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전은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 국가나 왕실의 소유지이거나 수조지(收租地)였던 토지이다. 고려시대에 공전의 종류는 내장전(內莊田), 장처전(莊處田), 공해전(公廨田), 둔전(屯田), 학전(學田), 적전(籍田) 등이 있었는데, 1과 · 2과 · 3과 공전으로 나누어졌다. 1과 공전은 국가나 왕실 소유지, 2과 공전은 공공기관 소속의 공해전, 3과 공전은 일반 민전(民田)을 가리킨다. 고려 말 사전혁파를 실행에 옮겨 탄생한 조선왕조에서는 과전법(科田法)을 제정하여 외방(外方)의 사전을 공전화(公田化)하여 국가 수조지로 만들었다.
고려시대에 공전(公田)은 기본적으로 국가 소유지이거나 국가 수조지(收租地)를 가리킨다. 그러나 공전을 바라보는 시각과 입장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전근대 사회의 토지에 대한 관념은 왕토사상(王土思想)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연하게 국가의 토지인 것처럼 분석되어 있다.
고려의 공전은 신라 이래 공전의 개념을 계승하면서 고려 사회의 역사발전에 상응하여 개념화되었다. 신라의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에 의하면 숭복사(崇福寺)를 창건하면서 “비록 왕토(王土)라 하더라도 공전이 아니므로 좋은 값으로 구한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공전은 사사로이 매매할 수 없음을 의미하고 있으며, 그 의미 속에 공전은 국가나 왕실 소유지로서 매매의 대상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다.
고려 왕조에 이르러 공전과 관련한 대표적인 사료인 『 고려사』 권80, 식화(食貨)3, 상평의창(常平義倉)조 현종 14년 윤 9월 의창(義倉)의 법에 의하면 “무릇 여러 주현(州縣)에 있는 의창의 법은 도전정수(都田丁數)를 사용하여 거두어들이는데, 1과 공전은 1 결(結)에 조(租) 3두, 2과 및 궁원전(宮院田) · 사원전(寺院田) · 양반전(兩班田)은 조 2두, 3과 및 군인호정(軍人戶丁)과 기인호정(其人戶丁)은 조 1두로 이미 정해진 규정이 있다. 흉년을 당하여 백성(百姓)들이 굶주리게 되면 이것으로써 급한 것을 구제하게 하고 가을에 반환하게 하여 함부로 낭비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 규정에 따르면 고려의 공전은 1과, 2과, 3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공전의 종류에 따라 의창조를 달리 거두어들였다. 이와 관련한 근래의 연구에 의하면 1과 공전은 국가나 왕실 소유지, 2과 공전은 관청의 경비를 충당하는 공해전(公廨田), 3과 공전은 일반민의 소유지인 민전으로 보고 있다. 고려시대에 공전을 3종류로 나눈 것은 신라 이래 공전의 개념이 분화하여 본질적 성격에 따라 구분되기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 종류에 따라 국가가 필요로 하는 조세 수취를 차별화한 것이다.
공전의 개념에는 왕토 이념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으나, 나말여초 농업 생산력의 발전에 상응하여 민전의 개념이 등장함으로써 토지에 대한 경작자의 권리는 강화되어 갔다. 그러나 현종 대의 의창조 규정에서 일반민의 소유지인 민전을 3과 공전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민전에 대한 왕토 이념이 투영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공전의 분화는 이러한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고려의 토지는 기본적으로 공전과 사전으로 나눌 수 있다. 공전과 사전에 대한 이해 방식은 고려시대의 토지제도를 토지 국유제로 보느냐 토지 사유제로 보느냐에 따라 공 · 사전의 개념도 달라진다. 고려의 토지제도를 토지 국유제로 보는 입장은 일제시기의 식민사학자들과 유물사관에 입각한 사회경제사학자들이다.
대표적인 식민사학자는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 와다 이치로〔和田一郞〕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려의 토지는 모두 국유이며, 백성들은 토지의 경작권 또는 이용권을 가지고 있는 데 불과하다고 본다.
일본 학자들 가운데 토지 국유론을 보다 더 심화시켜 토지 소유의 질적 분할론을 제기한 후카야 도시데츠〔深谷敏鐵〕가 있다. 그는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국가의 관리 처분권, 전주(田主)의 수조권(收租權), 농민의 경작권으로 나누고 이 가운데 국가의 관리 처분권이 모든 권리에 우선된다고 하였다. 공전으로 표기된 모든 토지는 국가의 관리 처분권이 우선된 국유지로 파악하였다.
