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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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조선 시대 권농책으로 국왕이 농경의 시범을 보이기 위해 의례용(儀禮用)으로 설정한 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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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 조선 시대 권농책으로 국왕이 농경의 시범을 보이기 위해 의례용(儀禮用)으로 설정한 토지.
내용

『고려사』에 의하면 983년(성종 2) 국왕이 친경(親耕)하는 의례를 시작했고, 인종 때에도 이를 실시한 기록이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태종 때 옛 서울 개성의 보정문(保定門) 밖에 서적전(西籍田) 약 300결(結)을 설치하였다.

이는 고려 말의 권신 임견미(林堅味) · 염흥방(廉興邦) 등의 토지를 몰수한 것이었다. 또 한성의 흥인문(興仁門) 밖에 동적전(東籍田) 약 100결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이의 경영은 처음에 전농시(典農寺) 소속의 노비를 동원하였다. 그리고 그 수확으로 종묘(宗廟) · 사직(社稷) 등의 자성(粢盛)으로 삼았다.

그러나 차차 노비의 선상(選上)에 어려움이 있고 또 고역으로 노비의 도망이 잇따랐다. 이에 태종 때부터 서적전은 그 소재지 부근의 농민을 동원해 경작하게 하였다. 그리고 세종 때부터는 동적전 또한 그 소재지 부근의 농민을 동원하였다.

다시 세조 때에는 동적전은 양주(楊州), 서적전은 풍덕(豊德)의 농민 각각 100명과 200명을 농군(農軍)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경작지 10결당 1명을 차출하도록 하고 공부(貢賦) 외의 잡역을 면제해 경작에 전념하게 하였다.

그 뒤 동원되는 농군들의 고역이 문제되어 다시 양주 · 풍덕 지역 거주의 농민을 윤번으로 각각 100·200명씩 동원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경국대전』 호전(戶典) 적전조에 “적전은 그 부근의 농민에게 경작하게 하되 민전(民田) 10결 단위로 1부(夫)를 동원하고, 3부가 적전 1결을 경작하며 그들에게는 공부 이외의 잡요역(雜徭役)을 면제한다.”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서적전은 그 관리가 허술해 태종 때 설치한 300결이 세종 때의 양전(量田)에서는 모두 관인(官人) 또는 개성 농민이 점유하고 불과 70결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해 적전은 계속 존치되었으나 국왕의 의례적인 친경은 동적전에서만 거행되었다.

18세기의 『속대전』에 의하면 국왕의 친경 때에는 정전(井田)의 제도를 본떠 활용하고, 기장[黍] · [稷] · [稻] · [梁]를 수확해 자성에 사용한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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