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란 인간생활의 물질적 기초를 생산하고 또 재생산하는 과정이 자본제적 생산이라는 독자 형태로 이루어지는 사회를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자본주의는 산업혁명을 거쳐서 성립된 근대 산업사회의 특이한 경제구조이다.
자본주의의 개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기업이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자본투자를 하는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이미 15, 16세기에 나타난 중상주의시대를 자본주의사회라고 볼 수 있다. 흔히 15, 16세기의 중상주의사회를 상업자본주의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자본주의 개념에 따른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또 하나의 개념은 자본제 생산양식에 시각을 맞추는 것이다. 즉, 자본이 상품유통 과정이나 고리대금업의 과정에서 이윤을 창출해 내는 기업조직이 아니라 생산과정에서 부가가치의 형태로 이윤을 창출해 내는 기업이 사회적 생산의 주류를 이루는 기업사회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기업사회는 16세기 이래 움트기 시작했으나 그것이 한 시대의 지배적인 생산양식으로 등장하는 것은 산업혁명이 일어난 18세기 후기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자본제 생산에 의해 형성된 기업사회를 산업자본주의사회라고 부른다. 산업자본주의는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지배적인 형태로 등장하며, 영국에서는 1770년대 이후 형성되었고, 유럽대륙에서는 1830년 내지 1840년대에 와서 그 시대의 지배적인 형태로 형성, 발전되었다.
이와 같은 자본제적 생산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이 체제에서의 생산은 불특정한 시장수요를 목표로 생산한다. 즉, 특정 수요자를 위한 생산이 아니라, 국내 및 국외의 수요를 예측하고 생산, 판매하는 조직이다. 그러기 때문에 생산과잉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이라고 하며, 공황(恐慌)도 그 속성이 된다.
둘째로 자본주의의 생산조직은 자본주의 원칙에 따르고 있다. 누가 어떠한 상품을 생산하든 국가나 또는 그 밖의 어떤 단체도 이를 간섭하지 않는다. 이 자유의 원칙은 노동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노동도 상품화해서 시장에서 상품을 판매하듯 고용하고 또 고용에 응한다.
자본주의 생산이 이와 같이 불특정한 시장수요를 목표로 하고 자유주의 원칙에 입각해서 운영되는 생산조직이므로, 자본 상호간의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서구사회에서는 1870년대에 들어와서 자본 상호간에 경쟁이 치열해져서 독점자본이 형성되며, 노사간의 갈등도 심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이러한 독점자본주의는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독점자본의 성립이 각종 사회적 폐해, 즉 대자본의 횡포, 중소기업의 몰락, 실업자의 증대, 제국주의 전쟁 등으로 말미암아 식민지 백성에 대한 침략 등이 일어나자 지구의 한쪽에서는 자본주의체제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체제가 등장했다.
이러한 정세에서 자본주의는 체제개혁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20세기 후반기의 수정자본주의이다. 수정자본주의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으나, 그것은 자유주의에 입각한 자본주의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자본주의 생산에서 얻어지는 이윤의 분배를 복지사회의 개념으로 수정하자는 데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후의 자본주의는 자본증식의 합리화 · 과학화를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고, 그 이윤의 혜택을 대중에게 공정 분배하는 복지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우리 나라 자본주의는 전통적 농업사회에서 근대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몇 차례 큰 변화를 겪으면서 전개되어 왔다.
그 첫번째 전환기는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중엽에 이르는 약 1세기 동안의 변화이다.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사실은 외래문화, 특히 서구 자본주의 문화의 영향 없이 우리 나라 사회 내부에서 발생, 성장해 온 자생적 변화였다는 점이다.
두 번째 전환기는 개항 이후 서구 자본주의 문화의 유입과 더불어 이를 수용함으로써 나타난 변화의 시기이다. 이 시기의 두드러진 특징은 상공업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상공업자가 점차 경제운용의 주역으로 떠오른다는 점이며, 또 한편 국민의 경제의식이 높아지면서 경제적 민족주의가 싹터 나온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세번째 전환기는 우리 나라가 일본에 강점당하면서 식민지가 된 시기에 나타나는 변화로서, 이 시기에는 생존투쟁을 위한 경제적 저항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자주자립 경제이념의 민족기업 건설운동이 전국민적 규모로 확산되는 것이다. 이 운동은 특히 1920년대에 활발하게 전개되며, 이 시기를 경제적 민족주의가 주도적 이념이 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네번째 전환기는 광복 후 독립국가를 수립하면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는, 공업화가 급진적으로 진행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자본주의는 급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민족의 경제의식이 성숙되면서 자본주의 방향이 정립되어 갔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우리 나라는 전통사회로부터 근대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네 차례의 큰 변동을 거치하면서 전개하여 오늘의 고도 자본주의사회를 이룩하고 있다.
