froe,L.) 등이나 마테오 리치·마르티니(Martini,M.)의 보고서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대한 산발적인 정보를 얻어 오다가 종교적인 박해가 심해지면서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우리 나라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소개 책자가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되자 이탈리아 안에서의 우리나라에 대한 관심도가 다각적으로 증가되었다. 이탈리아에서의 최초의 한국학 관계 학자로는 칼레리(Calleri,G.)가 지목되는데, 그는 1844년에 《한국에 대한 기록 Memoires sur la Coree》을 발표하였다. 비록, 어설픈 것이기는 하나 나름대로 문헌학상 중요성을 띠고 있는 셈이다.

높은 수준의 학술적 업적이 출현한 것은 1902∼1903년에 외교관으로 업무를 수행하던 로세티(Rosetti,S.)와 노첸티니에의해서이다.

로세티가 1904∼1905년에 발표한 《한국과 한국인:대한제국에 대한 인상과 연구 Corea e Coreani:Impressionie ricerche sull, Impero del Gran Han》는 이 시대의 한국이 처한 시대적인 상황이라든지 한국인의 역사·풍습·종교·문화·문학·대내외정책·일상생활 등등에 관한 풍부한 기록을 사진과 삽화를 곁들여 소상히 전하고 있다.

노첸티니는 순수한 학자 출신으로 피렌체·나폴리·로마 등지의 대학에서 중국학을 전문으로 연구하고 교수하였다. 그는 한동안 외교 분야에서 종사한 경험을 살려 극동의 한국·중국·일본에 대한 체계적인 학문 영역을 넓혀 나갔다.

특히, 우리나라에 관한 연구로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한국의 지리에 관한 자료 Materiali per la geografia della Corea》·《한국의 고대국가 역사자료 Materiali per la storia degli antichi stati corean》 등을 1895년에 발표하였고, 기자조선에 관한 연구를 다루고 있는 〈한국과 중국의 역사고 Brano di storia cinese e coreana〉, 〈한국에 관한 일반소식 Notizie generali sulla Corea〉 등을 1902년에 발표하였다.

그는 또한 우리나라의 왕실관계 저술이라든지 〈한국의 전설과 민담 Leggende e racconti popolari della Corea〉, 그리고 다른 여러 글들을 통해 우리나라를 이탈리아에 소개하였다.

대한민국과 이탈리아가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한 뒤부터 양국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나폴리에 있는 대학원 수준의 동양학 대학과 로마에 있는 동양 및 중동 연구소(ISMEO)에 한국학이 정규 과목으로 채택되면서부터 보다 활발한 한국학 연구가 진행되었다. 학생과 교수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연구관계 자료들도 상호 교환하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 한국학 연구의 선구자는 안셀모(Anselmo,V.)와 산탄젤로(Santangelo,P.), 리오토(Riotto,M.)를 들 수 있다.

안셀모 교수는 나폴리에서 동양학을 연구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이탈리아어과에 초빙되어 이탈리아어와 문학을 강의하면서 한국어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하고 돌아가 자신의 모교인 동양학 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의 주된 업적은 많은 논문과 이희승의 책을 번역한 《한국어문법 Nuova Grammatica Superiore》(1976)으로 평가되고 있다.

산탄젤로 역시 한국학 관계에 공헌도가 높은 학자로, 특히 한이교섭사와 실학사상가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사에 관한 논문들을 양국의 연구기관지에 발표하였고, 앞에 열거한 연구소들에서 한국학을 강의하고 있다. 리오토 역시 나폴리의 동양학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 문학을 본격적으로 번역, 소개하고 있다. 이들을 이어받아 소장학자들도 활발한 연구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아직은 한국어-이탈리아어 사전이 없기 때문에 한국어에 대한 본격적인 학습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펴낸 이탈리아어-한국어 사전(1969)이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사전은 1975년과 1992년에 증보판으로 나왔다.

한국 문학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제법 크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소개작업이 진행되지는 못하고 있다. 제3국의 언어를 통한 번역작업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한국어에 정통한 인사들이 많기는 해도 그들이 우리 문학을 소개하는 데는 별로 관심을 쏟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치올리(Muccioli,M.)가 쓴 《한국문학사 Storia della letteratura coreana》(1969)는 주목받아 마땅하다. 일본 문학사와 합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풍부한 자료와 내용을 담고 있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커다란 업적을 남기고 있다. 그 밖에 한국 작가의 작품으로 이탈리아에 소개된 것은 고전적인 시들을 비롯하여 몇몇 단편소설들이 있다.

1970년에 출간된 문집 《Antologia delle letterature coreana e giapponese》에는 안셀모·산탄젤로·포스(Vos)의 번역을 통한 우리 문학작품이 소개되어 있고, 나폴리에서 간행되고 있는 《Plural》지에 1987년 산탄젤로가 현대시를 몇 편 발표하였다.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번역하여 발표한 사람도 있다. 현대 시인 가운데 이동진의 시 몇 편이 1981년 《L’osservatore》라는 잡지에 소개된 바 있고, 한형곤도 1987년 《Punto》지에 두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우리 정부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아 한국학을 연구한 두르소(D’Urso)와 푸지오니(Puggioni)의 학문적인 활동이 앞으로 크게 기대된다.

심포지엄과 특강을 통하여 한국 문학이 심도 깊게 토론된 예가 있다. 나폴리의 동양학 대학과 한국대사관에서 공동 주최하여 1984년에 한국 문학과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심포지엄이 열려 두 나라 학자들의 열띤 토론이 있었고, 그에 앞서 한국외국어대학교의 한형곤 교수가 역시 동양학 대학의 초청을 받아 1983년에 〈현대한국문학 La letteratura coreana moderna e contemporanea〉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한 바 있다.

한국학 연구에서 이탈리아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곳은 주로 역사연구인 것 같다. 산탄젤로의 실학에 관한 논문들과 무치올리가 〈동양의 문명 Le civiltá dell’oriente〉이라는 타이틀로 여러 곳에 발표했던 글, 그리고 한국에서 대사로 외교관 생활을 했던 파레쉐가 발표한 본격적인 연구서 《극동 국제경쟁 속의 한국 La Korea nella competizione internazionale in Estremo Oriente》이 특기할 만하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우리 정부측에서도 본격적인 홍보와 중요한 행사를 벌였고, 88올림픽을 통하여 민간 차원의 교류가 보다 활발하게 진행됨에 따라 한국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한국 정부에서 발행하고 있는 이탈리아어판 소개 책자 《서울 Seoul》 역시 오늘의 한국 문화를 이해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있는 이탈리아 문화에 비할 때 우리 문화는 아직 괄목할 만한 상태로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수많은 화가들과 음악가들이 자신들의 예술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여 오면서 한국인의 예술세계를 소개하고 있고, 아울러 다른 분야에서도 한국 문화를 연구하는 이탈리아 전문가들의 의욕이 크기 때문에 앞으로의 상황은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한·이교섭사소고』(허인, 한국외국어대학교, 1984)
『이태리개황』(외무부, 1985)
I primi contatti a livello culturale e diplomatico fra Corea e Italia(Santangelo, P., 한국외국어대학교, 1984)
Studi e publicazioni sulla Corea in Italia(Anselmo, Santangelo, Tamburello, 1982)
Italia e Corea(Bertuccioli,G., in Affari Esteri, 1984. )
Korean Studies in Italy(Santangelo,P., 『제5회 국제학술회의 세계한국학대회논문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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