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창은 고려 및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구휼기관이다. 고려시대 개경의 의창은 986년(성종 5)에 국초부터 있던 흑창을 확대하여 설치한 것이고 지방 군현의 의창은 현종 때 마련되었다. 식량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는 진제와 가을에 갚을 것을 전제로 하는 진대가 있었다. 진대도 이식 없이 원곡만 돌려주도록 했다. 고려 중기에 국가재정난으로 유명무실해졌다가 고려 말에 부활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아 태종 후반기에 운영되기 시작했고 세종 때 크게 정비되었다. 중종 이후 흉년 때에 의창이 아닌 군자곡을 나눠주면서 의창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구휼제도(救恤制度)는 국가에서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식량과 곡식 종자를 나누어 주어서 빈민들이 굶어 죽는 것을 막거나 농민들의 농업재생산을 돕기 위해서 만든 제도이다. 따라서 구휼제도는 전근대사회에서 명분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의창제도(義倉制度)는 가장 기본적인 구휼제도였다.
고려시대 개경(開京)의 의창은 986년(성종 5) 국초부터 있던 흑창(黑倉)에 미(米) 1만 석(碩)을 더하여 설치되었다. 지방 군현의 의창은 고려의 지방제도가 성립되고, ‘의창조수취규정(義倉租收取規定)’이 정해진 현종 때 마련되었다.
개경의 의창곡은 대창(大倉)에 비축 · 보관되었고, 그 실무는 대창서(大倉署)에서 하였다. 반면 지방 군현의 의창곡은 군현에 있는 창고에 다른 관곡(官穀)과 함께 비축 보관되었고, 그 실무는 각 군현의 수령(守令)과 향리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의창곡을 관리하던 담당 관리나 수령이 마음대로 의창곡을 분급할 수 없었다. 의창곡은 국가의 허락이나 명령이 있은 후에 일정한 절차에 의해서 분급되었다. 이렇게 의창곡 분급의 권한을 국가가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의창곡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점은 조선 초기 의창운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의창곡은 아무 대가없이 무상으로 나누어 주는 경우[진제(賑濟)]와 가을에 갚을 것을 전제로 분급하는 경우가 있었다[진대(賑貸), 환자[還上]]. 무상으로 나누어 줄 때에는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교통의 중심지에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여 죽이나 밥 등 음식물을 나누어주었고, 가을에 갚을 것을 전제로 곡식을 빌려 줄 경우 이식(利息)없이 원곡(元穀)만 되돌려 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고려 중기 이후 국가 재정이 나빠지면서 의창곡 확보가 어려워졌고, 의창곡의 관리와 운영에도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의창은 충렬왕대 이전에 이미 기록에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고려 중기 이후 의창이 없어진 이후에도 국가 차원의 산발적인 구휼 사업은 이어졌지만 몽골과의 전쟁 이후 계속 악화되는 국가의 재정 때문에 큰 효과를 거둘 수 없었고, 오히려 백성들은 국가의 과렴(科斂)과 권세가들의 고리대에 시달리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국가는 지속적으로 정규적인 구휼제도의 부활을 추구하였고, 그 결과 충선왕은 구휼기관으로 개경에 유비창(有備倉)과 전농사(典農司)를 설치하였지만 그 성과는 크지 않았다.
고려말 공민왕 이후 지방관으로 파견된 과거 출신의 관리들에 의해 몇몇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의창이 설치되었다. 그러한 흐름이 점차 중앙으로 파급되어 1391년(공양왕 3) 4월에 개경 5부에 의창이 설치되면서 전국에 의창이 다시 설치되었다. 고려 말기에 부활된 의창은 조선 건국 후 조선 초기 의창제도의 기틀이 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에도 국가 재정의 기반이 되는 자영소농의 생활 안정책으로 구휼제도가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1392년(태조 1) 9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의창운영규정을 마련하여 구휼제도 정비에 관심을 가졌다. 그렇지만 건국 초기의 재정 운영의 어려움 속에서 의창곡의 확보가 어려웠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의창곡을 확보하여 구휼기관으로서의 의창이 확립된 시기는 태종 후반기 이후였다. 특히 1423년(세종 5) 군자곡(軍資穀)을 한꺼번에 의창에 옮겨서 100만석 이상의 의창곡을 확보하면서 구휼기관으로서의 의창의 기틀이 확립되었다.
조선 초기에도 의창곡의 분급은 고려시기와 마찬가지로 무상으로 분급하는 진제와 이식 없이 빌려주는 진대[환상]의 두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졌는데, 후자가 훨씬 많았다. 진대는 농번기에 농민들의 식량과 곡식 종자로 빌려 주었는데, 이것 역시 기본적으로 고려시대와 같았다.
조선 초기 극심한 흉년에는 수백만 명의 굶주린 사람들이 국가의 구휼로 연명하였고, 반 이상의 농민이 국가에서 빌려준 곡식 종자로 농사를 지은 적도 있을 정도로 조선 초기 의창제도는 본래 기능을 하였다. 그렇지만 조선 초기 의창제도 운영의 가장 큰 문제는 의창제도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분급한 의창곡을 제대로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의창곡이 축소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다양한 의창곡 보충책이 제시되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1448년(세종 30) 군자곡을 대규모로 의창곡으로 보충하는 방법이 시행되었지만 이것 역시 세조 초기에 이르러서는 의창곡이 감소하여 보충한 효과가 사라졌다.
한편 세조 때에는 의창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상평창제(常平倉制)나 사창제(社倉制)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역시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세조대 의창곡으로 사창의 원본(元本)을 마련하여 사창제를 시행하였다가 실패한 후 의창곡은 더욱 감소되었다. 이후 의창은 거의 독립성을 잃고 군자창(軍資倉)에 속하는 진대기구로 축소되었고, 명칭도 별창(別倉)으로 바뀌게 되었다.
조선 성종 이후 의창[별창] 운영의 특징은 이전 시기와 달리 의창곡을 수령 마음대로 분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분급한 곡식을 거두어 들일 때 잉여곡을 수납하여 지방재정에 충당하였다. 이후 의창[별창] 곡은 계속 감소되었지만 국가에서 더 이상 특별한 보충책을 실시하지 않으면서 중종 이후에는 의창[별창]이 사라진 군현들도 나타났게 되면서 의창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흉년에는 의창이 아니라 군자곡을 분급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