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

영국 국기
영국 국기
외교
지명/국가
유럽대륙 서북쪽 대서양상에 위치한 입헌왕국.
정의
유럽대륙 서북쪽 대서양상에 위치한 입헌왕국.
개설

정식 국호는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일반 명칭은 영국연합왕국(United Kingdom)이다. 국명에서 보듯이 브리튼을 이루는 잉글랜드(England)·스코틀랜드(Scotland)·웨일스(Wales)와 북아일랜드(Nothern Ireland)로 구성되어 있다.

영국의 면적은 24만 3610㎢, 인구는 2015년 현재 6408만 8222명이며, 인구의 민족적 구분은 주로 잉글랜드에 거주하는 앵글로색슨족(Anglo-Saxon族)과 웨일스·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에 사는 켈트족(Celt族)으로 대별된다. 공용어는 표준영어(King’s English)이나 켈트계의 겔릭어(Gaelic語)·웨일스어·콘월어(Cornish)도 사용된다.

종교는 영국국교회(Anglican Church, 50%) 외에 가톨릭(11%), 감리교(Methodism)(30%)가 신봉된다. 기후는 멕시코만류와 편서풍의 영향으로 북위 50°∼60°의 고위도임에도 따뜻하며 기온의 차도 적다.

형성 및 변천

영국은 서기전 55·54년 카이사르(Caesar)의 침공으로 로마의 속주(屬州)가 되어 브리타니아로 불렸다. 약 400년간 로마의 군정이 있은 뒤 앵글로색슨의 침공으로 6∼8세기에 7왕국시대가 있었으나 829년 통일왕국을 이루고, 1066년에 봉건국가 노르만조(朝)가 성립되었다. 1215년의 「대헌장(大憲章)」은 이 시대의 소산이다.

절대군주제는 엘리자베스(Elizabeth) 1세의 치세 이후 점차 쇠퇴하여 17세기 100년 동안의 내란으로 국왕이 처형되고 크롬웰(Cromwell, O.)이 주도한 공화정부가 들어섰으나, 그가 죽은 뒤에는 다시 왕정으로 돌아가 1688년 이른바 명예혁명이 이룩되었다. 이때부터 영국은 입헌군주제하에서 의회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오늘에 이른다.

엘리자베스시대에 시작된 해외영토 확장은 18세기에 이르러 ‘대영제국(大英帝國)’을 건설, 그 위세는 19세기 말 빅토리아(Victoria) 치세 때 절정에 달하였다. 이즈음 우리나라에도 한영 수교의 기원이 발단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치른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대영제국은 ‘영연방(英聯邦)’으로 탈바꿈하여 사실상 붕괴되었다.

영국의 정치

영국 정치제도의 기본은 입헌군주제하의 의회정치이다. 국왕은 상징적·의전적 기능을 갖는 데 그치고, 복수 정당이 총선거에 참가하여 의회(하원) 내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하는 정당이 집권당이 되며, 수상이 수반이 되어 대권을 장악, 행사한다.

하원은 소선거구제에 의해 선출된 659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상원은 세습귀족·성공회 주교·법관 등으로 구성되며, 1910년 이래 여러 차례에 걸친 법 제정으로 그 권한이 극히 제한되어 하원에서 의결된 법안의 성립을 최대한 1년 기간 지연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상원은 관습적인 전통에 따라 연합왕국의 최고재판소로서 기능하는 ‘국회법원(High Court of Parliament)’의 권한을 행사한다. 영국은 거부권을 가진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국으로서 자유진영의 지도적 국가이며, 유럽공동체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이다.

영국의 사회

영국은 전통적인 계급 또는 계층사회이다. 그러나 귀족·평민·상노와 같은 신분적 계층사회는 아니고, 출신·직업·교육 정도 등으로 가름하는 상중하의 계층이 있어서 그 각 계층은 다시 상중하로 3분된다.

상위층은 국왕·왕족·귀족 등이며, 중위층에는 ‘젠트리(gentry)’라는 중산계층이 있어서 그 폭이 가장 넓고 영국사회의 중심체가 되어 왔다. 이른바 ‘젠틀맨’이라 자부하는 계층이다. 하위층은 농업·어업·광공업·서비스업 등에 속하는 노동층이다.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발전된 보통선거권, 노동조합을 주축으로 한 노동당의 집권, 교육기회의 확산으로 하류·노동계급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진작되었다. 영국은 사회보장제가 가장 잘 이루어진 나라 중의 하나이다. 16세기의 「구빈법(救貧法)」, 1908년의 무상노인연금제 등의 오랜 전통이 있어 왔고,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사회보장제도를 채택하여 이른바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사회보장이 성립되어 있다.