이러한 전환기를 겪으면서 우리 나라의 근대산업은 어떤 발전을 이룩했으며, 그 각 시기의 한국 근대산업의 담당자인 정부관료 및 기업인들은 어떠한 경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민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구체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우리 나라 자본주의의 실상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18세기에 들어 오면서 여러 면에서 근대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하나는 농본사회(農本社會) 내부에서 상공업이 발전하여 점차 지방까지 확산하는 것이다.
수도 한성에서는 시전가(市廛街)가 변두리에까지 확장되며, 서대문 밖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시장이 서서 자유로운 상거래가 활발하게 전개된다.
지방 행정청 소재지에서는 도읍(都邑)이 도시 양상을 띠며,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는 매달 10일에 시장이 개설되어 농민 상호간의 교역이 번성을 이룬다. 농민경제도 자급자족의 폐쇄 가계경제(家計經濟)에서 시장을 상대로 하는 상품농업 방향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났다.
이 시기 상공업의 발달에서 특이한 것은 사상(私商:개인이 경영하는 상업이나 그 상인) · 사장(私匠:관부에 예속되지 않는 장인)이 상품생산 및 거래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나라 전통사회에서는 관상(官商:관에서 경영하는 상업이나 그 상인) · 관장(官匠:관부에 예속된 장인)을 제도화하고 정부의 일체 수요를 관상 · 관장이 조달해 왔는데, 자유시전(自由市廛)과 시장(市場)이 발달함에 따라 관상 · 관장제도를 혁파하고 필요물품을 자유상거래로 조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 · 사장 허용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는 자유 상공업의 추세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1791년(신해년)에 상업 자유화를 뜻하는 통공령(通共令)을 반포하기에 이른다.
이 ‘신해통공령’은 우리 역사에서 자유경제를 허용하는 정부의 정책전환을 뜻하는 것으로 그 의의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상공업의 발달은 화폐경제를 정착시킨다. 우리 나라에서 주화 발행은 고려시대에도 시도되었고 조선 초기에도 시행한 일이 있으나, 주화정책은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주화는 점차 교환의 주요한 매개물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주화는 숙종 때부터 점차 궤도에 오른다. 1678년(숙종 4)에는 주화인 상평통보를 법화로 채택하는데, 이후 영조와 정조 때에 들어 오면 이미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정착하여 백성들도 널리 주화를 사용하기에 이른다.
18세기에 주화를 시장거래에서 널리 통용하게 된 것은 상공업의 발달과 정부의 조세금납(租稅金納)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상공업이 발달되면서 상공업자 중에서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서 18세기 후기에 들어 오면 부유한 상공업자가 늘어나고 이들은 몰락한 양반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상공업의 발달은 사람들의 가치관 및 경제의식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재출어농(財出於農)이라 하여 농업만이 가치창조의 생업이며, 상공업은 가치를 이전하거나 형태를 바꾸어 놓는 데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경시하던 상공업에 대한 말업사상(末業思想)이 점차 바뀌어 가면서 상공업의 경제적 중요성이 인식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도 상공업을 주요한 세원(稅源)으로 삼게 되었고 국민들 중에서도 상공업계 진출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의 변화와 더불어 지식인들의 학풍이나 산업사회를 보는 안목도 달라져 갔다. 17세기에 싹터서 18세기에 성행한 실학은 이 전환기의 시대상을 긍정적으로 대변하는 개신유학자(改新儒學者)의 실용주의 사조였던 것이다.
실학자의 주장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신분질서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사상(四民思想)을 기능 분화의 사민사상으로 옮기려 한 것이고, 또 농업 · 공업 · 상업에도 학문을 한 사람이 종사한다면 더욱 효율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선비들이 이에 진출하기를 권장하였다. 19세기에 들어와 각종 기술서적이 발간되면서 경제의 과학화를 지향하는 것은 실학자들의 주장을 따른 것이라 하겠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18세기는 우리 역사에서 근대화를 지향하는 큰 전환의 시기였으나, 그 발전은 전통사회를 대체하여 근대 산업사회를 형성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우선, 상공업의 발달에서 보더라도 18,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농본사회(農本社會)의 구조를 탈피하지 못하였다.
