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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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 · 가상적국 · 적대집단 등에 들어가 몰래 또는 공인되지 않은 방법으로 정보를 수집하거나 전복활동 등을 하는 자.
이칭
이칭
첩자, 밀정, 공비, 공작원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적국 · 가상적국 · 적대집단 등에 들어가 몰래 또는 공인되지 않은 방법으로 정보를 수집하거나 전복활동 등을 하는 자.
개설

첩자·밀정과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간첩활동이 역사상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한 자료가 없으나 인류사회의 형성과 더불어 존재해왔다고 보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국가형성과 더불어 국가보존과 발전의 수단으로 전개되어왔다. 특히 분단과 전쟁을 거치고 남북관계가 극한 대립 상황으로 치닫게 되면서 간첩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내용

역사상 간첩활동이 학문적으로 체계화된 것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완성된 『손자병법』 제13편 용간(用間)에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간자(間者: 간첩)의 종류와 활용원리가 서술되어 있으며, 이것이 세계 최초의 정보수집 및 공작원리로 인정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삼국시대부터 정보활동으로 인정될 수 있는 역사적 사례가 있다. 고구려 태무신왕 때 낙랑을 침범하기 위한 왕자 호동(好童)의 자명고 파괴작전, 신라 눌지왕 때에 일본에 억류된 왕자 구출을 위한 박제상(朴堤上)의 파견, 고구려 영양왕 때 살수대첩을 이끈 을지문덕의 적정탐지 등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정보활동으로 인정될 수 있는 사실들이 있었으나 규모와 내용면에서 미미하여 특기할만한 것이 못된다. 한편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정보활동의 조직과 규모, 그리고 기술면에서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보부상의 활동을 들 수 있다. 물론 보부상의 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국가기관이 이들을 정보활동에 활용한 것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부터이다.

보부상은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시장을 지배하고 국가 유사시에는 양곡과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관계로, 자연 세상물정과 개개인의 비밀도 소상히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정보를 수집하고 전파시키며 사발통문(沙鉢通文: 누가 주모자인지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맨처음이 없이 관계자의 이름을 사발 모양으로 삥 돌려가며 적은 통문) 등의 통신임무까지도 수행하게 되었다. 이들은 신의와 충성을 바탕으로 한 정신적 결합과 영리적 실권, 그리고 조직확장으로 세력화되어 임진왜란·정유재란, 그리고 병자호란 때에 관군을 돕는 한편, 정탐과 연락을 맡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 광복군과 미국 전략첩보국(OSS)과의 연합작전 등이 대표적 사례였다. 그러나 간첩활동이 본격화된 것은 해방 이후로, 이는 남북한이 분단된 시대적 상황에서 기인한다.

1948년 정부 수립 이전에도 남북한 간에는 치열한 정보·첩보활동이 이루어졌다. 남한 지역에서 유명했던 조직으로는 백의사가 있었다. 중국 국민당 정권의 남의사 출신으로 후일 일본의 밀정으로 전향한 염동진이 만든 백의사는 대북 공작과 테러는 물론 남한 지역의 테러와도 연관되었다. 즉 1946년 김일성(金日成), 강양욱(康良煜), 김책(金策) 암살 미수사건을 비롯해 1947년 여운형, 장덕수 암살과 1949년 김구 암살에도 깊숙하게 개입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 또한 정부수립 전에 성시백을 통한 정치공작 활동을 전개했는가 하면 1948년 초에는 강동정치학원(江東政治學院)을 설치하고, 한국전쟁 직전까지 2,400여 명의 공작원을 남파하기도 하였다. 성시백은 이른바 북한의 ‘권위있는 선’을 대변하면서 남로당 내 반박헌영 세력과 북로당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아울러 남한 내 우익 및 중간 정당·단체들, 미군정청·경찰·군부 등에까지 산하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였는가 하면 10여 종의 신문을 경영하며 선전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렇게 남북 간의 치열한 정보공작 활동 와중에 김수임 사건 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전쟁 중에는 정치공작 보다 군사 작전과 연계된 첩보활동이 대세를 이루었다. 남북 모두 군사정보를 확보하고 후방 교란 활동을 위해 대규모의 첩보 및 비정규전 부대를 운용하였다. 남한 지역에서는 각지에서 빨치산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켈로부대(KLO) 등이 북파되어 대북 첩보 및 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휴전이 성립한 이후에도 남북 간의 첩보활동, 정치공작, 무장게릴라 활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남한에서는 명칭과 조직이 바뀌어가면서 공작원들을 대거 북한지역에 침투시키는 첩보부대가 운용되었고 북한 또한 1968년 1·21사태를 주도한 124군 부대를 비롯해 특수 8군단 등 수많은 첩보 및 공작부대가 운용되었다.