특히, 의료혜택은 전국민이 무료이며 병원은 공영화되어 있다.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전형적인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갖춘 나라이다. 국제간 경제협력의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1973년 1월 유럽공동체에 가입, 경제와 산업은 유럽 가맹국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영국의 경제

1975년부터 원유를 생산해 온 북해유전(北海油田)이 영국의 국제수지 향상에 밝은 전망을 던져주고 있으나, 에너지산업·제조업·국제무역·광업 등 모든 분야에서 정체와 부진을 거듭하고 있다.

1988년 당시 1인당 국민총생산은 1만 430달러이고, 국민총생산은 5929억 4600만 달러이었으나, 1997년 현재 1인당 국내총생산은 1만 9621달러이고, 국내총생산은 1조 2784억 달러이다. 그리고 1988년 수출은 1451억 달러였고, 수입은 1893억 달러로 해마다 무역수지적자를 나타내고 있었으나 1997년 현재 수출이 2540억 달러이고, 수입이 1903억 달러로 무역수지흑자를 나타내고 있다.

통화는 파운드(Pound)이다. 영국인의 경험주의적 현실주의의 국민성은 여러 분야에서 뚜렷하다. 벤담(Bentham, J.)의 공리주의, 리카도(Ricardo, D.)의 자유주의적 고전경제학, 피그(Pigue, C.)의 후생경제학, 케인스(Keynes, J.)의 고용이론 등 모두가 개인주의와 경험주의에 기초한다.

영국의 예술

경험주의적인 국민성은 예술 분야에서도 추상적인 음악보다 인간과 그 사회를 구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문학에서 뛰어난 문호와 위대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

영문학은 고대영어시대부터 운문 문학에 특출하였으며, 셰익스피어(Shakespeare, W.)와 17세기의 밀턴(Milton, J.), 19세기의 바이런(Byron, G. G.) 등 낭만파 시인들과 엘리엇(Eliot, T. S.) 등 위대한 문인들이 많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산문문학과 18세기 이래의 수필, 20세기의 희곡 등에서도 세계문학에 공헌한 바는 지대하다.

한영관계사는 1883년의 수교 이전 영국선교사들의 전도활동, 영국군함의 거문도(巨文島) 상륙으로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대한제국 때의 교역, 6·25전쟁 당시의 지원 등을 거쳐 1983년 수교 100주년을 넘긴 우방으로서의 관계를 맺고 있다.

광복 이전의 관계

(1) 광복 이전의 관계

우리나라와 영국과의 관계는 1845년 영국군함 사마랑호(H. M. S. Samarang號)가 거문도에 들러 그 섬을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이라 명명하고 돌아간 것이 양국 접촉의 효시였다. 그 뒤 1882년 4월에 영국은 청나라의 중개로 윌스(Wills, G. O.) 제독과 한국 정부 사이에 ‘조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1883년 11월에 청나라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한국과 교섭한 끝에 새로운 조약인 ‘조영수호통상조약’으로 대치되었다.

1885년 4월 영국은 제정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발진기지로서 갑자기 거문도를 점령하였다가 우리나라 정부의 항의와 영러관계의 정상화로 1887년 2월에 철수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영국은 청나라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러시아에 대항하여 일본 쪽으로 기울게 되었고, 그 결과 1902년에 ‘영일동맹’이 맺어졌다.

이는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에서 다시 일본이 승리하자, 영국은 동북아시아에서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본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고, 다른 한편 일본으로서도 러시아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 곧이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데에는 영국과의 동맹관계 수립이 국제적 호응을 얻는 데 용이하다는 이해관계가 일치한 때문이다.

1910년 이전에 자국의 이익의 보호를 위하여 일본의 한국지배를 묵인하는 태도를 취하던 영국은 경술국치 후, 특히 3·1운동을 전후하여 일본의 관헌에 의한 전제적이며 반동적인 무단통치에 점차 비판적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의 만주파병을 계기로 반일(反日)로 선회하여 1921년 영일동맹을 폐기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반목추세는 1930년대의 중일전쟁으로 더욱 굳혀졌고,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영국과 일본은 교전국이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종결을 목전에 둔 연합국 수뇌가 카이로에서 회동하였을 때 영국은 다른 나라들과 함께 우리나라의 독립을 약속하였다. 영국은 우리 나라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뒤 곧 각종 이권, 주로 광산채굴권 획득 공작에 나섰는데 영평사금광(永平砂金鑛)·은산금광(殷山金鑛) 등이 그것이었다.

한편, 홍콩 등지를 본거지로 한 영국계 상사들(怡和洋行, 廣昌洋行)이 한국과의 교역 가능성에 착안하여 한국 진출을 여러 모로 꾀하였으나, 교역은 한국의 광산자원량의 부족, 일본상인들과의 경쟁, 상대할 한국상인의 결여, 유럽으로 수출할 가치가 있는 한국상품의 빈약 등의 이유로 극히 부진하였다.