상공업의 시전특권(市廛特權)을 혁파한다는 상업자유화선언에서도 ‘육의전부재차한(六矣廛不在此限)’이라 하여 자유경제화가 철저하지 못하였으며, 화폐경제의 확대에서도 정부 세금 일부는 금납을 허용, 실시되어 왔으나 농민의 소작료는 여전히 현물지대(現物地代)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또, 상공업자가 재화를 축적하면서 사회 일각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고는 하나, 상공업자들이 하나의 사회 세력의 계층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공업자들은 상공업자로서의 사회적 지위향상을 확립하지 못하고 재화로써 양반의 신분을 삼으로써 기존 사회질서 속에서 지위상승을 기도하였다는 점은 서구의 시민계층이 자기 계층의 시민사회를 건설하려는 운동과는 크게 대조가 되는 미성숙단계의 표징이라 하겠다. 우리 나라의 근대 산업사회 전개에서 상공업자가 상공업자로서 사회계층으로 부상을 시도하는 것은 개항 이후이다.
개항 후 서구 자본주의 문화가 유입되면서 우리 나라의 사회경제는 두 번째의 큰 전환기를 맞는다. 1880년대 초 우리 나라는 서구 제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서구 공장제 상품이 대량으로 유입되고, 개항장에는 일상(日商)과 청상(淸商)이 상주했으며 인천항에는 서구 상사도 진출하였다.
서구 자본주의 문화의 유입은 우리 나라 정치 · 행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개항 초기에는 정부 안에도 개혁파와 수구파 두 세력이 서구문화 수용에 대해 대립하고 있었으나, 자본주의 문화의 거센 진입에 접하면서부터는 경제개혁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었다.
갑신정변 후 정부 주도세력은 수구파로 넘어갔으며, 이 시기의 식산흥업정책(殖産興業政策)은 이 주도세력이 추진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주도세력은 구봉건계층에 속했던 사람들이었으므로 식산흥업정책은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개혁 이념을 동도서기(東道西器)에 두고 있었다. 서구의 기술은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봉건 지배체제 개편에는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1890년대 이후 관료 · 귀족 출신의 근대 기업계 진출이 성행하지만, 이들이 근대 기업계에서 성공하는 비율은 낮았다. 그것은 이들의 의식 속에는 봉건적 권위의식이 없어지지 않은 채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5년 이후 우리 나라가 일제에 예속되는 시기에 제일 먼저 민족주의에서 이탈하고 일제의 침략 자본을 영입하여 남은 수명을 이어나간 것도 이들 봉건체제에서 세력을 닦아 오던 구귀족 및 관료 출신의 기업인이었다. 개항 후 서구 자본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사람들은 상공인계층이었다.
특히, 개항장의 객주 · 여각 · 보부상들은 서구 자본주의 문화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18세기 이래 전통적인 관상체제(官商體制) · 관장체제(官匠體制)를 해체하면서 성장한 상공인계층으로서, 말하자면 자유로운 상공업의 실천자들이었다.
이들은 서울의 한강과 상가(商街) 및 각 지방의 포구에 자리잡고 각지에서 반입되는 물화(物貨)를 구입, 판매함으로써 재화를 축적하였다.
개항 후 서구상품이 다량으로 유입되고 근대적 상업조직을 갖춘 외국 상인들이 대거 진출함에 따라 개항장의 민족계 상인들은 그 유통 부문을 담당하면서 부를 축적하는 한편, 상업조직을 개편함으로써 외상(外商)에 대응하였다.
1880년부터 민족계 상인들이 회사를 설립하면서 또 한편 개항장의 상인들이 일본 상인들의 조직적 활동에 대응하여 상업인회의소(商業人會議所 : 부산의 객주회, 인천의 紳商協會, 원산의 상의소, 목포의 士商會 등) 등을 결성한다.
