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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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를 소작농에게 빌려주고 지대를 받는 토지의 소유자.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지주는 토지를 소작농에게 빌려주고 지대를 받는 토지의 소유자이다. 농지소유자가 직접 경작하지 않고 소작농에게 경작케 하여 받는 소작료를 생계수단으로 하는 계층을 지주층이라 한다. 지주제의 의미를 타인 노동력을 기초로 한 사적 토지소유 일반으로 본다면, 한국 역사의 전 과정에서 지주제의 존재를 밝힐 수 있다. 지주제를 봉건적 소유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보면 일제강점기를 지주제의 성립 시기로 볼 수 있다. 최근 농지개혁의 불철저성, 지가상환액의 부담, 경영규모의 영세성 등으로 법으로 금지된 소작제도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목차
정의
토지를 소작농에게 빌려주고 지대를 받는 토지의 소유자.
내용

농지소유자가 직접 경작하지 않고 소작농에게 경작케 하여 받는 소작료를 생계수단으로 하는 계층을 지주층이라 한다. 한국에서 지주제가 성립된 시기는 그 개념정의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지주를 봉건적 토지소유가 해체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보고, 신분적 예속관계나 기타 경제외적 강제를 배제한 순경제적인 의미에서 논한다면,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를 지주제의 성립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주제의 의미를 넓게 잡아, 타인노동력 특히 자가노동을 기초로 한 소경영 노동력을 이용하여 그것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는 사적 토지소유일반으로 본다면, 한국역사의 전과정에서 지주제의 존재를 밝힐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지주]

현재의 연구수준이나 문헌사료에 나타난 기록으로는 통일신라기 이후에 와서나 겨우 사적 토지소유의 존재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토지가 남아돌았기 때문에 저급한 농업기술단계인 휴경농법(休耕農法)이 일반적이었으며, 직접생산자인 일반농민층은 아직도 사적 소유의 주체로는 성장하지 못하였다.

다만 당시의 토호계층인 촌주(村主) · 호장(戶長)들만이 소를 독점적으로 소유하여 보다 고도의 토지이용방식을 실현하였으며, 특히 논에 대해서는 상당히 명확한 소유주체로 등장하고 있었다. 즉, 9세기에 들어오면 통일신라의 지배체제 속에 커다란 동요가 일어나고 전국 각지에 호족적(豪族的)인 지방할거(割據)세력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세력은 바로 촌주 · 호장들이 성장한 것이다.

통일신라 말기부터 후삼국의 분열기 · 내란기의 정치사를 장식하는 지방호족세력의 등장을 경제적으로 지탱시킨 기반이 이러한 촌주층의 농업경영의 우월성과 사적 토지소유자로서의 전진에 있었겠으나, 이 시기까지는 아직 지주제적 경영방법을 채택하지는 못하였다.

[고려시대의 지주]

고려에 들어와서는 전시과(田柴科)제도가 실시되었다. 여기에서 과전(科田)은 주로 관료나 군인 등이 실제로 보유, 경영하고 있는 토지로서 국가가 이를 그들의 사유지[永業田]로 인정해주고 국가에 의한 수조(收租)를 면제해 준 토지였다. 따라서 과전 등에서 성립된 관료나 군인들의 사적 토지소유권의 성격은 일반농민의 점유지인 민전(民田)에 비하여 훨씬 구체적이고 분명하였다.

즉, 과전을 중심으로 한 사전(私田)에서는 확고한 소유권이 존재하고 있었으나, 민전에서는 현재 경작중인 토지에 한해서만 농민이 권리주체가 될 수 있었다. 이를테면 토지가 진전(陳田)화되더라도 공전인 민전의 경우는 진전을 다시 경작하는 사람만이 그 토지에 대한 권리주체가 되는 것이며, 진전화되기 이전의 경작자가 지닌 권리는 진전화와 더불어 소멸되었다. 이에 대하여 사전의 경우는 진전화되더라도 사전주(私田主)의 권리는 그대로 존속하여 타인이 재경작하더라도 거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전일지라도 국가로부터의 강력한 간섭을 일방적으로 배제할 수가 없었으며, 그 중에서도 사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군인전(軍人田)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였다.