다시 말하여 1894년부터 1910년 사이에 한영 양국의 교역이 제법 활기를 띠는 듯하였으나, 그 규모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한국이 영국에서 들여온 수입상품은 일본·중국 등지에서의 수입품을 합친 총수입량의 20% 정도에 머물렀고, 영국에의 수출은 총수출량의 0.04%에 불과하였다.

경술국치 이전까지 영국이 관심을 가졌던 이권 또는 교역품은 광산 외에 재봉틀(싱거), 인천의 연초공장, 유류, 서울의 상수도 등 광범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경술국치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 광복 때까지 부진을 면하지 못하였다. 경술국치 전 양국의 교역은 현재(1985) 가격으로 약 7000만 달러에 달하였으며, 이것은 1960년대 교역량의 추세와 비등한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1930년대에는 극히 축소되어, 영국인들은 일본인에 의해 한국시장으로부터 완전히 축출당하였다.

1945년까지의 영국은 주로 동북아시아에서의 자국의 권익보호와 제한된 교역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 뒤에는 주로 교역대상국으로서의 관심을 높여왔다.

6·25전쟁이 휴전으로 일단락된 이후에는 한국에 대한 군사적 관심이 사실상 줄어들고 동북아시아 지역의 안전보장의 일차적 책임을 미국에게 위임한 결과가 되었다.

광복 이후의 관계

(2) 광복 이후의 관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우리나라와 영국의 관계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영국·소련의 외상회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회담에서 영국은 한반도 신탁통치안에 찬성하였다. 그러나 그 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즉각 승인하였으며, 곧 이어서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6·25전쟁 발발 전 당시의 주한영국사절이었던 홀트(Holt)는 남북한간에 전쟁이 벌어지면 남한은 수세에 서게 되고 하와이에 망명정부를 세우게 될 것이라면서 한국정부 지지는 영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적인 견해를 나타내었으며, 영국 군부에서도 같은 정세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이 있자 영국 정부는 미국의 파병요청에 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 다음가는 큰 규모의 군대를 한국에 파병하였다. 전쟁 발발 직후 항공모함·순양함·구축함으로 구성된 함대를 한국해역에 급파하였으며, 이어 지상군을 파견하였다.

1951년 4월 임진강에서 영국군 글로세스터셔(Gloucestershire) 여단이 중공군 2개 사단과 대적, 승리를 거둔 것은 세계전사에 기록될 만한 것이다.

휴전 이후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열린 정치회담에서 영국은 “남북한의 발언권이 인구비례에 따라야 하고 중립국관리의 선거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을 비롯,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한반도문제 거론 때마다 한국측 입장을 지지하여 왔다.

한국과 영국의 외교관계는 1949년 1월 18일 수교합의가 이루어진 뒤 그 해 3월 주한영국대사관이 설치되었고, 1950년 2월 주영한국대사관이 개설되었다. 이후 양국간에는 인적 교류가 활발하였으며, 1986년에는 전두환(全斗煥) 대통령과 대처(Thatcher) 수상의 정상교환방문이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그 해 4월 유럽4개국순방 도중 7일에서 10일 사이의 3박4일 일정으로 영국을 방문, 8일에 엘리자베스(Elizabeth Ⅱ) 여왕과 오찬을 가지고, 이어 9일 대처 수상과 다우닝가 10번지 수상관저에서 양국정상회담을 가졌다.

전두환 대통령은 부총리 등 경제각료와 경제인연합회 회장 등 재계인사를 대동, 양국간의 교역증진에 역점을 두어 현지에서 6억 달러의 상담을 종결지었다.

한편, 대처 수상은 그 해 5월 3일 우리나라를 답방, 전두환 대통령과 제2차 정상회담을 갖고,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한 양국간의 외교적 협력문제와 상호교역 증진문제를 다시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대처 수상은 이어 동경에서 열린 세계7개국 정상회담에 참석,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활동을 해주었다. 1989년 11월에는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영국을 공식방문하여 교역문제, 동구권의 변화에 대한 정세 등을 두고 광범한 현안문제를 논의하였다.

한영 양국간에는 사증(査證)면제협정(1969.11.), 항공업무에 관한 협정(1972.5.), 이중과세방지협정(1978.5.), 공업소유권보호협정(1978.2.), 투자보장협정(1979.3.), 문화협정(1982.4.), 과학 및 기술협력협정(1985), 과학기술협력에 관한 양해각서(1986.4.), 항공협정개정 및 방위산업협력 양해각서(1990.10),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정(1991.11), 이중과세방위협약(1996.10) 등이 체결되어 있다.