또한 민족의식을 갖고 경제활동을 하는 최초 민간인 조직과 활동을 이들 상공인계층에서 볼 수 있었다. 이리하여 상공업자들이 재화를 축적하면서 사회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개항 후의 상공업자들은 18세기와는 달라서 상공업자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새로운 산업사회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봉건세력과 대등한 지위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일제의 경제침략에 대항하여 민족상공업계를 대표한다는 자부심을 가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사상(士商)’ 혹은 ‘신상(紳商)’이라고 자처하면서 상인회의소 명칭도 ‘사상회’ · ‘신상협회’를 즐겨 사용하였다. 한말에 일제침략에 저항하는 민중운동이 거세게 전개되는 때에도 상공인은 민중측에 서서 때로는 그 운동을 지휘하였다.
1903년에 우리 나라에 진출한 일본 제일은행이 은행권을 불법으로 발행하여 통용시키려 할 때에는 상공인들이 앞장 서서 이 일본 제일은행권의 불수운동(不受運動)을 펴 나갔다.
1905년의 일본인 재정고문의 지휘 아래 단행된 화폐개혁에서도 한성의 상공인들은 철시(撤市)로 저항하였으며,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대구상의소에서 발의하였을 때에 전국의 상공회의소가 즉각 이에 동조하면서 민중운동으로 전개하는 데 앞장 섰던 것이다.
을사조약 이후 교육 구국운동이 시작되면서 경향 각처에서 사립학교 설립이 확대되었는데, 상공인들도 재정적으로 이에 적극 동참하였다. 한말의 상공인들은 이미 민족 지도자를 자처하면서 상공인으로서의 사회적 신분 확보를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나라의 사회경제는 몇 차례의 변혁을 겪었다. 그것은 일본 자본주의 발전단계에 따라 식민지정책이 자주 바뀌었고, 민족자본이 이에 대응하면서 발전을 시도한 데서 온 현상이었다.
그 첫 번째 시기는 1910년대이다. 이 시기에 일본은 제1차세계대전을 계기로 비약적인 발달을 이룩할 때였다. 당시 일본은 우리 민족의 단순노동력을 이용하여 일본의 공업 원료와 식량을 확보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일본은 합병 후 한반도 안의 근대 공업의 발달을 견제하면서 공업 원료를 확보하기 위해 「조선회사령(朝鮮會社令)」을 공포하였고, 일본 공업화를 위한 식량을 효율적으로 확보하고자 「토지조사령 土地調査令」을 발표하였다.
「조선회사령」은 1910년 12월에 시행세칙과 더불어 제정, 공고되고, 1911년 1월부터 실시된 법령으로서, 그 근본 목적은 우리 나라의 근대 공장의 건설을 억제하자는 정책에 있었다.
1912년부터 실시된 토지 조사사업은 이 시기 일본이 우리 나라를 통치하는 데 많은 의의가 있는 작업이었다. 즉, 일본은 우리 나라를 통치하는 데 필요한 조선인 내부 지지세력을 귀족 · 양반 등 구지주층에서 얻고자 그들에게 토지의 배타적인 소유권을 인정하였고, 지주와 농민과의 봉건적 예속관계를 유지시키고자 봉건적 소작관계 및 현물소작료제도를 강화하였다.
일본은 또 이 조사사업을 통하여 국유지 및 국유림을 조선총독부 소유로 옮겨서 통치재원(統治財源)을 확보하였다. 이리하여 이 시기에 일본에서 조선으로 진출한 자본은 농림회사(農林會社) · 수산회사 · 광산개발회사, 광석 처리를 위한 제련회사 및 면화회사(綿花會社) 등을 설립하였고, 그 밖에 일본 내의 공업과 경쟁할 가능성이 있는 근대 공업은 억제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민족자본에 의한 근대 공업이 발달할 수 없었다. 1910년대의 우리 나라 사회는 식민지의 반봉건적 성격(半封建的性格)을 가장 짙게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 시기는 1920년대이다. 일본은 제1차세계대전 후 불황에 들어섰고 해외무역은 감소되었으며, 국내 공업은 전시 경기를 타고 비대해졌던 시설의 가동률이 40∼50%로 떨어졌다. 이러한 불황에서 일본은 우리 나라로 눈을 돌린 것이다.
1920년 4월을 기하여 공업발달 억제의 구실을 하던 「조선회사령」을 철폐하고 일본 내 유휴자본의 진출을 허용하였다. 일본이 우리 나라 사람을 단순노동력에서 기능노동력으로 전환시키려 하였고, 이른바 문화정치를 내세우면서 우리 나라 사람에게 초등교육과 실업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와 같이, 사회 경제환경이 변화되면서 민족자본이 근대기업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근대기업에 진출한 민족자본은 크게 둘로 분류된다.
