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역전(外役田)이라는 명칭은 1388년(우왕 14) 7월 조준(趙浚)의 전제개혁(田制改革) 상서(上書)에 처음 나타난다. 조준은 군·현(郡縣) 및 향(鄕)·소(所)·부곡(部曲)·장(莊)·처(處) 등의 향리와 원·관(院館)의 직(直)에게 이전의 관례대로 구분전(口分田)을 지급하자고 하면서, 이를 외역전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외역전은 엄밀히 말해 향리뿐만 아니라 진척(津尺), 역자(驛子) 등에게 지급한 구분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외역전의 수급대상이 대부분 향리였으므로 외역전은 곧 향리전(鄕吏田)·읍리전(邑吏田)으로 취급되었다.
고려시대의 향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토지를 받을 수 있었다. 향리 가운데 최고위직이었던 호장(戶長)은 직전(職田)을 받았으며, 퇴직한 안일호장(安逸戶長)은 그 반을 받았다. 또 향리는 향직(鄕職)이나 무산계(武散階)를 받는 경우 전시과(田柴科)의 규정에 따라 토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부호장(副戶長) 이하의 향리들이 토지를 받은 기록은 없다. 관아에 지급한 공해전시(公廨田柴)의 일부인 장전(長田)을 향리의 직무와 관련된 토지로 이해하기도 하며, 고려 후기에 하급 향리에게도 외역전을 지급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고려말 조선 초기에 시행된 과전법(科田法)체제에서는 고을마다 인리전(人吏田)을 두었다. 특히 향리에게는 세위전(稅位田)으로 논 2결(結)과 구분전으로 밭 3결을 배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