한국과 영국의 교역은 최근 10년 간의 교역량이 수교 후 90년 간의 수출입액을 앞질렀다. 특히, 1975년부터는 한국의 수출액이 수입액을 초과하기 시작하였으며, 1982년부터는 종전의 수출품 가운데 주종을 이루던 직물 외에도 선박수출에서 획기적인 증가를 보였다.

그러나 상품교역에서는 한국이 다소 유리하였으나, 해운·보험·운송·여행·이자·배당금 등 무형교역에서는 불리한 편이다.

1987년 한국의 대영국 수출은 15억 2542만 달러이고, 수입은 7억 달러로 수출이 2배 이상이었으나, 2015년 현재는 수출이 73억 9000만 달러이고, 수입은 61억 2700만 달러이다.

다음으로 한국과 영국 간의 사회문화적인 관계에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영국문화협회(The British Council)를 통한 한국의 영국방문 학계·문화계 인사들에 대한 지원, 유학 알선, 영국 정부의 지원에 의한 1970년 울산공대 설립 등이 있다.

그리고 문화교류를 보면 1975년 왕립셰익스피어 극단, 로열발레단의 한국공연, 1981년 이후 BBC오케스트라단·런던교향악단·런던필하모닉오케스트라단의 내한공연, 1984년 2월 ‘한국미술 5천년전’이 대영박물관에서 개최된 것 등이 특기할 만하다.

그 밖에 한국에는 1954년 한영협회, 영국에는 1956년 영한협회(Anglo-Korean Society)가 설립되어 양국의 친선에 앞장서고 있다.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선수 369명, 임원 135명, 모두 504명의 영국 선수단이 참가하였다.

한편, 영국과 북한과는 수교관계가 없는 상태이며 제29·30차 유엔총회의 한반도문제 결의안에서 공산측 안에 반대하였다. 다만 1991년 5월 런던 주재 IMO북한대표부가 설치되었다.

정부간 협정은 전혀 없으나 북한·라메트상사간 무역협정(1957.7.), 북한·엔토레스상사간 무역협정(1958.4.), 북한무역촉진위원회·영국무역회간 무역협정(1971.11.) 등이 있다.

양자간 무역규모는 1985년에 영국의 대북한 수출이 300만 달러이고, 수입이 300만 달러이던 것이 1992년은 대북한 수출이 1113만 달러이고, 수입이 50만 1000달러로 수출이 3배 가까이 늘었는 데 반하여, 수입은 6분의 1로 감소되고 있다. 영국은 석탄을 수출하고 시멘트·아연·카드뮴을 수입한다.

문화사적 관계

(1) 문화사적 관계

한국인과 영국인의 접촉은 양국의 국교가 수립되기 전부터 영국선교사들의 전도활동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일본에 주재하던 영국 외교관들과 한국에 왔던 여행자·학자 등에 의해서 한국에 관한 저술과 연구논문의 형태로 문화교류가 이어졌다.

한국 땅을 처음 밟은 영국인은 스코틀랜드 출신 성공회 사제 토마스(Thomas, R. J.)였다. 토마스는 원래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소속의 선교사로 1863년 중국에 파견되었는데, 1865년에 우연히 즈푸(芝罘)에서 한국인 천주교 신자 2명을 만나 그들과 함께 한국에 오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 전국성서공회(The 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의 선교사 윌리엄슨(Williamson, A.)에게 부탁하여 1865년 9월 13일 한국에 와서 두 달 반 동안 머무르면서, 약간의 한국어를 배우는 한편으로 가지고 온 중국어 성경책을 한국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는 12월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1866년 8월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를 타고 대동강에 도착하였으나 다른 일행과 함께 살해당하였다.

이듬해인 1867년 윌리엄슨이 중국에서 한국인들을 만나 성경과 전도문서를 반포하는 한편, 한국의 사정을 모아서 그의 저서 『북중국·만주·동몽고 여행기 및 약간의 한국사정 Journey sin North China, Manchuria, and East Mongolia, with Some Account of Corea』에 수록하였다.

1870년 런던에서 발간된 이 책의 한국에 관한 부분은 서구인들이 한국에 오기 전 한국과 한국인, 그리고 그 문화를 서구인들에게 알려준 고문헌이다. 한국에 관하여 본격적인 책을 쓰고 기독교 전파에 공헌한 영국인은 스코틀랜드 장로회 선교사 로스(Ross, J., 羅約翰) 목사였다.

로스는 1871년부터 만주지방에서 한국인들과 접촉하면서 기독교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동료 선교사 매킨타이어(MacIntyre, J., 馬勒泰)와 함께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한국어성경을 인쇄하기 위해서 봉천(奉天)에 인쇄소를 설치하고 한국인 식자공과 기술자를 양성하였다.