하나는 미곡을 일본에 수출하여 화폐자본을 축적한 대지주 및 거상(巨商)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농림회사 · 수산회사, 그리고 일부는 비교적 규모가 큰 공장공업 · 섬유공업 · 염직공업 등에 투자하였다.
다른 하나는 소상인 · 소지주 및 전통 상공업 분야에서 잔명(殘命)을 유지해 온 영세상공업자로서, 1920년대 근대 공업화에서 기능공으로 체험을 쌓아 온 기능공들이며, 그들은 중소기업 분야에서 활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민족기업은 1920년대에 대두되는 민족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또 한편, 한반도에서 공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농민과 노동자의 의식도 발전되어 1920년대 중반부터 반제반봉건운동(反帝反封建運動)도 활발해졌다. 1920년대는 이와 같은 여러 사회경제 및 문화적 측면에서 보면 식민지 초기단계의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를 이루는 시기였다고 하겠다.
세번째 시기는 1930년대와 1945년의 광복에 이르는 15년간이다. 이 시기에는 민족자본이 다시 심각할 정도로 예속화되기 시작한다. 일본은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의 동북부 지방인 만주를 보호령(保護領)으로 확보하고 만주국을 건설하면서 1937년에는 중국 본토 침략을,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제2차세계대전으로 돌입한다.
이 시기는 일본 독점자본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우리 나라에 중화학공업을 건설하였고, 이 과정에서 대지주 · 대상인 자본으로 건설된 민족기업체는 일본 독점자본에 영합하면서 존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군소자본으로 이루어진 중소기업은 기업 정리과정에서 몰락하였고, 소수는 그 하청 부분을 담당하면서 잔명을 이어 나갔다.
이와 같이 하여 일제강점하에 우리 나라의 사회경제 관계에서는 전통사회에서 물려받은 봉건 잔재를 청산하기보다는 오히려 강화하면서 거기에 새롭게 식민지적 경제 유산을 남기고 한반도에서 물러선 것이다.
1945년 광복을 계기로 독자적 전개의 시기로 들어간다. 여기서 독자적이라는 의미는 비록 그것이 완성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정치적 주권 회복을 평가하는 데서 주어지는 것이며, 전후 세계 자본주의의 신식민주의적 전개의 독자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① 1945년 광복 이후 1948년 정부 수립 이전 기간은 미군정이 우리 나라 경제를 재편한 시기이다. 미군정하에서 우리 나라 경제에 나타난 변화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이 남는 상품을 원조함으로써 대일 의존을 대치하는 대미 의존이 강화된다. 소비재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원조는 우리 나라를 미국의 잉여 농산물 및 기타 남는 상품의 판매시장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과 경제가 단절됨으로써 새로이 싹트기 시작한 토착 중소기업이 소멸된다.
둘째로는, 산업 주체의 재편성 과정에서 민족자본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셋째로는, 정부 수립 후 반봉건적 소작제도 개혁을 위해 시도된 농지개혁의 원형이 제시되고, 미국의 남는 농산물 판매시장으로서 우리 나라 농업이 재편성되었다. 한마디로 광복 후의 미군정 통치는 일제하에 형성된 식민지 경제구조를 그대로 온존한 채 미국 경제와 다시 접합시키기 위한 조정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② 1948년 정부 수립 후 1953년까지의 우리 나라 자본주의의 특징은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정권하에 자본주의 경제가 전개되었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군정기의 조정과정을 거쳐 원조의 매개로 대미 일변도의 파행 경제구조가 더욱 심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 자본주의가 미국 원조에 기생함으로써 자본의 원시적 축적의 또 하나의 계기가 마련되고 관료 자본주의 성격이 더욱 강해진다.
한편, 식민지 유산인 농업의 반봉건적 유제에 대한 최초의 개혁이었던 농지개혁이 실패하고 6·25전쟁에 의한 경제적 기반의 상실로 경제개발과 근대화를 통한 민족경제 확립의 가능성을 현실화시키지 못한 채 미국 원조에 의존함으로써 종속적 경제구조를 더욱 심화시켰다.