유물사관에 입각한 사회경제사학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백남운이다. 그의 저서 『조선봉건사회경제사(상)』(개조사, 1937)에서 고려시대의 사회경제사를 다루면서 고려시대를 서구 사회의 역사 발전에 비추어 아시아적 봉건사회라고 파악하였다. 아시아적 봉건사회의 중요한 특징은 봉건국가가 최고의 지주이며 '조세= 지대'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토지 국유제 사회라고 보았다. 즉 국가가 거두는 조세는 남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는 경작자가 토지 소유주에게 내는 지대에 비견된다고 본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을 극복하고 한국 사회의 보편적 발전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의해 토지 사유론이 제기되었다. 이 입장에 따르면 한국은 고대사회 이후 토지의 사적 소유가 확대 발전하면서 통일신라 이후 토지의 사유화가 보다 확대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에 대표적인 학자는 김용섭, 이성무 등이다. 이들의 입장에서 바라본 공전은 국가 소유지이거나 일반 농민층 소유의 민전을 국가는 공전으로 파악한다고 보았다.
1023년(현종 14)에 의창의 법에 따른다면 1과 공전은 국가 소유지 또는 왕실 소유지로서 이들 토지를 경작할 때 경작자는 국가에 대해 992년(성종 11) 판에서 규정한 공전조 1/4을 내는 것으로 본다. 2과 공전은 관청 소속의 공해전을 지칭한다고 보며 공해전의 경작자 역시 1/4조를 낸다고 보는 편이다. 그러나 민전은 일반농민층의 소유지로서 국가에 대해 1/10조를 낸다고 파악한다.
공전의 용례와 관련하여 『고려사』 권78, 식화1, 전제(田制) 경리(經理)조 현종 13년 2월에 “사주(泗州)는 바로 제왕의 고향인데, 이전에 민전을 삭감하여 궁장(宮莊)에 소속시켰으므로 민이 세의 징수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으니, 바라옵건대 주(州)의 경내에서 공전을 살펴 헤아려 그 수만큼 보상하십시오.”라는 기록이 있다. 사주 지역의 민전을 줄여 궁장에 소속시켜 백성들이 세금을 감당하지 못하니 공전으로 보상해 주라는 내용이다. 삭감된 민전 수만큼 공전으로 보상하라고 하였을 때 공전은 사주의 관아나 중앙정부의 소유지로서 국가의 토지라고 보는 편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1058년(문종 12)에 경창원(景昌院) 소속의 전시(田柴)를 흥왕사(興王寺)에 이속한 것을 두고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서 문제를 제기하자 공전을 경창원에 지급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고려사』 권8, 문종 12년 7월 을묘). 경창원의 궁원전을 흥왕사의 사원전으로 이속시키자 공전을 경창원에 지급하도록 한 조처에서 공전은 국가 소유의 토지였을 것이다.
앞선 사주의 사례와 경창원의 사례에서 민전이 궁장에 소속되거나 궁원전을 사원전으로 전환하는 데 따른 보상 조치로 공전을 활용하는 것은 국가의 필요에서 공전이 민전으로 또는 궁원전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때의 공전은 국가가 소유하던 국유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공전의 종류로는 내장전(內莊田), 장처전(莊處田), 공해전, 둔전(屯田), 학전(學田), 적전(籍田) 등이 있다.
내장전은 내장(內莊), 곧 왕실에 소속된 장(莊)의 토지이다. 1010년(현종 1)에 효은태자(孝隱太子)의 아들 왕림(王琳)과 왕정(王禎)을 종실에 편입시키고 작위와 함께 ‘전장(田莊)’을 지급한 사례와 1029년(현종 20)에 개경 나성(羅城) 축조에 공이 컸던 왕가도(王可道)에게 사성(賜姓)과 함께 지급한 ‘장전(庄田)’ 등이 내장전의 예로 이해되고 있다. 1205년(희종 1)에 최충헌(崔忠獻)에게 내장전 100결을 하사한 사례도 있다.
장전은 태봉(泰封)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왕실 소유지로서 그 경작민인 장호(莊戶)는 전조와 요역(徭役)을 왕실이나 궁원에 납부하였던 예속민적 존재로 본다. 처전(處田)의 생성 과정이 장전과 다소 다르며, 왕실이 개간을 통해 처전을 확보하였다는 견해가 있다(안병우). 처전의 경작자인 처간(處干)은 장호에 비해 요역을 부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왕실에 대한 예속성이 장호에 비해 약했을 것으로 보며, 『고려사』 권28, 충렬왕 4년 7월의 기록에 따르면 "처간은 남의 토지를 경작하고, 조(租)는 주인에게 돌리고, 용(庸)과 조(調)는 관에 납부하는 자로, 곧 전호(佃戶)이다"라고 하였듯이 처간은 처전의 경작자로서 왕실과 경제적 관계로 맺어진 공전 경작자로 볼 수 있다.