한글 성서의 간행에 따른 경비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에서 전담하게 되어 1881년 인쇄기를 상해로부터 구입하여 이것을 봉천에 설치하였고, 한국인 번역자들이 만든 목활자를 일본주재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릴리(Lilly) 목사에게 보내 4만 자의 연활자를 만들어 봉천으로 가져왔다.

인쇄공은 중국인 신자 중 인쇄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들의 도움으로 인쇄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어를 모르는 중국인 인쇄공만으로 성서 전권을 간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한국인 김청송(金靑松)을 식자공으로 채용하여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를 인쇄하기에 이르렀다.

이 인쇄소는 1883년에는 네 쪽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출판하였고, 이어서 여러 가지 복음서를 내다가 1887년에 신약전서 『예수성교 전서』를 간행하였다. 이 성경을 『로스 번역본 Ross Version』이라 하는데, 이것이 우리말로 된 개신교 성경의 첫 책이다.

만주지방에서 로스와 매킨타이어에게 세례받은 한국인들은 한국 최초의 개신교 신자가 되어 이 번역된 성서를 가지고 한국에 와서 보급하고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이리하여 1898년에는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은 서상륜(徐相侖)의 선교로 그의 고향인 황해도 장연군 송천(松川: 속칭 솔내)에 한국 최초의 교회가 설립되었다.

로스는 한국어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서 『한국어입문 A Corean-English Primer』을 엮어 1877년 상해에서 발행하였다. 그는 또 서방교회의 한국인들에 대한 관심을 진작시키기 위하여 영문으로 『한국, 그 역사·생활·습관 Corea, Its History, Manners and Customs』을 1880년 런던에서 출판하였다.

영국인이 한국에 관하여 쓴 두번째 책은 주한 영국공사관에 근무하였던 스코트(Scott, J.)의 『한국어 입문서 A Corean Mannual or Phrase Book, with Introductory Grammar』(상해 발행, 1887)였다.

영국성공회는 1890년에서 1891년에 걸쳐 한국에서 본격적인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는데, 1891년 4월 13일 영국 해군으로부터 기증받은 현대식 인쇄기를 설치하여 각종 서적과 선교문서들을 인쇄해 내었다.

그리고 1893년 트롤로프(Trollope, M. N.) 신부의 편찬으로 『조만민광(照萬民光)』 등을 비롯하여 많은 선교용 소책자를 발간하였다. 서울 낙동(洛洞)에 소재하였던 이 인쇄소는 한글·한자·영어의 세 가지 활자를 구비하고 있었다.

이 인쇄의 기술 부문 책임자는 영국에서 파견된 하지(Hodge,J.W.)였는데, 그는 1897년에 『한국어자전 Corean Words and Phrases;A Handbook and Pocket Dictionary for Visitors to Corea and New Arrivals in the Country』(표지는 The Stranger’s Handbook of The Corean Language)이라는 한국어 회화책을 편찬하였다.

한편, 한국 또는 일본에 주재하던 영국 외교관들도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일본주재 영국 외교관 애스턴(Aston,W.G.)은 조영(朝英)수호조약이 체결되기 전이었던 1878년부터 1883년까지 임진왜란에 관한 장문의 논문 「풍신수길의 한국침략 Hideyoshi’s Invasion of Korea」을 발표한 데 이어서 「한국어와 일본어의 비교연구 A Comparative Study of the Japanese and Corean Language」(1879)·「한국의 대중문학 Corean Popular Literature」(1890) 등 논문을 일본에서 발표하였다.

보나르(Bonar,H.)는 조영수호조약 협상이 진행중이던 1882년에 한국 서해안과 서울을 비밀리에 여행한 다음에 그 여행기를 일본에서 발행된 영국왕립 아시아학회 회보에 게재하였다.

그리고 주일영국대사였던 새토(Satow, E)는 「일본에 전래한 한국도자기 The Corean Potters in Satsuma」(1878)·「한국의 고대 인쇄술에 관한 연구 On the Early History of Printing in Japan;Further Notes on Movable Type in Corea」(1882)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또한 애스턴과 함께 『한국 지명에 관한 편람 A Mannual of Corean Geographical and other Proper Names』(1883)을 만들기도 하였다.

외교관으로 한국에 주재하였던 캠벨(Campbell, C. W.)은 1889년 가을 아직 서양인들이 방문한 적이 없었던 북한지방을 2개월 이상 여행하여 금강산과 백두산까지 올라갔다 온 뒤에 상세한 보고서를 본국에 보내어 1891년에 영국의회문서로 출판하였다. 주한 부영사 찰스(Charles, W. R.)는 『한국의 생활 Life in Corea』(1888)이라는 책을 썼다.