1960년대 말을 기점으로 남북 간의 무장 게릴라 활동이 정점에 다달았으나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군사 공작원 파견 활동은 중지된 것으로 알려졌다. 휴전 이후 1972년까지 북파공작원으로 파견된 인원은 1만여 명에 달했으며 그 중 7,700여 명이 미귀환 실종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활동 이외에 정치공작 활동과 관련된 사건들도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특히 1980년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북한의 주체사상이 대거 확산되면서 학생운동 출신들이 주도하는 북한과 연계된 지하조직 사건들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남한 지역에서 불거진 간첩사건들은 종류와 유형도 매우 다양했다. 북한에서 특수훈련을 받고 파견된 간첩, 납북 후 공작원으로 파견된 경우, 남한 지역에서 공작원으로 포섭된 경우 등이 대표적 유형이었다. 또한 간첩으로 지목되어 체포된 사람들도 매우 다양한 계층과 직업 분포를 보여주었다. 납북 어부, 유학생, 교수, 농민, 재일교포, 노동자, 교사 등등 간첩은 거의 모든 사회계층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간첩사건은 국가 법제도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대부분의 간첩사건은 반공법·국가보안법에 저촉된 혐의로 처벌받았으며 이를 주도했던 것은 중앙정보부(뒤에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으로 개칭), 국군 보안사령부(뒤에 기무사령부로 개칭), 대공 분야 경찰, 공안 검찰 등이었다. 특히 국가보안법과 중앙정보부의 역할이 지대했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 제정된 이래 수차례 개정을 거치면서 대표적인 대공 관련 법체계로 기능해왔다. 국가보안법은 그 자체로도 냉전체제의 유물로 커다란 비판의 대상이었지만 자의적 법적용을 가능케 하는 수많은 독소조항으로 인해 문제가 되었다. 예컨대 국가보안법 7조의 반국가단체 고무·찬양 관련 조항은 모호하고 애매한 법적용의 대표적 사례였다. 예를 들면 김일성은 최악의 인간이기에 ‘김일성보다 못한 놈’이라고 한 표현이 김일성에 대한 고무·찬양으로 해석되어야 했던 웃지못할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제10조의 불고지죄 또한 가족 및 친족관계를 포함해 인간 관계 전반을 통제하고 규율하는 독소조항이었다. 간첩은 부모자식 관계조차도 어쩔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국내 최대 최고의 정보기구인 중앙정보부는 모든 중요한 간첩 사건에 관계되었으며 실질적으로 대북·대공 정보공작의 주역이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 하에서 중앙정보부는 대공 업무를 포함한 국가 정보기관이자 대통령의 정치활동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다. 중앙정보부장은 대통령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으며 권력의 핵심부를 구성하였다. 따라서 간첩 등의 대공사건과 대통령의 정치적 필요성이 결합될 가능성이 커졌고 실제로 간첩사건들은 단순한 공안사건이 아니라 커다란 정치적 의미와 효과를 내게 되었다.

간첩 사건이 정치적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반공 이데올로기와 관련되는 것이었다. 북한과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끊임없이 재생산하였던 반공이데올로기는 간첩사건을 통해 실질적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즉 북한 공산주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로 엄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간첩사건을 통해 계속해서 재확인되는 효과를 냈던 것이다.

간첩사건이 반드시 남북 간에만 나타났던 것은 아니었다. 재미교포 로버트 김 사건에서 보이듯이 우방관계인 한미 간에도 중요한 정보를 놓고 치열한 정보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미관계가 경색 국면이었던 유신체제 후반기, 즉 미 카터 행정부 시절에는 미국에 의한 청와대 도청 사건이 불거져 커다란 파장을 불러오기도 하였다.

남북관계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간첩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었다. 즉 적대하는 두 국가 중 한 쪽에서는 간첩이었지만 다른 쪽에서는 애국자가 되었던 것이다. 남한에서 간첩 혐의로 처형된 성시백이나 통혁당의 김종태 등이 북한에서는 애국자로 칭송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황태성 사건은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박정희의 친형이었던 박상희와 막역한 사이이자 동지관계이기도 했던 황태성은 북한에서 무역성 부상을 지내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를 만나고자 밀사자격으로 남파되었다. 김종필의 부인이자 박상희의 딸이었던 박영옥을 통해 박정희 면담을 추진하던 황태성은 중앙정보부의 관리 하에 있었는데, 이 사실이 언론에 흘러나가 큰 문제로 불거지자 박정희 정권은 간첩 혐의로 서둘러 처형해버렸다.

이처럼 간첩은 남북 대치 상황 속에서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평가의 대상이거나 어느 한 쪽으로 소속을 판별하기 힘든 존재이기도 했으며 정치활동 및 공작의 연장선상에 있던 존재들이기도 했다.

의의와 평가

상대국가 특히 적대국가와 집단의 능력, 또는 그 의도와 약점을 때에 맞추어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적의 기습에 대한 방어뿐만 아니라 선제공격에도 유리한 조건을 준다. 상대를 파악하려는 시도가 간첩활동이며, 이는 자기 나라의 안전과 발전에 영향을 주는 다른 나라의 비밀을 입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필요성과 이러한 비밀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며 이를 은폐하고 있다는 데에서 주체측은 그 행위의 정당성을 찾고 있다.

그러나 간첩은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거나 조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북한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로 묘사되는 것은 바로 미제의 간첩이었는데, 심지어 공산주의 운동의 핵심 지도자였던 박헌영마저 미제의 간첩 혐의로 처형당하기도 하였다. 남한 지역에서도 숱한 간첩사건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조작되거나 이용되었다.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진보당의 조봉암 간첩사건이 불거졌고 박정희 정권 당시 간첩사건으로 발표된 사건은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간첩은 실제로 국가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때로는 정권 안보나 정치적 목적으로 과장, 조작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즉 내부 감시망을 강화하고 통제하는데 간첩은 매우 적절한 수단이 되었다. 국민 대다수를 잠재적 간첩으로 상정함으로써 국가권력은 사회통제의 유력한 수단을 확보한 셈이었다. 특히 반공이데올로기와 결합된 간첩은 정치적 반대와 사회적 저항운동을 봉쇄하는 효율적 장치로 이용되었다.

참고문헌

『재일동포 및 일본관련 간첩조작 의혹사건 조사결과보고서』(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2007)
『나는 간첩이 아니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2006)
『대한민국사: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3』(한홍구, 한겨레신문사, 2005)
『대비정규전사(對非正規戰史) Ⅱ: 1961-1980』(국방군사연구소, 1998)
『국가보안법연구 2』(박원순, 역사비평사, 1992)
『북괴의 대남도발사』(내외통신사, 1980)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황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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