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에서는 왕의 비빈(妃嬪)과 왕족들이 거주하는 궁전을 궁(宮)과 원(院)으로 불렀다. 궁원에는 건물을 관리하는 직원 및 토지와 노비 등이 부속되어 있었는데, 이 가운데 궁과 원에 속한 토지를 궁원전이라고 한다.
궁원전에는 성격이 다른 2종류의 토지가 있었다. 하나는 궁원을 운영하기 위하여 지급한 공해전(公廨田)과 같은 공전(公田)으로 『고려사』 식화지(食貨志) 전제(田制) 서문에 보이는 '궁원공해전(宮院公廨田)'이 이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궁원이 본래 소유하였거나 국가나 왕실로부터 지급받은 사전(私田)이다. 『고려사』 식화지 상평의창조(常平義倉條)에 양반전(兩班田), 사원전(寺院田)과 함께 궁원전이 열거된 것이나 궁원 소속의 전시(田柴)를 사원에 시납하는 사례는 궁원전의 사유지로서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밖에 궁원에는 장처전(莊處田)도 지급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궁원의 사유지로 보는 견해와 사유지 위에 설정된 수조지로 보는 견해로 나뉜다.
한편 궁원전은 기본적으로 국유지였으며 다만 그 조세가 궁원에 귀속된다는 의미에서 사전이라고 불렀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최근에는 궁원에 장처전을 지급한 목적에 대해서 고대의 봉토(封土), 봉읍(封邑)의 정신을 잇는 것으로 왕족을 일반 신료와 구별하여 우대하기 위한 조처의 일환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처럼 궁원전은 사유지와 수조지 등 다양한 성격을 가진 토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수조지에서는 조세를 통해 재정을 확보하였으며, 사유지에서는 궁원 스스로가 독립된 경영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예종 대 기록을 보면 지방관이 궁원전을 경작할 전호(佃戶)를 차정하기도 하였는데, 군현제(郡縣制)를 통해서 궁원의 수조지가 운영되었음을 보여준다.
궁원전은 다른 사유지와 마찬가지로 세습이 허용되어 궁주(宮主)나 원주(院主)가 사망하면 후손에게 전해졌으며, 후손이 없더라도 궁원 사이에 이속되면서 왕실의 재정 기반으로 기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