고려 전기에는 전품(田品) 구분의 기준조차 토지이용의 빈도에 두고 있었으며, 일반적인 토지이용방식은 2년에 한 번 경작하는 휴한식농법(休閑式農法)을 행하고 있었다. 또한, 휴경농법단계에서 휴한경(休閑耕)을 행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은 소의 부족이었으며, 따라서 소를 많이 소유하고 우경(牛耕)을 발전시킨 계층이 바로 휴한농법의 담당자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신라 말기의 촌주층이 이 농법을 실현해가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들은 고려왕조에 의한 전국재통일과정 중에서 관료나 군인으로 국가체제 내에 흡수되면서, 그들의 토지가 사전으로 사적 토지소유권을 획득한 것도 단순한 정치적인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그 선진적인 농업경영과 경지에 대한 지속적인 점유의 강화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도 사전주에 의한 휴한농법이 성립하는 한편, 일반농민층의 경영에서는 아직도 휴경농법적인 토지이용이 그대로 광범하게 잔존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전주와 일반농민의 농업경영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었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사전주의 농업경영을 어떠한 역사적 범주, 이를테면 지주제적 경영의 성격으로서 파악할 것인가 하는 데 있어 주요한 관건이 된다.

농업기술상으로 보아 한국농업에서는 건조지 · 습지를 불문하고 계속적인 중경(中耕) 제초작업(除草作業)이 반드시 필요하고, 또 이 노동과정에는 소나 말의 힘을 이용하기가 곤란하므로 손으로 김을 매고 밭을 가는 수누경(手耨耕)에 의한 집약농법이 주로 실시되었다. 따라서 우경을 이용한 휴한농법을 추진한 고려시대의 사전주들에게도 이 수누경에 필요한 노동력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항상 농업경영상의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 중에는 자기에게 예속된 노비의 노동을 이용한 계층도 적지 않았으나, 일시에 대량으로 필요한 수누경을 위한 노동력을 가내노비로써 충당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자가경영을 가지고 있으며 임시로 수누경에 동원할 수 있는 예속적 노동력, 이를테면 전호(佃戶) · 처간(處干) · 장객(莊客) · 반당(伴倘) 등이 이러한 토지경영에 더 적합했을 것이므로, 상당수의 사전주는 자기의 토지경영에 필요한 노동력을 노비에게서뿐만 아니라 국가 공민인 일반농민에게서 구하고 있었다.

한편 일반농민층은 국가공신의 입장을 유지해가면서도, 사전주에게 사적으로 예속되어가는 과정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고려 초기에는 지주적 경영의 형태는 아직도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았고, 지주라고 부를 수 있는 계층의 발생은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에 걸친, 긴 기간을 통하여 달성되었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는 휴한농법에서 연작농법(連作農法)으로 완만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일반농민이 보유한 민전에서도 경작중에만 보장되었던 토지에 대한 제한된 권리가 점차 지양되었다.

[조선시대의 지주]

