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지개혁은 1949년 6월 21일에 제정, 공포된 〈농지개혁법〉에 의거 1950년에 실시한 것이다. 당시 농지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불가피한 이유는 첫째, 8·15광복 직후의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고 민주국가 건설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데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 우리 나라 농지의 소작비율은 전농지 222만6000㏊의 65%인 144만7000㏊가 소작지였다. 그와 같은 많은 소작지에서 가혹한 소작료를 지불하고 있던 농촌경제는 매년 빈곤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광복과 더불어 민주의식과 평등의식이 고조되면서 사회적 혼란이 적지 않던 때에 일본인 소유농지였던 29만1000㏊의 귀속농지 처리 등 농지제도의 개혁이 요청되었다.
농지개혁을 더욱 서두르게 된 것은 우리보다 앞서 1946년 3월 5일 농지개혁을 단행한 북한이 농지개혁을 공산주의 우월의 선전수단으로 활용하여 사상적·정치적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었으므로, 하루빨리 농민의 숙원인 농지개혁을 전면적으로 단행하여 정치적 불안정을 완전히 해소해야 할 필요성이 진지하게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사회적 이유로 농촌의 반봉건적 사회구조의 개선을 통해 농촌사회를 근대화할 필요성이 있었다. 전통적인 지주와 소작인 사이에는 경제외적인 신분적 예속관계가 계속되고 있을 때, 광복과 더불어 월남동포와 해외동포의 귀환으로 좁은 농지의 소작권을 둘러싼 소작료율이나 경작권분쟁 등은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따라서 소작료의 인하나 소작쟁의 조정 등 미온적 조처로서는 지주 대 소작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기 어려웠다. 이에 사회적 불안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서는 농지개혁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셋째, 농업생산성의 효율화를 기하자는 경제적 이유에서였다. 소작제 하에서는 농민의 생산의욕을 감퇴시키고 더구나 기생지주의 전통적 고율소작료로 재투자의 길이 막힌 소작농은 농지개혁의 계기 없이는 빈곤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따라서 소작농에게 농지의 소유권을 주어 자작농화하여 농업 생산의욕을 고취시키고 부족한 식량을 증산하게 하는 한편, 지주의 경제적 수탈과 경제외적 강제를 해소하여 농가경제의 향상을 도모해야 하였다. 뿐만 아니라 농촌 내의 유효수효를 확대하여 공업생산의 발전을 자극할 필요성이 요청되었기 때문이었다.
농지개혁의 실시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1) 제1차 농지개혁(미군정하의 농지개혁)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미군정하에 있던 남한은 제2차세계대전 후 세계적인 민주경제건설의 기초과업이며, 미국무성의 정책이기도 하였던 고율소작료의 완화와 농지개혁을 적극 권유받게 되었다.
따라서 1945년 10월 5일 미군정법령에 의거, 우선 종래의 고율소작료를 수확량의 3분의 1 이하로 제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19일 미군정법령으로 일본인 소유토지와 재산을 군정청 관리하에 두도록 하였다.
또한 1946년 2월 21일 법령으로 이 재산을 신한공사(新韓公社)에 귀속시켜 귀속농지라 규정하면서 농지개혁의 기본정책 수립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그때 입법의원(立法議院) 내의 다수의석을 차지하였던 지주계급 출신의 한국민주당의원(韓國民主黨議員)들이 정부수립 후에 농지개혁을 실시하자면서 계속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자 미군정 당국은 1948년 3월 11일 과도정부법령을 공포하여 신한공사가 관리하고 있던 일본인 소유농지, 즉 귀속농지에 한하여 우선 농지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개혁의 골자를 보면, 유상매수(有償買收)와 유상분배를 원칙으로 하되, 농가 호당 2㏊(논·밭 포함)를 상한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농지가격은 해당 농지에서 생산되는 연간생산량의 3배의 현물로 하되, 지불방법은 연간생산량의 20%씩을 15년간에 상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불가항력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연부 상환기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상과 같은 방법으로 일본인 소유농지였던 귀속농지 29만1000㏊가 미군정의 관리하에 해당농지를 경작하였던 농민에게 분배되었다. 또 그 업무를 맡았던 중앙토지행정처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농림부에 이관, 접수되었다.