이 밖에 영국인이 쓴 한국관계 저서로 커즌(Curzon, G. N.)이 쓴 『극동의 문제들 Problems of the Far East』(1894), 비숍(Bishop, I. B.)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Korea and Her Neighbours』(1898) 등이 널리 알려진 책이다.

미국인 그리피스(Griffis, W. E.)의 『은자의 나라 한국 Corea, The Hermit Nation』(1882)과 헐버트(Hulbert, H. B.)의 『대한제국멸망사 The Passing of Korea』(1906)도 런던에서 발행되었다.

이 밖에도 한국의 미술·음악 등에 관하여 연구한 영국인들도 있지만, 특히 곰퍼츠(Gompertz, G.st. GM.)는 한국의 도자기와 서지학에 대하여 깊이 있는 연구업적을 남겼다. 그는 셸(Shell) 석유회사 극동지점에 근무하면서 『한국의 도요예술 The Ceramic Art of Korea』(1961)·『한국의 고려자기 Korea Celadon and Other Wares of Koryo Period』(1963)·『한국 이조시대 도자기 Korean Pottery and Porcelain of the Yi Period』(1966) 등을 저술하여 영국과 구미 각국인에게 한국의 도예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주었다.

그는 또 1963년 『한말부터 1950년까지 서구인들이 쓴 한국관계문헌목록 Bibliography of Western Literature on Korea, From The Earliest Times Untill 1950』을 작성하여 한국학 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 문헌목록은 미국인 언더우드(Underwood)가 1931년에 처음 작성한 것을 보완한 것이다.

영국인들이 중심이 되었던 학술문화단체로는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Korea Branch of Royal Asiatic Society)가 있다. 이 학회의 한국지부는 1900년에 창립되어 회보 『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를 발행해 오고 있다. 이 회보에는 성공회 주교 트롤로프의 한국학 관계논문들이 많이 실렸다.

영국인이 발행한 첫 잡지는 1890년 7월에 창간된 『모닝 캄 The Morning Calm』이라 할 수 있다. 이 잡지는 런던에서 인쇄하여 우리나라와 영국 등 여러 나라에 배포한 것이었다. 즉, 원고를 서울에서 런던으로 보내면 이를 런던에서 인쇄해서 발행하였다.

그러므로 서울에서 코프(Corfe, C. J.) 주교가 1890년 11월 30일에 보낸 편지가 이듬해 5월호에 실릴 정도로 시차가 심하였다. 그러나 이 잡지는 한국과 관련된 정기간행물로서는 최초의 것이며, 한국을 세계 여러 나라에 소개한 잡지로서 1936년 10월까지에 이르는 긴 기간 동안 발행되었다.

영국인이 한국에서 발행한 신문으로는 배델(Bethell, E. T., 裵說)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하지가 창간한 『서울 프레스』가 있다. 『대한매일신보』는 러일전쟁 취재를 위하여 영국의 『데일리 크로니클』 특파원 자격으로 한국에 왔던 배델이 1904년 7월 18일에 창간한 한국어와 영어로 된 2개 국어 신문이었다.

창간 당시에는 한글전용의 『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 Korea Daily News』가 하나의 신문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05년 8월 11일부터는 이를 분리하여 국한문판과 영문판 두 개의 신문으로 만들었다. 또 1907년 5월 23일부터는 따로 한글판을 창간하여 배델은 국한문·한글·영문의 세 가지 신문을 동시에 발행하였다.

한편, 하지는 원래 성공회의 인쇄기술자로 내한하였으나 10년 동안 성공회에서 근무한 뒤에 사임하고, 1901년부터는 자립하여 서울 프레스 하지 앤드 컴퍼니(Seoul Press-Hodge & Co.)라는 인쇄소를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 인쇄소에서 『서울 프레스 익스프레스 Seoul Press Express』라는 한 페이지짜리 소식지를 발행하다가, 1905년 6월 3일부터는 『서울 프레스 위클리』라는 제호의 주간신문을 발행하였다.

그러던 중 배델의 『대한매일신보』가 고종의 지원을 받으면서 반일적인 논조로 발행되자, 주한 일본통감부는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하지의 『서울 프레스』를 매수하여 1906년 12월 5일부터 이 신문을 기관지로 만들었다.

이 신문은 경술국치 후에는 총독부의 기관지이자 한국에서 발행된 유일한 영어 일간지로 남아 계속 발행되다가 1937년 5월 30일에 폐간되었다.

한편, 배델의 『대한매일신보』는 한말 최대의 민족지로서 항일논조를 폈으나 일본은 끈질긴 대영 외교교섭을 통하여 배델의 추방, 또는 『신보』의 폐간을 획책하였다. 이리하여 배델은 일본의 공작으로 1907년과 1908년 두 번이나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등의 박해를 당하다가 1909년 5월 1일에 사망하였다.

