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음전시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 고려 왕조에서 공음이 있는 관료를 대우하기 위하여 지급된 특별한 토지 분급제.
이칭
약칭
공음전
이칭
영업전
제도/법령·제도
제정 시기
고려 전기
시행 시기
고려시대
폐지 시기
1391년(공양왕 3)
시행처
고려 왕조
주관 부서
고려 호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공음전시는 고려시대, 고려 왕조에서 공음이 있는 관료를 대우하기 위하여 지급된 특별한 토지 분급제이다. 시초는 977년(경종 2)의 훈전(勳田)이며, 이후 1049년(문종 3)에 이르러 정식으로 양반공음전시법이 정해졌다. 공음전은 자손에게 상속할 수 있는 토지로서 고려 사회의 성격 규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의
고려시대, 고려 왕조에서 공음이 있는 관료를 대우하기 위하여 지급된 특별한 토지 분급제.
제정 목적

양반 관료 가운데 국가에 특별한 공훈을 세운 자들에게 보상하려는 목적으로 전지와 시지를 지급하는 공음전시법이 만들어졌다. 다만 공음전시를 받는 대상자의 범위와 공훈의 의미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내용

공음전시는 『 고려사』 식화지 공음전시조에 따르면 “문종 3년 5월 양반공음전시법을 제정하였다.”라고 되어 있어 1049년(문종 3)에 정해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공음전시조를 살펴보면, 이에 앞서 977년(경종 2)에 개국공신 및 귀순한 성주(城主) 등에게 훈전(勳田)을 지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공음전시의 시원은 977년의 훈전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때 지급된 훈전은 글자 그대로 공훈이 있는 공신들에게 지급한 토지로 생각된다.

이후 1021년(현종 12)에 공음전은 직자(直子)가 죄를 범하면 그 손자에게 옮겨 지급한다는 기록이 있어서 공음전시는 1049년 이전에 이미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문종 3년의 기록은 이전부터 시행해 오던 공음전시법을 정리하여 제도적으로 완비하였다는 의미로 파악된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문종 3년 5월 양반공음전시법을 정하였다. 1품(品)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이상으로 전지(田地) 25결(結), 시지(柴地) 15결, 2품은 참정(叅政) 이상으로 전지 22결, 시지 12결, 3품은 전지 20결, 시지 10결, 4품은 전지 17결, 시지 8결, 5품은 전지 15결, 시지 5결로 자손에게 전수하되 산관(散官)은 5결을 감하며, 악공(樂工)이나 천구(賤口)에서 양인으로 해방되어 관원이 된 자는 모두 받을 수 없다. 공음전을 받은 자의 자손이 사직을 위태롭게 하거나 모반 · 대역에 연좌되거나 잡범공사죄(雜犯公私罪)로 제명된 경우 이외에는 비록 그 아들이 죄가 있더라도 그 손자가 무죄라면 공음전시의 3분의 1을 지급한다."

위의 규정에서 우선 주목할 부분은 공음전시의 수급 대상자이다. 공음전시를 받는 사람은 1품부터 5품까지 규정되어 있다. 여기서 품(品)의 의미가 무엇인지와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 학설이 대립하였다. 하나는 품이 관품이나 품질이 아닌 품종이나 등급이라는 해석이다. 실제로 1품이라고 되어 있는 문하시랑평장사가 관제상 정2품직이라는 점, 악공이나 천인 신분에서 해방된 이를 제외한 관원은 공음전시를 받을 수 있다는 점 등에서 타당한 측면이 있다.