(2) 제2차 농지개혁(대한민국정부수립 후의 농지개혁)
제2차 농지개혁은 국내의 모든 한국인지주가 소유하고 있던 115만6천㏊를 개혁대상으로 하였다.
농림부의 농지개혁법안은 정부수립 후인 1949년 1월에 국회에 제출되었다. 그러나 국회의 산업노동위원회의 농지개혁법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어 정부안과의 절충 및 광범한 수정이 가해졌다.
그 뒤, 드디어 전문 6장 29조로 된 〈농지개혁법〉이 그 해 4월 28일에 통과되어 6월 21일에 공포되어 농지개혁은 비로소 그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농림부는 공포된 법률에 따라 농지개혁을 연내에 실시하려고 소요경비의 재원조달을 강구하는 한편, 농지개혁을 실시하기 위한 전국적인 농지실태조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예산조처의 원활한 해결을 보지 못하여 그 실시가 1년간 연장되었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그 사이 이 법의 불합리한 점을 개정하고자 국회산업노동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1949년 10월 25일 개정안이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이 개정안의 주요 골자는 지가보상(地價補償)과 상환액을 평균 수확고의 2.4배로 인상하여 통일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회 본회의는 정부측의 의도에 따라 1.5배로 낮추어 결정하는 한편, 지주에게는 지가증권(地價證券)을 발급하여 이를 기업에 투자토록 하여, 지주들도 일반 산업에 참여할 수 있게 하고, 동시에 농공병진(農工倂進)의 실을 거두도록 하자는 내용이었다.
이 개정법률안은 국회를 통과하여 1950년 3월 10일 공포되면서, 농지개혁 실시를 위한 입법조처가 완전하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농지개혁법〉의 개요를 보면, 전문 6장 29조로 되어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정부가 사들이는 대상농지는 농가 아닌 자의 농지, 자경(自耕)하지 않는 자의 농지, 호당 3㏊(당시는 ‘3町步’라 하였음) 이상을 초과하는 부분의 농지, 다년생식물 3㏊ 이상을 자영하는 자가 소유하고 있는 다년생식물 재배 이외의 농지 등을 정부의 매수대상농지로 하였다.
여기서 호당 3㏊를 초과하는 농지를 매수대상으로 한 것은 3㏊를 경작 상한선으로 본 것이고, 이는 역우(役牛)를 포함한 5인 가족의 노동력을 참작하여 3㏊를 가경한계(可耕限界)로 본 것이다.
② 매수대상에서 제외되는 농지는 호당 3㏊ 이내의 자경 또는 자영농지, 다년생식물 재배의 자영농지, 비농가가 가정원예용농지로 경작하는 500평 이내의 농지, 정부 및 공공단체의 소유농지, 공인된 학교와 종교단체 및 후생기관의 자경농지, 학술연구 등 특수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농지, 분묘 1기당 0.2㏊(600평) 이내의 농지, 미완성된 개간 및 간척농지, 이 법 실시 이후의 개간 또는 간척농지들이었다.
③ 매수농지의 평가기준은 농가가 매수한 농지의 지가, 곧 농민이 상환해야 할 보상액의 평가는 해당 농지 주생산물의 평년작의 1.5배로 정하되, 다년생식물을 재배하는 농지는 시가에 따라 별도로 사정하고, 개간·간척 및 특수사용지는 특별보상액을 첨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④ 농지의 분배대상농가는 현재 당해 농지를 경작하는 농가, 경작능력에 비하여 과소한 농지를 경작하는 농가, 농업경영에 경험을 가진 순국열사의 유가족, 영농능력을 가진 피고용농가, 국외에서 귀환한 농가 등으로 되어 있다.
⑤ 매수농지의 지가보상에서는 지주에 대한 지가보상은 5년간 균분상환으로 하되, 지주가 기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지가증권을 발급하였다. 다만 증권의 액면은 보상액을 환산한 당해농지의 당해연도 주생산물의 수량으로 표시하였다.
⑥ 분배농지의 지가상환에 있어서 상환액은 당해 농지의 보상액과 같게 하되, 원칙적으로 5년간 균분연부(均分年賦)로 할 것이나 일시불이나 상환기간 연장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⑦ 분배농지의 보존 및 관리는 분배농지에 대해서는 상환이 완료될 때까지 매매·증여 기타 소유권의 처분, 저당권·지상권·선취득권·담보권의 설정 등을 금하였다.