이에 따라 조선초의 과전법에 이르면 민전에 대한 소유권의 강화를 국가가 인정하는 단계로 성장하게 된다. 이는 고려 전기와 같이 소유주체에 의하여 그 소유권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사전이든 민전이든간에 직접생산자인 농민이 경작하는 토지에 대한 지속적인 점유가 가능했으며, 동시에 연작농법의 보급을 배경으로 농민의 사적 소유권이 크게 진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진전이 되더라도 3년이 지나야 타인이 관(官)에 신고하여 경작할 수가 있으며, 또한 소유자가 다른 곳으로 옮겨 주인 없는 땅이 되더라도 그 이주자가 5년 이내에 돌아오면 다시 그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등, 경작중에만 겨우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던 고려시대의 농민보다는 훨씬 더 토지사유화의 진행이 빨리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고려 후기에 시작된 연작농법으로의 이행이 토지소유관계의 변화로 나타난 것은 과전법의 실시로부터 15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일이었다. 그 최대의 변화는 일반농민층의 사적 소유의 성립, 즉 가족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소농민경영의 출현이었다. 농민의 토지에 대한 권리의 강화는 15세기 이후에도 진행된다. 그것을 추진해간 것은 이앙법의 보급이나 건전직파법(乾田直播法)기술의 확립, 밭에서의 2년 3모작 · 2년 4모작 기술의 확립 등 집약적 농경기술의 발전이었다.

따라서 토지사유화도 더욱 성장하여 3년이 지난 진전일지라도 원래의 소유자가 그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18세기에 들어와 본격화되는 상품경제의 진전에 따라 민전의 매매도 하나의 광범한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토지매매의 성행은 농민의 사적 소유권을 한층 더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농민적 토지소유의 진전과 더불어 사적 대토지소유의 성격도 변화하고 지주적 경영도 그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상당한 편차를 보이게 된다.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 지주제를 포함한 사적 대토지소유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나타나는데 크게 나누어보면 다음과 같다.

솔거노비(率居奴婢) 등의 예속적 노동력을 이용하여 직영지경영을 행하는 형태, ② 소경영농민에게 토지를 대여하고 지대를 수취하는 형태로, 그 중에는 ㉮ 토지 이외의 생산수단의 일부(소나 종자 등)도 대토지소유자가 제공하는 경우와, ㉯ 토지 이외의 생산수단은 전부 농민측이 부담하는 경우가 있다.

①형태의 대토지소유는 고려시대의 사전주의 경영과 동일한 성격의 것으로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에 이르면 주로 농장(農莊)이라 불리고, 지역에 따라서는 18세기경까지도 잔존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대토지소유는 주로 ②형태로 바뀌고, ②에서는 ㉮에서 ㉯로 점차적으로 변화되어간다.

사실 조선 초에는 이미 농장 내부에도 ②형태가 광범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솔거노비 중에서도 독립하여 소경을 행하는 외거노비가 나타나는가 하면[佃戶的奴婢], 양민인 일반농민이 농장에 투탁(投托)하여 노비신분으로 예속적 소경영을 행하는 계층[奴婢的佃戶]도 생겨나, ①과 ②형태가 교착되어 변화되어가는 가운데 서서히 지주적 경영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로써 당시의 지배적인 토지관행은 주로 병작반수(幷作半收)제라 불린 분익지대(分益地代)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토지소유 경영의 변화를 일으키는 최대의 요인은 노비노동을 이용하는 대토지소유자의 직영지경영보다는 병작제를 통한 농민의 소경영이 생산력이 높다는 농법상의 변혁이었다.

그리고 ②형태의 ㉯와 같은 사적 지주경영의 파생형태로서, 17, 18세기 이후의 상품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새로운 형태인 서민지주(庶民地主)가 등장하여 순경제적인 관계인 지주=소작 관계가 발생하게 되지만, 조선시대에 존재하였던 ① · ②형태는 결코 순경제적인 관계만으로 농민지배를 행한 것이 아니었다.

