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서 ()

고려시대사
제도
부 · 조(父祖)의 음덕(蔭德)에 따라 그 자손을 관리로 서용하는 제도.
이칭
이칭
문음(門蔭), 공음(功蔭)
내용 요약

음서는 부와 조부의 음덕에 따라 그 자손을 관리로 서용하는 제도이다. 과거가 실력에 의해 관인을 선발하는 제도라면 음서는 가문에 기준을 둔 등용제도이다. 관인지배체제 확립을 지향한 고려 왕조가 관인의 신분을 대대로 계승해주기 위해 마련한 제도이다. 매년 정기적으로 시행된 것은 물론이고 왕실의 특별한 경사나 의례가 있을 때마다 자주 시행되었다. 음서제는 고위신분층에게 유리하도록 운용되었다. 음서 출신자들이 5품 이상의 관에 진급해 다시 자손에게 누대에 걸쳐 음직을 전수하여 문벌을 형성하고 가족을 기반으로 족당 세력을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다.

정의
부 · 조(父祖)의 음덕(蔭德)에 따라 그 자손을 관리로 서용하는 제도.
개설

과거는 실력에 의해 관인(官人)을 선발하는 제도였고, 음서는 가문에 기준을 둔 등용제도였다.

신라골품제도(骨品制度)를 해체시키고 개창된 고려 왕조는 관인지배체제의 확립을 지향하였다. 이에 관인의 신분을 획득한 자에 대해서는 자손대대에 걸쳐 그 신분을 계승해 주려고 하였다.

관직을 갖기 위해서는 과거시험에 합격하거나 그 밖의 다른 특례의 적용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관인의 자손으로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 특례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자가 계속해 나타나자, 이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대책으로 마련된 것이 음서제였다.

연원 및 변천
  1. 연원

음서제와 같은 제도는 이미 신라 이래 국가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자손을 서용한 사례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공신 뿐 아니라 5품 이상 고급관료를 대상으로 한 제도로서 확립되는 것은, 새로운 지배신분층이 이루어지고 귀족적 통치질서가 마련된 고려 성종 때였다.

  1. 유형

음서는 사료상에 나타난 것을 종합하거나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을 묶어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① 서조종묘예(敍祖宗苗裔)와 서공신자손(敍功臣子孫)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음서와 대부(大夫) 이상 관인자손에게 주어지는 좁은 의미의 음서.

② 조종묘예(왕족의 후예)와 공신자손 및 5품 이상의 일반고급관료자손을 대상으로 하는 음서.

③ 문무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을 대상으로 한 문음(門蔭)과 공신자손이나 특별한 공훈이 있는 관리의 자손을 대상으로 시행한 공음(功蔭).

④ 전 · 현직 고급혈족의 정규음서, 특사음서(特賜蔭敍) · 공신자손음서 · 조종묘예음서 등이다.

고려사』 선거지 음서조에 기록된 ②에서 전이자(前二者), 즉 조종묘예와 공신자손은 특별한 예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범위도 내외의 원손까지 미쳐 매우 넓었다. 이에 비해 후자는 자 · 손대(子 · 孫代)에서 그쳤다.

그것도 탁음자(托蔭者)가 3품 이상관일 때에는 수양자(收養子)와 여서(女婿) · 생(甥) · 질(姪) · 제(弟)까지 혜택이 미쳤으나 그 이하관은 자 · 손에 한정되었다. 이처럼 한명의 탁음자가 자 · 손을 비롯해 여서 · 생 · 질 · 제 등에게 음직을 줄 수 있었다.

한편 종래의 주장과 같이, 한 명의 관료가 한 명의 자손에 한해 음서의 혜택을 미쳤다는 이른바 ‘1인1자의 원칙’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수음자(受蔭者)는 여러 명일 수 있었다. 예컨대, 같은 형제라 하더라도 탁음자만 달리하면 2인 이상이 음서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충분히 수긍되는 견해이며, 1인1자의 원칙 자체에 대해 달리 보려는 의견도 있다. 즉, ‘1인1자’란 음서를 시행하는 당해년에 한 명의 관료가 여러 자손들을 한꺼번에 벼슬시킬 수 없다는 뜻의 1자이지 그 관료가 전생애에 1자에 한해 음직을 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1. 시행 빈도

이와 관련해 종래에는 음서는 주1 · 주2와 같은 성질의 것으로서 간헐적으로 제수되었다고 이해해 왔다. 그러나 근자에는 이와 달리 정기적 · 항례적(恒例的)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음직은 군왕의 즉위나 왕태후 · 왕태자의 책봉, 태묘(太廟)에의 친제(親祭) 등 특별한 시기에 주어지기도 했으나 매년 정규적으로 시행되는 것이 보통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료들은 여러 차례 음서의 기회에 접할 수 있었고, 따라서 1인 내지는 그 이상의 자손에게 음직을 주는 혜택을 누렸다.