그리고 상환을 완료하지 않은 수배농가가 폐농·전업·이농함에 따라 농지의 전부 혹은 일부를 반환할 때에는 기상환액의 전액 또는 일부를 농가에 반환하며, 수배농가가 농지개량시설을 직접 하였을 경우에는 그 금액도 정부가 보상케 하며 농민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제2차 농지개혁의 실시는 〈농지개혁법시행령〉 및 이 시행규칙이 공포될 무렵인 1949년 6월 21일에 집계된 총 매수대상면적은 60만1000㏊로, 총 경지면적의 27%에 달했으며, 귀속농지 29만1000㏊를 포함한 총 분배예정면적은 89만2000㏊에 이르러, 총 경지면적 222만6000㏊의 40%에 달했다.
한편 〈농지개혁법〉의 실시와 더불어 귀속농지도 예외 없이 이 법의 테두리 안에 포함되어 지가 등 기타 조건이 변경되었다. 즉, 귀속농지의 지가는 연간생산량의 3배이던 것이 1.5배로, 상환기간 15년이 5년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농지개혁이 구체적인 실시단계에 들어갈 무렵 불행하게도 6·25전쟁이 일어나 전화를 모면한 경상남도 일대를 제외한 전국이 농지개혁 실시를 부득이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9·28서울수복과 더불어 농지개혁 관계서류의 소실 및 분실 등의 애로가 중첩되었음에도 농민의 오랜 숙원이던 농지개혁사업은 다시 착수하게 되었다.
어려움을 무릅쓰고 농지개혁을 단행하게 된 이유는, 첫째로 전란으로 가중된 재정상의 핍박을 덜기 위하여 귀속기업체(일본인 소유의 기업체)와 귀속농지를 불하(분배)하여 국고수입을 늘이는 한편, 종래의 지주들에게는 지가증권으로 불하되는 기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地主轉業).
둘째로, 환수되는 지가상환미(地價償還米)를 부족되는 군량미로 활용하고자 함이었다. 그리하여 1950년 가을부터 분배농지의 상환곡은 전국에 걸쳐 수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지주들은 농지개혁시기를 전후한 때의 혼란과 입법 시작부터 개혁 착수까지의 경과된 기간 및 관계 법규 등의 허점들을 교묘히 악용하거나 위반하여 분배농지를 임의처분 또는 은닉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따라서 제2차농지개혁의 결과 한국인 지주 소유농지 32만2000㏊만이(수복지구 포함) 91만8548호에 분배되었고, 지가보상은 정조(正租:벼) 1158만7959석이었다.
따라서 분배농지의 합계는 귀속농지 29만1000㏊와 한국인 소유농지 32만2000㏊를 합해서 모두 61만3000㏊에 이르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 소작지 144만7000㏊의 42.4%에 해당하는 61만3000㏊만이 〈농지개혁법〉에 따라서 분배된 셈이며, 나머지 57.6%인 83만4000㏊는 지주들이 자경(自耕)·임의처분·은닉 등을 통하여 개혁대상에서 제외된 셈이다.
수복지구의 농지개혁은 1953년 7월 휴전이 되면서 남한에 귀속된 38선 이북지역의 수복지구에 대한 농지처리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를 위해 정부는 1958년 4월 10일 ‘수복지구에 대한 농지개혁법시행에 관한 특례’에 바탕을 두고 농림수산부가 ‘수복지구농지개혁사무처리요강’을 작성하고 4월 20일부터는 이 지역의 농지개혁에 착수하였다.
수복지구에 대한 농지개혁의 골자를 보면, 첫째 1956년 12월 1일 현재의 지주와 농가를 상대로 농지를 매수, 분배하고, 둘째 보상과 상환은 1958년 하곡부터 실시하며, 셋째 지가와 상환기간 및 기타사항은 1950년의 〈농지개혁법〉에 준하도록 되어 있다.
이리하여 수복지구 농지개혁에 의해 분배된 농지면적은 일반 농지 2,880㏊(전답) 귀속농지 903㏊(전답) 합계 3,783㏊에 달하였으며, 이를 8,254호의 농가에 분배하였다.