즉 ①의 경우에 보이는 농장적 지주이든, ②와 같이 병작제를 이용한 양반지주이든, 그들은 일정한 신분적 특권을 매개로 한 토지소유자인 동시에 유향소(留鄕所), 뒤에는 향소나 서원 등을 통하여 국가의 지방지배의 일단을 담당한 정치적 실력자이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들을 근대의 지주층과 개념적으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국가와 농민의 직접적인 수취관계가 지주제가 성립, 발전되었어도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말기까지 계속 남아 있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 가면 토지소유자가 아닌 직접 생산자로서의 전호가 전세(田稅)를 국가에 납부하는 제도 등이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이것은 대동법의 실시를 전후로 하여 종래 다양한 현물로 농민이 직접 부담하고 있던 공납(貢納) 부과가 폐지되고, 그것이 대신 지세(地稅)로 바뀌는 과정에서 정착된 하나의 토지관행이었다. 조선 전기의 공납제는 토지소유자뿐만 아니라 호(戶)를 대상으로 하여 부과된 반면 대동법의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토지결수당이 부과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전호라도 대동미를 부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원칙이 먼저 적용됨으로써 대동미보다 3분의 1인 전세도 전호가 부담하게 되었다. 지방에 따라서는 이러한 전세의 부담방법이 벼 · 짚 · 종자 등을 지주 · 전호간에 어떻게 분담하느냐 하는 문제와 더불어 조선 후기의 지주경영이 당면하고 있는 주요한 과제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궁방전(宮房田)이 설정되어 이를 대리관리하는 도장(導掌)제가 발생하고 이것이 물권으로 매매되기도 하였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일반민전에서도 밭이나 논의 일부에서 정액지대의 형태인 도지(賭地)제가 병작제를 대신하여 발생하였다.

이러한 도지권의 성립과 매매에 의하여 농민의 토지에 대한 사실상의 소유권이 점차 확립되어갔다. 말하자면 지주경영 내부에서는 종자 · 가래 · 역축(役畜) 등의 기간노동사용비, 전세 · 토지수선비 등의 경영비용의 부담비율 및 감독비(마름의 고용시) 등의 유무를 통하여 다양한 유형이 동일한 병작제 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또 지역간에도 불균등한 발전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양안(量案) · 추수기(秋收記) 등의 분석을 통해 이러한 농민적 토지소유의 진전양상과 조선 후기의 지주경영의 실체가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검출되고 있다.

그러나 구한말에 이르기까지도 지주=전호 관계는 개별적 지주에 의한 완전한 사적 예속관계가 되지 못하고 국가적으로 집약, 편성된 존재로서 나타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진 대토지소유자와 전호와의 관계는 서구봉건제하의 영주와 농노와의 관계와는 그 기본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지주]

구한 말의 지주적 토지소유와 농민적 토지소유는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일단 근대적 토지소유권의 형태로 재편된다. 농민적 토지소유는 이미 조선 전기에 성립된 것으로 후기에는 상품경제의 규정을 받은, 말하자면 자기노동을 기반으로 한 소유에서 가장 높은 발전단계로 도달한 소유였다.

토지조사사업시 전호납세의 폐지를 통하여 관습상의 경작권, 즉 사실상의 토지소유권이 부정되고 도지권(賭地權) · 도장권(導掌權)과 같은 물권으로서의 소작권도 부정되었다. 민유지에서의 일방적인 국유지 설정, 삼림 · 산야나 미간지, 하천변, 기타 공유지 등에 대한 이용권의 박탈 등 일제의 식민적 농정에 의하여 농민의 토지로부터의 분리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에 반하여 이 사업에서 소유권을 인정받은 지주적 토지소유는 이미 조선시대의 ① · ② 형태의 대토지소유가 아니라, ②의 형태에서 파생되어 나온 서민지주형태의 지주적 토지소유로서, 이들이 식민지지주제의 핵심세력으로 확립, 성장하였다. 이 시기에는 ① · ②에 속한 특권 지주들이 식민지화의 과정에서 지방지배권을 박탈당한 채 몰락하고, 한국에 진출한 일본자본의 토지소유와 한국인 지주를 식민지지배의 사회적 기반으로 삼고자 한 일제의 적극적인 지주제의 보호 · 육성책으로 이들 서민지주층이 급속히 성장하여 종래의 지주=전호 관계는 지주적 권리가 더욱 강화되는 방향으로 변질되었다.

