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의 성낙규(成樂奎)·유진상(兪鎭相)·성낙헌(成樂憲) 등과 서울의 백완혁(白完赫)·김진섭(金鎭燮)·백인기(白寅基) 등이 지방의 금융 소통과 실업을 장려할 목적으로 공칭자본금 30만 원과 납입자본금 7만 5000원으로 설립, 발족시켰다.
1913년 7월 업무를 시작했는데, 초대 은행장은 유진상, 전무취체역은 성낙헌, 지배인은 석전형(石滇衡)이었다. 설립과 동시에 충청남도 공주·홍천·서산·아산·홍산·온양에 거주하는 5,000명의 거래자를 가지게 되었으며, 1917년 5월에는 광천에, 1918년 10월에는 천안에 지점을 개설하였다.
또, 예산에 방계회사인 충남상사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19년 안성지점을 개설하였으며, 공칭자본 100만 원, 납입자본 47만 5,000원으로 증자하였다.
1920년천안의 경남광업주식회사를 흡수, 합병함으로써 공칭자본 200만 원, 불입자본 72만 5,000원으로 증자하였다. 1927년 본점을 천안으로 옮겼으며, 1928년 충남제사공장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총독부의 민족계 은행 통합정책으로 1930년 11월한일은행(韓一銀行)과 대등한 조건으로 합병한 뒤, 동일은행(東一銀行)을 신설함으로써 해산되었다.
농촌 소도읍에서 적은 자본으로 출발하여 경이적인 발전을 이룩한 것은 예산 지방의 자연 여건과 크게 관련된다. 예산은 미곡생산 중심지로 지주와 미곡상 간의 매매거래가 활발하였다. 이 같은 여건이 자금거래를 활발하게 하였고, 건실한 운영에 반영되어 은행거래를 주변 지역인 공주·홍성·서산 등지로까지 확대할 수 있었다.
또한 자본과 경영을 분리, 전문경영인 책임 아래 합리적으로 운영하였다는 점 등도 중요한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특히, 이 은행은 운영에 있어 한 사람의 일본인도 참여시키지 않고 해산될 때까지 민족계 은행으로서의 긍지를 고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