농지개혁 자체는 당초 목적한 대로의 성과는 올리지 못하였다. 귀속농지를 포함하여 8·15광복 당시의 소작면적 144만7000㏊의 42.4%(61만3000㏊)만 〈농지개혁법〉의 정하는 바에 따라 개혁이 되었고, 나머지 83만4000㏊(은폐소작지 15만8000㏊)는 〈농지개혁법〉의 테두리를 벗어났다.
범위를 더욱 축소하여 1949년 6월, 농지개혁의 실시 직전에 조사된 한국인 지주 소유농지 60만1000㏊(제2차개혁대상)마저도 실제 〈농지개혁법〉에 따라 분배된 것은 54%인 32만2000㏊만이 분배되었다.
그나마 이 수치는 수복지구의 3,783㏊가 포함된 수치이다. 이렇게 볼 때 당초 목적했던 것의 약 절반 가량의 실적밖에 올리지 못한 농지개혁은 결코 성공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농지개혁에서 벗어난 소작농지의 궁극적 귀속을 고찰할 때 농지개혁이 실패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농지개혁 직후 은폐소작지로 남아 있던 면적은 15만8000㏊로 8·15광복 당시 전체 소작지면적 144만7000㏊의 11%에 불과하고, 전농지의 8%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농지개혁으로 분배되지도 않고 은폐소작지로 남아 있지도 않았던 67만7000㏊의 행방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 면적은 결국 농민 소유로 돌아가 자작지화(自作地化)되었다. 그것은 농지개혁의 절차에 따라 분배되지는 않았지만, 지주와 소작인간의 합의에 따라 농지개혁에서 정한 지가수준(地價水準)이나 상환조건에 준해서 직접 양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소작인은 농지개혁에 의해서 분배받거나 지주와의 직접거래에서 양도받거나 큰 이해득실이 없으나, 지주들에게는 매우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즉, 불확실한 지가증권보다는 오랜 거래로 믿을 수 있는 소작인으로부터 비록 연부 상환이기는 하나 확실한 현물을 지가로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에 따라 분배농지로 상환되는 지가는 현물로 상환받은 것이 아니고 현물을 환가(換價)한 현금으로 상환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인플레이션이 심했던 당시로서는 상환받은 현금으로 다시 그만한 현물을 구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작인과 직거래 양도의 경우 11월에 현물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법에 따른 분배농지의 경우 나라 재정상 잘해야 이듬해 5월에 현금을 받거나 연불되는 수가 많았다. 따라서 지가증권의 거래는 액면가의 반값으로 거래되는 수가 허다하였다.
전체 소작지가 이와 같이 농지개혁이나 또는 이에 준하는 조건으로 모두가 자작지화 된 것은 아니었다. 법제정 이전에 매매된 일부 농지는 농지개혁에 따른 조건보다는 높은 값으로 소작인에게 양도되었다.
바로 그 점을 노린 것이 한민당계 지주 출신 국회의원들의 의도적인 입법연기활동이었다. 전반적으로 보아 법 제정 이후의 농지개혁은 비록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절반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의 파급효과로 나머지 소작지도 사실상 농지개혁에 준하는 조건으로 양도되었음을 볼 때, 농지개혁은 일단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농촌사회의 소작을 둘러싼 사회적 마찰을 해소하고 사회적·정치적 안정과 농촌의 민주화를 가져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자작농이 시작되면서 농업생산력 증대의 복합 요인으로 농지개혁에 의한 효과를 따로 떼어 말할 수는 없으나, 증산적 방향으로 유도되었던 것은 틀림없다.
다만 농지개혁이 겨냥했던 지가보상을 받은 지주들의 일반 기업에의 참여는 지가 상환시기와 인플레이션 등으로 얼마나 그 효과를 거두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농지개혁 후 자작농육성책이나 농지제도의 사후관리를 규정하는 제도 미비, 도시화·산업화에 따른 농민의 농촌이탈 등 여러 가지의 요인이 겹쳐, 1997년 말 현재 전체 농지의 192만4000㏊의 43.5%인 83만 7000㏊가 다시 임차지(소작지)로 되돌아가, 농업정책의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