③ 1954년 이후 1960년까지는 원조에 의한 경제 건설 과정은 한쪽으로는 원조의 소산인 매판 공업의 저차적 독점이 실현되면서, 다른 쪽으로는 광복 후 그리고 6·25전쟁 후에 광범위하게 생성되었던 자생적인 민족공업이 소멸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이미 원조 경제의 파국 조짐을 보이면서도 개별 자본은 독점자본의 생성과 함께 이들 자본에 의한 은행 지배, 곧 금융자본의 형성을 가져온 시기이다.
④ 1960년대 및 1972년까지는 4·19혁명이 일어나고 이에 대한 5·16군사정변의 정치적 반동이 뒤따르면서, 4·19혁명에서 제시된 우리 나라 자본주의의 위기 그리고 경제적 민족주의에 대한 요구가 국가 독점자본주의적인 경제개발 계획으로 구체화된 시기이다.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이 확대되고, 경제에 대한 정부 주도는 계획 모델과 함께 외국 자본의 논리를 우리 나라 경제에 크게 관철시켰다. 또한, 한일 국교 정상화로 일본 자본이 다시 진출하기 시작하고 미국과 일본의 자본 운동은 넓은 분야에서 다국적기업을 낳았다.
이와 같은 우리 나라 경제의 국가 자본주의 성격에 대한 해명으로 혼합경제라는 말이 쓰여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시기는 1972년 8·3긴급조치에서 보듯 우리 나라 자본주의의 위기를 이미 예고하고 있다.
⑤ 1973년 이후는 국가 독점 자본주의의 개입으로 첨예화된 앞 단계의 모순을 완화하고 이것을 민간 부문에서의 독점의 완성과 개방체제, 중화학공업의 건설로 귀결짓고자 한 시기이다.
그러나 민간 부문에서의 독점의 완성과 종속의 심화를 가져오는 개방체제의 확립에도 불구하고 1973년 석유파동을 계기로 한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그리고 그것에 뒤따르는 1978년 이래 우리나라 경제의 위기는 중화학공업화정책을 파국으로 몰아가면서 우리나라 경제 재계의 재편성과 만성적인 불황을 가져다 주었다.
우리 나라 자본주의의 발전유형을 보면 그것은 자본주의 발전의 세 가지 유형 가운데 식민지 종속형에 속한다. 이것은 우리 나라 자본주의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에 의하여 자본제화(資本制化)로의 길을 강요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자본주의는 미성숙한 제국주의였던 일본 자본주의의 요구에 따라 한편으로는 토지소유제와 결합된 구시대의 사회적 유제를 완전히 해체하지 않은 채 구시대적 사회구조를 일부분 계승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이 반민족적이었므로 처음부터 일부 매판자본과 일본 자본을 중심으로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독자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후발 선진자본주의로서 자본주의 독점단계에서 자본제화에 들어선 일본 자본주의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비록 그것이 자본주의 발전의 일반 순서에 따르는 것일지라도 우리 나라의 특수성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나라 자본주의의 특수성은 6·25전쟁 전까지는 식민지 종속성이 반영된 것이었다. 이는 국민경제의 이중구조, 공업구조의 파행성, 경제활동 분야의 경제외적 성격의 두드러짐, 산업자본 단계를 거치지 않는 저차적 독점의 실현 등이다.
이들은 식민지 종속형 자본주의 발전의 중요한 지표가 되는 시민혁명의 결여, 국민경제의 이중구조와 낡은 것의 온존, 경제외적인 것이 축적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식민지 수탈을 위한 상품경제의 편성과 이식된 사회적 생산력 그리고 국민경제와 민족경제의 격리를 반영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나타나듯이 8·15광복에서 요구된 식민혁명의 내용은 실현되지 않은 채 전후의 우리 나라 자본주의는 세계 자본주의적인 분업체계 속에서 이룩되었다. 그것은 낡은 식민지 경제구조를 유지한 채 그 위에 전후의 미국 의존적인 경제관계를 접합시켰음을 의미한다.
미국 원조가 기초가 되었으며, 그 뒤 자본운동의 계기적인 서열적 전개에서 주어진 다국적기업의 활동은 우리 나라 자본주의를 지극히 대외의존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 나라 자본주의는 또 다른 특징이 생겨난다. 먼저 그것은 우리 나라 자본주의의 관료 자본주의 성격에서 드러난다.
