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택(平澤).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임언수(林彦修)의 아들이다.
공민왕 초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속하여 공을 세우고 중랑장에 등용되었다.
1361년(공민왕 10) 10만여 명의 홍건적이 침략하여 개경까지 함락되자 1362년 나주도병마사(羅州道兵馬使)로 왕을 호종(扈從)하여 1363년 대호군으로 1등공신이 되었다. 같은 해 4월 서북면도순무사(西北面都巡撫使) 전녹생(田祿生)이 석기(釋器)의 반역을 보고하자 체포하였다. 12월 흥왕사(興王寺)의 행궁에 머무르던 왕을 시해하려다 실패한 김용(金鏞)을 계림부(鷄林府: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로 이감(移監)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어 진주도병마사(晉州道兵馬使)가 되어 군사의 징발을 담당하였다. 그 뒤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거쳐, 1368년 명나라 군대가 원나라의 연경(燕京)을 포위하였다는 급보가 있자 안주순무사(安州巡撫使)가 되었다.
1370년 부원수로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동녕부(東寧府) 토벌에 참가하였으며, 이어 밀직부사를 거쳐 1374년 서북면도순문사가 되었다. 제주에서 목호(牧胡)의 난이 일어나자 부원수로서 토벌전에 출전하였다.
1375년(우왕 1) 심양왕(瀋陽王) 터터부카(脫脫不花)의 모자가 왕위를 노리고 반역자 김의(金義)·김서(金湑)의 무리와 함께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서경상원수가 되어 출진, 이에 대비하였다.
1377년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문하평리(門下評理)로 동강부원수(東江副元帥)·서해도조전원수(西海道助戰元帥)로 출전하였다. 1380년 이인임(李仁任)과 함께 경복흥(慶復興)과 그 일당을 숙청, 1383년에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정방제조(政房提調)를 겸임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이 되어 문하시중에 올랐다. 그러나 그 후 이인임·지윤(池奫)·염흥방(廉興邦) 등과 함께 전횡을 일삼다가 1388년 최영(崔瑩)·이성계에게 살해되었다. 임견미(林堅味)가 점탈(占奪)한 전민(田民)을 조사[考覈]하기 위하여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이 설치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