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내 군사교육인 교련은 일제시기부터 시작되어 해방 후에도 지속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1955년 중단되었던 교련은 1968년 이른바 ‘안보위기’가 조성되면서 1969년부터 부활하게 되었다. 당국은 1971년 1학기부터 종래 주 2시간이던 교련을 3시간으로 늘리고 집체교육까지 부과하는 등 대폭 강화하고자 하였다. 더욱이 교련과목을 필수화하였고 교관도 전원 현역으로 교체하여 학생들의 강력한 반발을 사게 되었다.
교련반대 운동의 시작은 1971년 4월 2일 연세대 학생들의 시위로 불이 붙었다. 연세대 학생 5백여 명이 군사교육강화 반대 성토대회를 개최하고 ‘교련수업 거부’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교문 밖으로 진출하여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를 시발로 4월 6일에는 고려대생 1,500여 명이 교내에서 민주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민주수호와 군사교육 전면철폐를 위해 대행진을 벌일 것’을 결의하고 교문밖으로 진출하여 경찰과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다. 이후에도 전국의 대학가에서 교련반대 시위가 끊이지 않았으며 4월 15일에는 전국적으로 2만여 명이 시위를 전개, 1학기 교련반대시위의 절정을 이루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확대되자 문교부와 국방부는 교련교육 토론회 개최를 추진하고 교련교육 완화 방안을 모색하는 등 나름의 유화책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4월 27일의 대통령 선거와 5월 25일의 국회의원 총선거라는 정치일정과 겹치면서 1학기 교련반대투쟁은 방학을 맞이하여 잦아들게 되었다.
그러나 2학기에 접어들면서 교련반대운동은 다시금 불붙기 시작했다. 대학가 시위가 점차 확대되던 와중인 10월 5일 새벽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군인 30여 명이 고려대에 난입, 학생 5명을 불법 연행·구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전국의 대학생들이 대거 시위에 나서 10월 중순경에는 5만 여명의 대학생이 고려대에 난입한 군인의 처단을 요구하는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대학생들의 가두시위에 대하나 당국의 대응은 강력한 탄압책이었다. 10월 12일 국방장관과 문교장관은 공동 명의로 담화문을 발표하여 교련거부 학생은 재학중의 징병검사 연기를 인정치 않고 전원 징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10월 15일에는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특별명령’을 발표하였다. 이 조치로 1,889명의 학생을 연행하고 그중 119명을 구속했다.
더 나아가 문교부는 대학에 압력을 넣어 시위주동 학생들을 제적시키도록 하여 23개 대학에서 모두 117명을 제적시킴과 동시에 즉각 입영조치하는 한편, 74개의 대학 서클을 해산시키고 14종의 간행물을 폐간조치했다. 이러한 탄압조치로 7개월간 지속되었던 교련반대운동은 끝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