그 후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폐간되었고, 『신보』는 영국인 만함(Marnham, A. W., 萬咸)이 발행하였는데, 경술국치 직전인 1910년 5월 21일 통감부가 이를 5,000엔에 매수하였다. 이리하여 당시 최대의 민족지였던 『신보』는 경술국치 후 『매일신보』라는 제호로 총독부의 기관지가 되었다.

영국 내의 한국학 연구

(2) 한국학 연구

런던대학교에는 1917년에 동양학대학(School of Oriental Studies: 현재의 명칭은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이 설립되었으나 한국학의 연구는 거의 없었다.

한국의 도자기에 관해서는 비교적 많이 알려졌지만 정치를 비롯한 다른 분야는 중국 또는 일본학 연구의 일부로 다루어졌을 뿐이다. 한국학에 관심을 기울였던 극히 제한된 연구가들은 한국 또는 인근 국가에 머물렀던 사람들이었으므로 영국 안에 한국학을 확립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6·25전쟁 후인 1956년 1월에 왕립 아시아학회가 재건되었다(전쟁 전에는 1949년 11월에 열린 총회가 마지막이었다).

이때부터 한국학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으로는 성공회 대전교구 주교였던 러트(Rutt,R.) 신부와 런던대학교에서 1953년부터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강의해 온 스킬런드(Skillend,W.E.) 박사를 들 수 있다.

러트 신부는 1954년에 한국에 왔다가 1974년에 귀국하여 현재는 레스터 교구의 대주교로 있으며, 스킬런드 박사는 런던대학의 동양아프리카연구대학에서 1989년까지 재직한 뒤 정년퇴직하였다.

이 밖에도 근년에 이르러 스킬런드 박사 후임으로 런던대학교에 재임중인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교수 등 적지않은 영국학자들의 한국학에 관한 연구논문들이 나오고 있다. 주한 영국대사관에 근무하였던 호어(Hoare, J. E.) 박사도 한국관계 논문을 많이 발표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학 연구과정이 개설된 영국의 대학도 몇 군데가 있다. 강좌가 제일 먼저 개설된 런던대학의 동양아프리카연구대학을 비롯해서 1979년부터 셰필드대학(Sheffield大學)에, 1981년부터는 헐대학(Hull大學)에, 그리고 그 뒤 뉴카슬대학(University of New Castle)에 각각 한국학 연구과정이 개설되었다.

더럼대학(Durham大學), 옥스퍼드대학, 케임브리지대학,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의 퀸즈대학(Queen’s University Belfast)과 에든버러에 소재한 스코틀랜드연구대학(School of Scottish Studies) 등에서도 한국문화와 관련된 연구가 진행된 적이 있거나 현재도 진행중이다.

이 밖의 몇몇 대학에서도 최근 들어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심을 가진 연구자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영국의 공공기록보관소(Public Record Office)가 소장한 한국전쟁관계 자료들을 이용한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도 활발하다. 이들 한국학 연구자들이 구성한 재영 한국학협회가 있다.

서울에서는 1983년 한영수교 10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회(위원장 金相万)를 구성하고 학술 심포지엄과 강연회 등 다양한 행사를 한영 양국에서 개최하였다. 런던에 있는 공공기록보관소에는 한국관계 자료가 다량으로 소장되어 있다.

이 보관소에는 조영수호조약이 체결되던 때로부터 한국동란에 이르는 동안의 외교문서와 영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수립 등에 관련되는 원자료들이 있으며, 영일·영중 등 한국의 국제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주변 국가의 한국에 관한 교섭상황을 알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옥스퍼드대학의 도서관 로데스하우스(Rohodes House)에는 대한제국 당시의 주한 영국성공회의 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대영도서관 건물 안에 있는 전시실에는 세계적인 희귀도서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는 한국의 인쇄술에 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책 한 권이 전시되어 있다.

대영도서관이 1996년에 발행한 『대영도서관의 보물들 Treasures of the British Library』을 보면 이 도서관에서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한국의 그림과 서적들을 많이 수집했다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 한국이 인쇄술에 있어서 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 먼저 금속활자를 처음으로 개발하고 완성시킨 나라라고 소개하고 있다. 대영도서관은 그 중 갑인자(甲寅字)로 인쇄한 책 한 질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1434년(세종 16)에 인쇄된 책[Commentaris on the Spring and Autumn Annals]이라 한다.