우리 나라 자본주의는 그 축적의 계기나 산업자본 형성 과정에서 보듯 지극히 경제외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전후 전개되는 우리 나라 자본주의는 일제식민지 통치하의 민족자본의 부재로 인해 매판적인 일부 상인 자본이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이런 것들은 8·15광복을 시민 변혁의 계기로 삼지 못하고 낡은 것을 온존시킨 데서 더욱 강조된다.
귀속재산 불하, 원조에 기생하는 과정에서 이들 매판 상인자본은 본원적 자본 축적의 계기를 잡았으며, 이들은 자생적인 민족공업의 수탈 위에 국가권력과 결합하여 저차적 독점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이들 자본은 산업자본으로 바뀐 후에도 오래도록 상인자본의 성격을 유지하였으며, 이런 것들은 어떤 의미에서 그 뒤에 전개되는 국가 독점 자본주의적인 성장 정책과 결합하면서 더욱 확대, 재생된다.
이와 같은 자본의 경제외적 성격에 더하여 우리 나라 자본주의 전개과정은 이들 자본에게 보다 더한 매판성을 부여하였다. 전후 우리 나라 자본주의가 농지개혁의 실패, 귀속재산 불하의 실패, 민족 공업의 자생적 발전 유도의 부재 등으로 인하여 민족자본 축적의 계기를 잡지 못함으로써, 그 뒤에 이어지는 축적 계기는 외국자본과의 관련에서 주어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우리 나라 자본주의의 특수성으로서 관료 자본주의 성격이 형성된다. 다음으로는 사회적 생산력의 이식형적 성격(移植型的性格)과 독점의 저차성이다. 우리 나라 자본주의는 내생적인 사회적 생산력 발전에 의존하기보다는 외국자본과 관련을 통한 생산력이 기초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자본 측면의 대외의존은 산업의 이식형적 성격을 강화하였다. 그것은 산업간 · 기업간의 긴밀한 분업성을 없어지게 할 뿐 아니라, 한 사회의 자원 부존상태에 상응하지 못하는 기술을 도입하게 하고, 산업 또는 기업의 시장 점유에 상응하는 고용 기회를 창출하지 못하게 한다.
식민지 종속형 자본주의에서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우리 나라 자본주의는 초기에는 정상배(政商輩:정치가와 결탁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꽤하는 무리나 그 무리에 속하는 사람)와 국가 권력과의 결합관계에서, 그리고 후기에는 외자도입이나 외국자본과의 결합관계에서 산업자본 단계의 경쟁을 거치지 않고 경제외적인 독점을 실현시켜 왔다.
이것은 사회적 생산력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을 제약하고 독점을 터무니없이 확대, 강화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 나라 자본주의에서 이른바 문어발식 확장으로 수십 개의 계열 기업군을 거느린 가족지배의 콘체른(konzern)적 결합형태로서 재벌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이 결과 미국이나 일본에 의한 대외의존도가 높아 그들의 금융정책에 휘말려 1997년에는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라는 경제적 위기를 맞았다. 1998년 김대중정부가 들어서면서 우리 경제의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구조조정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그 가운데 문어발식 재벌의 형태를 제어하는 기본 정책이 진행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 나라 자본주의의 특수성은 국민경제의 이중구조에서 제시된다.
우리 나라 자본주의 발전은 전후의 상황에서 외국자본을 주축으로 한 수출입국형(輸出入國型)의 외연적인 불균형 성장이었다.
그것은 경제개발계획 모델에서 허슈만(Hirschman,A.O.)류의 불균형 성장이론이 적용되고, 외자(外資)의 논리가 국내 분업 관련을 가질 수 없도록 되어 있는 데서 온다. 따라서 앞으로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수출입국의 다변화와 산업의 다종화로 전환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 자본주의는 1980년대까지 독점 자본주의의 특수한 마지막 단계인 국가 독점 자본주의 단계에 이르렀고, 민간자본에서 독점의 완성이 금융자본의 형성까지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업 부문에서는 전근대적인 소농민 경영의 광범위한 존재와 이의 전근대적 소작제도로의 역행까지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제3차산업의 저노임, 불완전 취업상태에 있는 광범위한 빈민층의 침전과 함께 사회적 빈곤의 원인이 된다. 하지만 1990년 말부터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에 들어간 이후 외국자본의 유입과 재벌의 구조조정 정책들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어 이와 같은 전 근대적인 경제요인들은 차츰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