그 실례가 일반 음서뿐만 아니라, 왕족의 후예나 공신의 자손에 대한 음서에서 다수 찾아짐으로써 입증된다. 이렇게 볼 때 전체 음서 출신자수가 과거 급제자에 비해 월등히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1. 수여 관직

수음자들이 처음으로 받는 관직에 대해서는 『고려사』 선거지 전주(銓注) 음서조 인종 12년(1134) 6월의 판문(判文)에 비교적 자세히 규정되어 있다. 초음직은 실무와 관계없는 산직(散職)인 동정직(同正職)에 초임되며, 동정직은 크게 품관 동정과 이속(吏屬)의 동정직으로 구분되었다.

또한 탁음자가 역임한 관직의 고하에 따라 다시 차등이 주어졌다. 그리고 피음자(被蔭者)의 친족 내 위치에 의해서도 음직에 등차가 나타나고 있다.

한편 다른 사례들을 보면, 초음직으로 실무의 이속직이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권무직(權務職)과 품관 실직을 제수받는 예도 나타나고 있다. 권무직과 품관 실직을 받는 경우는 특혜를 입은 사례로 볼 수 있으나, 고려 후기에는 오히려 그것이 초음직의 주류를 이룬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주목된다.

이와 같은 초음직에서 수음자들은 주로 도필(刀筆 : 문서담당관)의 임무를 띠고 문부(文簿) · 기록을 관리하면서 행정말단에 종사하였다.

음서 출신자들은 가세(家勢) 여하에 따라 처음부터 유리한 조건에서 벼슬길을 시작하였다. 진급에 있어서도 아버지 · 할아버지의 관계 고저(官階高低)와 정치적 배경에 크게 좌우되었다. 더구나 음서제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관도(官途)에의 조기진출에 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명확하게 된다.

음서의 연령은 18세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10세 미만의 경우도 많았고 대략 15세를 전후해 관직에 취임하였다. 아울러 전품음서(轉品蔭敍)라 하여 이미 관직에 나아간 사람에게까지 직급을 올려주는 방식도 그 한 형태로 채택하고 있었다.

의의와 평가

이와 같이 음서제는 고위신분층에게 유리하도록 운용되고 있었고, 음서 출신자들에게는 한직제(限職制)와 같은 제약은 없었다. 한정된 것이지만 현존하는 사료를 조사 · 검토한 결과, 음서 출신자의 대부분이 5품 이상직에 승진하고 있으며, 대략 50∼60%는 재상에 진출하고 있다.

음서 출신자들은 5품 이상관에 진급해 다시 자손에게 누대에 걸쳐 음직을 전수하여 문벌이 형성되고 가족을 기반으로 족당 세력을 구축하였다.

음서는 관인지배층을 형성하고 관직의 계속적인 유지를 위한 조처로 이해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음서제는 단순한 관리등용법으로서 만이 아니라, 고려사회에서 지니는 역사적 의미가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서제는 귀족제하에서의 습관제(襲官制)가 될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은 신분제사회에서의 가업(家業)의 전수제가 아니라, 고관이나 유공자에 대한 국가적인 보은제(報恩制)로서 실업대책적인 성격을 다분히 띠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음서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현재 학계의 의견이 대립되어 활발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그것은 음서의 기능을 높게 평가하는 견해와 낮게 평가하는 주장이다.

전자에 의하면 음서의 존재를 과거의 한계성과 관인체제의 귀족제적 특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관리등용법상 음서제의 기능을 중요시하였다.

또한, 음서제는 중앙귀족 중에서도 상급관직을 누리고 있는 보다 좁은 특권층의 관계 진출을 보장하는 제도로서, 일반적이고 떳떳한 출사로(出仕路)의 하나로 정치 · 사회적 의의를 크게 평가하였다. 나아가 음서제는 지배계층의 형성과 특권을 유지함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준 것으로 파악하였다.

후자의 주장은 근원적인 출사의 길은 과거였으므로 음서는 다만 부족한 문반을 보충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간주하거나, 과거제에 따르는 부차적 내지 종속적인 관계하에서 기능함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음서제는 과거제에 부수적인 것으로 오히려 과거제가 엄존해 있었다는 방증으로 파악하였다. 음서의 해석은 고려사회의 정치적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논거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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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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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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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高麗時代) 관료제(官僚制)에 대한 고찰(考察)」(박창희, 『역사학보(歷史學報)』58, 1973)
「고려귀족사회(高麗貴族社會)의 역사성(歷史性)」(변태섭, 『독서신문(讀書新聞)』, 1972)
「고려조(高麗朝) 음직소고(蔭職小考)」(김의규, 『유홍열박사화갑기념논총』, 1971)
주석
주1

칭찬하고 장려하여 상을 줌.    우리말샘

주2

‘특별 사면’을 줄여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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