프랑스의 서지학자 모리스 꾸랑이 1894년에 『한국서지』를 발행할 때에 이미 대영도서관이 소장한 한국의 책들을 조사했다는 것을 보면 이때부터 대영도서관에는 적지 않은 한국의 책들이 소장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국 내의 한국유물

(3) 한국유물

1883년에 조영수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1910년까지는 한국의 문화재에 관한 관심이 적었으며 수집품도 제한되어 있었다.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박물관(Victoria & Albert Museum)에서 한국의 미술품을 처음 수장한 것은 1878년이었다.

대영박물관도 1889년에 삼국시대의 토기를 수집하였는데 그 뒤 주로 고려자기와 이조백자를 수집하였다. 1883년에 조영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처음으로 부임한 주한영국총영사 애스톤(W. G, Aston)은 일본역사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방대한 분량의 한국과 일본의 서적들을 수집하였는데 일본의 서적들은 대부분 캠브리지대학에 양도하였으나 한국서적은 1910년과 1911년 사이에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아시아박물관에 보내졌다.

그러나 이 기간에는 몇몇 여행가들과 외교관들이 한국을 소개하는 글을 써서 일반인들도 간접적으로 한국에 대한 인식을 넓히게 되었다. 1888년에는 토마스 와터스(Tomas Watters)가 용의 형태로 된 백자 연적을 대영박물관에 기증하였다.

한편 빅토리아 앨버트박물관에서는 제1차세계대전 이전에 한국을 방문하여 자기를 가져온 변호사이자 사업가였던 윌리엄 태프(William,M.Tapp), 1933년 한국·일본·중국을 여행하여 청자류와 청동 물품을 수집해 온 오브레 르 블롱(Aubrey Le Blond), 그리고 1980년대 말 한국 주재 대리총영사로서 직물류와 수공예품들을 수집해 온 토마스 와터스(Thdmas Watters) 등의 수집품을 구입하였다.

1911년에는 대영박물관에서 33점의 고려자기를 조지 유모포폴로스(George Eumofopoulos)로부터 입수하였다. 이 문화재들은 개성에서 일본인들이 발굴한 것으로 짐작되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다.

유모포폴로스는 1930년대 후반에도 대영박물관과 빅토리아 앨버트박물관에 그의 수집품을 팔았는데 이때 대영박물관이 15점의 도자기를 구입하였다. 그러나 1960년 이전까지 영국에 소개된 한국의 도자기는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박물관에 소장된 극소수의 도자기와 일본인들의 소개로 알려진 것들뿐이었고,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를 연결시켜 준 ‘고리’ 이상의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영국인 곰퍼츠가 영국 셸 석유공사의 극동지점에 근무하면서 한국도자기를 수집, 분류하여 출판한 책들은 영국과 구미인들에게 한국 도요예술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주었다.

곰퍼츠는 아마도 영국에서는 한국도자기를 가장 많이 수집한 사람이고, 근년에 그의 소장품을 모교인 케임브리지대학의 피츠 윌리엄박물관에 기증하여 교육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곰퍼츠는 스스로 한국도자기를 연구, 수집하는 데 그치지 않고 1961년에는 영국예술원의 협조를 얻어 한국미술문화재의 런던 전시를 주선하였고, 이조자기 30점이 포함된 전시품의 목록을 만들기도 하였다.

대영박물관에는 동양전시관 I에 한국의 미술품과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1990년대 이전까지 대영박물관이 소장한 유물들은 자기류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그 후로는 독립된 한국전시실을 개설하기 위하여 불교미술 등의 유물들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97년에는 대영박물관에 임시로 전시관을 열었는데 2002년에는 국제교류재단(Korean Foundation)의 명칭을 붙인 상설전시관을 개관할 예정이다.

대영박물관이 소장한 한국문화재는 1만여 점이 넘는다.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한국의 미술품과 도자기를 시기별로 보면 백제와 신라의 토기를 비롯해서 통일신라시대의 금가루를 입힌 네 개의 청동 무량광불(無量光佛), 고려시대의 청자와 자개칠기로 만든 불경함, 그리고 조선시대의 자기 등이 있었다.

이 밖에 불경과 훈민정음에 관한 옛날 전적도 있다. 대영박물관에서는 1984년 2월부터 5월까지 ‘한국미술 5천년전’을 열고, 『한국의 보물들 Treasures from Korea』이라는 224페이지의 원색 도록을 발행하여 한국문화 소개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빅토리아 앨버트박물관에서도 1992년에 『한국미술과 디자인 Korean Art and Design』을 발행하였다. 한편, 1992년 2월에는 삼성문화재단이 43만 파운드를 후원하여 빅토리아 앨버트박물관에 삼성갤러리(한국실)가 상설 전시관으로 마련되었다.

이 박물관이 소장한 한국문화재는 약 600점에 달하는데 20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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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Art in United Kingdom(John Figgess, Korean Culture, Vol.6 No.2, June, 1985)
Korean British Relations(Korean British Society, Seoul,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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