다른 의견은 품이 관품이나 품질이므로 공음전시는 5품 이상의 관료들만 받을 수 있었다는 견해이다. 비록 문하시랑평장사가 정2품이기는 하지만 고려의 관제에는 정1품의 실직이 없으므로 정2품인 평장사급의 관직이 1품의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악공이나 천인 신분에서 풀려나 양인이 된 관원이 5품직에 올랐다고 해도 공음전시만큼은 받을 수 없도록 한 것이 규정의 본뜻이라고 해석하였다. 아울러 고려의 공음전시와 유사한 성격을 갖춘 당(唐)나라의 관인영업전(官人永業田) 수급 대상자도 5품 이상으로 한정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상의 두 가지 학설이 대립하는 가운데 근래에는 점차 전자의 견해가 지지를 받으면서 세부적인 측면에서 보완이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모든 관료를 5등급으로 나누어 그들에게 공음전시를 지급한 것으로 보았는데, 이런 경우 전시과와 같은 일반적인 토지 분급제와 공음전시의 차이가 무엇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후의 연구들은 이러한 점을 인지하고 관료 전체를 대상으로 하되 그중에서 특별한 공로를 세운 자들에게 지급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공음전시와 비교가 되는 당나라의 관인영업전도 수급 대상이 5품 이상으로 한정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처럼 공음전시의 수급 대상과 관련된 견해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가운데, 이후 몇몇 새로운 의견도 제시되었다. 하나는 사료에 보이는 직전(職田)이 곧 공음전시이며, 이는 전시과와 달리 관인의 신분을 보장하기 위한 목적에서 모든 관료에게 지급된 토지라고 해석한 견해이다. 다른 하나는 공음전시가 음서로 처음 관직에 오를 때 받는 토지, 즉 초음직전이라는 견해이다. 이러한 견해는 공음전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의견이므로 널리 수용되지 못한 측면은 있으나 앞으로도 관련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공음전시가 전시과와 차별이 되는 지점은 수급 대상이나 지급 기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주목할 부분은 공음전시가 세습이 된다는 점이다. 전시과는 원칙적으로 관인이 재직하는 동안에만 지급되었으나 공음전시는 자손에게 대대로 상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손이 사직을 위태롭게 하거나 모반과 대역에 연좌되거나, 공사의 여러 죄를 범하여 제명되면 토지를 몰수하였다. 이 외에는 비록 아들이 죄가 있더라도 손자가 죄가 없으면 공음전의 3분의 1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또한 1073년(문종 27)에 이르면 자손이 없으면 사위, 친조카, 양자(養子), 의자(義子)의 순서로 공음전시를 전수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공음전시는 이처럼 공로가 있는 자의 자손에게 상속할 수 있는 토지였기에 흔히 공신전(功臣田)이라고도 불렸다. 공음전시의 성격은 국가에서 분급한 토지였으므로 수조지였다고 생각된다. 세습은 허용되지만 세습의 조건과 세습의 대상을 관에서 파악하여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천사항

공음전시는 개인에게 사유지로서 소유권을 완전히 지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손이 비록 범죄를 저질러도 그것이 모반과 대역죄와 같은 큰 죄가 아니라면 상속할 수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세전성(世傳性)이 강한 토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관리 및 감독이 소홀해지면 언제든 사유지로 변화할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고려 중엽 이후 국가의 관리가 약화되면서 별다른 절차 없이 자유롭게 공음전시를 대대로 전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타인에게 빼앗기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서 몽골과 오랜 전란을 겪은 이후로는 종래의 수조지를 지급하는 방식에서 사패전(賜牌田)을 지급하는 것으로 바뀌면서 공신전의 액수는 더욱 커졌다.

전쟁 이후 황폐해진 토지를 개간하는 조건으로 지급된 사패전은 수조권과 소유권이 중첩된 토지였고, 공신들은 권세를 이용하여 지급액을 초과하여 점유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 문제는 고려 왕조가 사라지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조금씩 정리되어 나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의의 및 평가

일찍이 공음전시는 고려 사회의 귀족제설과 관료제설 등 각각의 입장에서 논의된 바 있다. 귀족제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공음전시의 수급 대상이 5품 이상의 관료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음서제의 경제적 기반이 된다고 보았다. 반면 관료제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5품은 등급이며 전체 관료를 대상으로 지급되었다고 보아 음서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처럼 공음전시는 고려 사회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제도로서, 앞으로도 지속적인 연구 대상이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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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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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田幸男, 「高麗朝における功蔭田柴法の意義」(『仁井田陞博士追悼論文集』 1, 勁草書房,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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