장처전은 왕실소유지이기는 하나 장호와 처간의 점유지로서 왕실이 일방적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며 장호와 처간이 왕실에 납부하는 전조율은 대체로 1/4로 보고 있다. 장처전은 왕실에 소속되었으며, 민전조 1/10에 비해 과중한 1/4을 부담했던 것으로 본다(안병우).
이와는 달리 장처전의 전조(田租)와 관련하여 장호는 농노적 지대와 공부(貢賦) 및 부정기적 요역을 부담하였다는 견해(백남운), 1/10세를 부담하고 부가역을 담당하였다는 견해(박종기), 지대와 지세의 중간적 성격의 조세를 납부하였다는 견해(박종진), 장전은 민전이고 처전은 왕실 소유의 직역지로서 1/2지대를 납부하였다는 견해(이상선)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공해전은 중앙의 각사와 지방의 관아와 읍사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국가가 분급한 토지이다. 아울러 내장택, 궁원, 사원에도 공해전을 지급하였다. 중앙 각사의 공해전 지급 실태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최하 15결에서 20결을 지급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각사에 따라 편차가 컸을 것으로 본다(안병우). 지전(紙田) 혹은 공지호(供紙戶)와 함께 지급되었을 것이다.
지방 관아의 경우 지방관 파견의 유무와 관계없이 속군현과 향 · 부곡 등 특수 행정구역에도 지급하였다. 『고려사』 권78, 식화1, 공해전시(公廨田柴)조에 의하면 983년(성종 2) 6월에 주부군현(州府郡縣)과 관(館) · 역(驛)의 전(田)을 정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공해전의 지급 기준은 정수(丁數)에 따라 군현의 등급을 나누고 공수전(公須田)과 지전(紙田), 장전(長田) 등을 차등적으로 지급하였다.
여기서 정수는 각 군현의 읍격을 나타내는 기준으로, 정(丁)을 단순히 인정(人丁)으로 보는 견해(浜中昇), 전정(田丁)으로 보는 견해(노명호), 호(戶)로 보는 견해(김기섭, 안병우)로 나누어져 있다. 최근에는 정이 단순한 인정이나 전정이 아니라 인정과 토지가 결합된 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로 모아지는 편이다. 그러나 정이 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백정호(白丁戶)를 포함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의견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김기섭).
둔전은 군수용과 관수용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국가가 소유하고 경작하는 국유지로서 민전과는 성격이 다른 공전이었다. 원래 신개척지에 군대가 주둔하면서 설치되었으며, 방수군(防戍軍)이나 주진군(州鎭軍)을 동원하여 경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경우 둔전에서 거둔 곡식은 군수에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군인이 부족하거나 둔전의 면적이 넓을 경우 한민(閑民)을 동원하여 경작하였는데, 양계(兩界)의 둔전 경작에 동원된 한민은 대체로 사민된 주진민(州鎭民)으로서 둔전군으로 불렸다. 사민된 한민들은 지급된 자신의 보유지를 경작하면서 둔전 경작에 종사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이때 이들은 공전조율 1/4조를 부담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안병우).
관수용으로 활용된 관둔전(官屯田)과 관련하여 『고려사』 권79, 식화2, 농상(農桑)조 1099년(숙종 4)에 주부군현이 각각 둔전 5결을 경작하도록 허용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지방 관아의 경비로 공해전이 지급되었지만, 둔전의 경영이 추가로 허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관둔전의 허용은 지방 관아의 경비 부족과 경작자 부족으로 인한 공해전 운영의 한계 때문이라고 보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지방 관아로 하여금 개간을 통한 관둔전의 경영을 허용하였다.
문종 대 이후 토지의 개간이 점차 확대되어가는 가운데 일반 농민이나 부호층뿐 아니라 지방관의 주도로 지방 관아의 개간도 이루어졌다. 지방관은 관아 보유의 노동력을 활용하여 개간에 참여함으로써 관아의 소유지를 확대하여 관비를 보충할 수 있는 재원으로서 활용하였다. 이를 통해 수입 증대를 꾀함으로써 지방재정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중앙재정에도 일정하게 기여할 수 있었다.
학전은 992년(성종 11)에 국자감(國子監)이 만들어지고 서재와 학사가 운영되는 가운데 학교 운영에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하여 전장을 지급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본다. 전장은 국공유지의 일부였을 것으로 보이며, 이를 학전으로 삼아 학교 운영에 사용하였을 것이다. 학전 운영은 공해전의 운영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학전의 경작자는 공전조율 1/4조를 부담하였을 것이다.