그리하여 1920∼1930년대에 걸친 지주제의 급성장과 더불어 농민의 토지로부터의 분리가 격렬하게 진행되었음을 이 시기의 농민자작지의 급속한 감소와 순소작지의 급격한 증가를 통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926년 당시 지가액으로 전토지의 16.5%에 해당하는 토지의 소유자가 1년 사이에 바뀌었으며, 한편으로는 방대한 인구유출현상이 일어났다.

1945년 무렵 해외거주자의 숫자는 약 400만 명( 일본에 210만, 중국에 170만, 소련에 20만, 기타 3만)에 달하였으며, 그 중 일제에 의하여 강제연행된 100만 명을 제하더라도 300만 명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전 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으며, 이들 대부분이 식민지권력에 의하여 토지로부터 이탈된 농민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토지를 상실한 대부분의 농민들은 여전히 농촌에 머무른 채 또다시 소작에 종사하게 되는데, 종전과 달리 지주의 소작경영에 대한 적극적 개입과 고율의 소작료 부담 등 소작조건의 악화 때문에 이 시기의 소작농들은 소경영자의 성격을 상실하고 항상 불안정한 소작경영상태에 놓여 있었다.

말하자면 조선시대를 통하여 성장한, 자기노동을 기초로 한 농민적 토지소유가 이러한 지주제의 발달로 인하여 결정적으로 부정되면서, 소작농은 생산수단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고 구한 말까지의 전호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농민으로 변해갔다.

이 시기의 지주제의 성격에 대해서는 자본주의적 지주제로 보는 입장과 식민지 · 반봉건적 지주제로 보는 입장이 있다. 전자는 서구에서의 고전적 자본주의 발전의 분석도구를 그대로 한국경제에 적용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을 여지가 많다. 후자는 토지조사사업에 의하여 법적 · 형식적으로는 자본주의적 관계가 성립되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봉건주의적 소유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반봉건적 지주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광복 이후의 지주]

광복 직후에도 이러한 지주적 토지소유는 기본적으로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1945년말 현재 남한의 총경지면적의 63.4%가 소작지였고, 전체 농가의 48.9%가 순소작농, 34.6%가 자소작 및 소 자작농이었다.

이와 같이 압도적 다수의 농민이 지주제의 가혹한 수탈에 놓여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50년 「농지개혁법」이 공포되어 약 20만 정보의 귀속농지(歸屬農地)나 약 27만 정보의 일반농지가 분배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1945년 말의 총소작면적 147만 정보의 약 32%에 불과한 것으로 농지개혁의 실적은 저조한 편이었다. 한편으로 이 시기에 지주의 자경화 또는 자영화, 소작인에의 토지매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소작인의 수는 급격히 감소하였으며, 그 결과 종래의 지주계급은 크게 약화되었고 자작농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농지개혁의 불철저성, 지가상환액의 과중한 부담, 경영규모의 영세성, 농산물 저가정책 등으로 인하여 법으로 금지된 소작제도가 점차 확산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그 소작료율도 5할 정도의 고율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참고문헌

『조선후기농업사연구』 Ⅰ·Ⅱ(김용섭, 일조각, 1970)
『조선시대 봉건사회의 기본구조』(김홍식, 박영사, 1981)
『농지개혁사연구』(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9)
「舊植民地社會構成體論」(梶村秀樹, 『發展途上經濟の硏究』, 世界書院, 1981)
「植民地下朝鮮人大地主の存在形態に關する試論」(宮嶋博史, 『植民地期朝鮮の社會と抵抗』, 未來社, 1982)
「新羅の村落-正倉院にある新羅村落文書の硏究」(旗田巍, 法政大學出版會,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學出版會, 1972)
「朝鮮史硏究と所有論」(宮嶋博史 -東京都立大學, 『人文學報』167, 未來社, 1984)
新羅の村落-正倉院にある新羅村落文書の硏究-(旗田巍,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學出版會,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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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史硏究と所有論(宮嶋博史, 人文學報 167, 東京都立大學,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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