적전은 국왕이 직접 적전을 경작하여 그 수확으로 신농(神農)과 후직(后稷)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한 토지이다. 983년(성종 2) 정월에 왕이 직접 적전을 경작하여 신농과 후직에게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으며, 1145년(인종 23) 정월에도 왕의 적전 경작 사례가 확인된다. 그러나 이는 형식적인 의례일 것이며, 실질적인 적전 경작은 왕궁의 노비를 이용하거나, 일반 농민을 전호 농민으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경작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이 경우에도 공전조율을 적용하여 1/4조를 수취하였을 것이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토지 침탈과 겸병 현상이 심화되는 가운데 사전 문제가 중요한 정치 현안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에 사전의 폐단을 해결하려는 개혁 과정에서 정치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은 사전 혁파를 주장하는 정도전(鄭道傳), 조준(趙浚) 등의 사전혁파론자와 사전의 가장 큰 폐단이었던 일전다주(一田多主)의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는 이색(李穡) 등 사전개선론자의 대립으로 귀결되었다. 결국 사전혁파론자들의 정치적 승리로 사전 혁파의 수순을 밟게 되면서 마침내 과전법(科田法)이 제정되기에 이른다.
과전법에서는 외방의 사전을 혁파하고 경기 사전의 원칙을 확립하였다. 즉 외방에 있었던 사전을 공전화하여 국가 수조지로 만들어서 국가의 재정을 보다 튼튼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고려사』 권78, 식화1, 전제 조준의 1차 상서(上書)에서는 “작정을 할 때 공전과 사전을 모두 없애고 20결, 15결, 10결로 한다. (중략) 공전과 사전의 수조는 1결당 20두로 하여 민생을 두터이 한다.”라고 하여 공전과 사전의 수조율을 결당 20두로 통일하고자 하였다. 이는 전시과가 시행되던 당시 공전조 ‘사분취일(四分取一)’에서 매우 경감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사실상 공전과 사전의 구분이 무의미해졌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과전법이 제정되고 과전법 체제 아래에서 공전의 수조율은 1/10조로 귀착되는데, 외방의 민전은 국가 수조지로서 1/10조를 부담하였으며, 특히 농민의 소유지 위에 설정된 과전의 경우에는 농민들이 1/10조에 해당하는 결당 2석(30두)를 내도록 하였다. 과전법 체제 아래에서 경기사전(京畿私田)의 원칙에 따르면 경기도에 설정되었던 양반 과전은 기본적으로 사전의 범주에 들지만, 외방에는 모두 공전으로 인식되어 국가 수조지로 재편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크게 보면 국가 수조지는 공전, 양반 관료를 비롯한 개인 수조지는 사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전법에서 공 · 사전의 개념은 사유지의 일반화를 전제로 성립된 것이다. 과전법에서는 능침전(陵寢田) · 창고전(倉庫田) · 궁사전(宮司田) · 공해전 · 공신전(功臣田) · 사사전(寺社田)은 무세지(無稅地)이며, 과전 · 군전(軍田) · 외역전(外役田) · 진역원관전(津驛院館田) · 지장전(紙匠田)은 유세지(有稅地)였다. 1402년(태종 2) 2월부터 사사전 · 공신전이 유세지로 변하면서 무세지는 공전, 유세지는 사전이 되었다(이성무).
『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전(戶典) 제전(諸田)조에 따르면 관둔전 · 마전(馬田) · 원전(院田) 등은 자경무세(自耕無稅), 국행수륙전(國行水陸田) · 내수사전(內需司田) 등은 무세(無稅), 사전(寺田) · 아록전(衙祿田) · 공수전 등은 각자수세(各自收稅)를 하도록 규정하였다.
이처럼 여러 토지 지목 가운데 제전조에 제시된 토지 지목의 경우, 자경무세지는 관유지로서 해당 직역자들이 직접 경작하되 세가 없는 토지이고, 무세지는 왕실 직속지로서 궁실의 노비를 시켜 경작하되 세금이 없는 토지이며, 각자수세지는 일반 민전을 수조지로 절급하여 수조하되 세가 없는 토지이다. 따라서 공전은 관유지를 의미하며 민전은 민유지를 의미한다.
민전의 개념은 조선시대에도 사용되었는데 민전은 조 · 용 · 조를 부담하는 민유지이며, 양반에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소유할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민전이 국가 수조지일 때는 공전, 개인 수조지일 때는 사전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사전은 점차 축소되어 갔으며 과전법에서 직전법(職田法)으로, 다시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거쳐서 마침내 직전을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직전제가 시행되기 전에도 3품 이하 관원의 과전은 직전으로 운영되었으며, 과전법에서 직전제로의 변화는 대신의 과전에 대한 개혁으로 대신의 유족이 받는 수신전(守信田)과 휼양전(恤養田)을 폐지하고 치사(致仕)한 대신이 보유하던 과전을 회수하는 조처였다는 견해도 있다(최이돈).
개인에게 수조권이 분급된 국가적 토지분급제는 과전법을 끝으로 한국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것은 농민의 토지소유권이 성장하여 소유권을 기반으로 한 조선왕조의 조세체계가 확립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