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 ()

고대사 /고려시대사 /조선시대사
제도
전근대시대, 신분제 사회의 최하층 신분.
이칭
속칭
종, 사내종, 계집종
제도/법령·제도
폐지 시기
1894(고종 31)
내용 요약

노비는 전근대시대, 신분제 사회의 최하층 신분이다. 노는 남자종, 비는 여자종을 말한다. 전쟁, 형벌, 부채 등으로 충원되었으며 대대로 세습되었다. 국가 소유의 공노비와 개인 소유의 사노비로 구분되며, 노동력 제공이나 신공 납부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노비의 유산, 도망이 증가하는 가운데 신공 부담은 감소하였으며 합법적인 면천의 길은 확대되었다. 내시노비 혁파와 노비 세습제 폐지, 신분제 혁파를 차례로 거치면서 노비제도는 소멸하였다.

정의
전근대시대, 신분제 사회의 최하층 신분.
노비의 발생과 고대의 노비

원시 공동체 사회가 해체되고 초기 국가가 성장하면서 정치권력의 형성과 함께 금속제 농기구에 의한 생산력 발달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지배 집단과 피지배 집단이 분화하고 지배 집단의 사적 소유도 확대되었다. 반복된 정복 전쟁을 통해 발생한 전쟁 포로와 점령지의 주민은 피지배 집단의 최하층으로 편입되었다. 이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노동력을 가진 재산으로 지배자들에게 예속되기 쉬웠다.

전쟁으로 발생한 노비 외에 범죄자나 채무자도 노비가 될 수 있었다. 가장 오래된 노비에 관한 기록인 고조선의 「 팔조금법」에서는 "남의 물건을 훔친 자를 노비로 삼는다"는 조항이 있다. 이는 형벌 노비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이다. 부여의 법에서도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도록 하였다. 이들 노비는 피지배 하층민인 하호(下戶)보다 열악한 존재로 생산이나 전쟁에 동원되었다. 삼한의 읍락에서도 하호 외에 노비가 있었는데, 한지(韓地)에 들어와 벌목하다 잡힌 한인(漢人)들이 노비가 되어 농사일에 종사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삼국시대의 노비 역시 주로 전쟁이나 범죄, 채무로 인해 발생하였다. 고대 국가의 성장, 주변국과의 상호 대립 과정에서 벌어진 전쟁은 노비의 주요 공급처였다. 법 규정은 주로 형벌 노비의 발생을 보여주는데, 고구려에서는 반역자를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으며, 소나 말을 죽인 자 역시 노비로 삼았다. 소나 말을 죽인 자를 노비로 삼은 것은 생산이나 전쟁 수단인 우마의 중요성에 대한 확인임과 동시에 우마에 비견되는 노비의 열악한 위치를 드러낸다.

공적 ‧ 사적으로 빚을 진 사람은 그의 아들이나 딸을 노비로 삼아 피해를 보상하게 한 것으로 보아 채무 노비의 존재도 확인할 수 있다. 공적 부채로 인해 발생한 노비가 국가의 소유가 되었다면 그것은 공노비의 존재 가능성을 보여준다.

백제나 신라에서도 노비 발생 배경은 유사하였다. 진흥왕사다함(斯多含)에게 포로를 상으로 주었다는 기록이나 모반을 꾀한 아찬 대토(大吐)가 처형당하고 그 자식이 천민이 되었다는 기록을 통해 전쟁 노비나 형벌 노비를 확인할 수 있다. 곡식을 빌리고 갚지 못한 자를 노비로 삼았다는 기록에서는 부채 노비를 발견할 수 있다. 아울러 『삼국사기』 효녀 지은전(知恩傳)의 지은이 쌀 10여 석에 스스로 비가 되어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는 내용에서 가난 때문에 신분 하락을 감수하고 노비가 된 이들도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전쟁 노비의 발생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후 노비는 형벌이나 채무, 효녀 지은과 같은 피지배민의 계층 분화 등을 통해 생겨났다. 통일 신라의 노비는 「 신라촌락문서」를 통해 그 존재 양상을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서원경(西原京) 부근 4개 촌에서 파악된 인구는 모두 462명이며 노비는 전체의 5.4%인 25명이었다. 신라 사회 전체의 노비 규모를 파악하기는 어려운데, 4개 촌으로 한정하면 그 수가 많지는 않다. 이는 농업 생산의 근간을 이루는 계층이 노비가 아닌 양인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다만 왕경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촌락에서 존재하였던 노비를 통해 노비들이 전국적으로 분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25명 가운데 1명은 새롭게 출생한 노비여서 노비 신분의 세습 가능성도 보여준다.

고려시대 노비의 존재 양상

후삼국의 대립과 고려의 통일 과정에서 호족들은 전쟁 포로나 난민들을 자기 노비로 삼았다. 호족 세력을 약화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광종은 956년(광종 7)에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하여 원래 양인이었던 이들을 노비에서 해방시켰다. 호족들이 이 정책에 끈질기게 반발하면서 987년(성종 6)에 해방된 노비가 옛 주인을 욕하거나 옛 주인의 친척과 싸우면 다시 노비로 환원시키는 노비환천법(奴婢還賤法)을 시행하였다. 현종 대에는 노비 규제를 강화하여 환천한 노비가 다시는 양인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

호족들이 노비의 신분 해방을 꺼린 것은 노비가 재산의 일종으로, 매매 · 증여 · 상속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예속된 사노비 외에 국가 소유의 공노비 역시 노동력 확보를 위한 주요한 자산으로 취급되었다. 공노비의 공급원은 전쟁 포로보다 중대 범죄자와 그 가속이 주를 이루었다. 귀족도 모반 등의 범죄에 연루되면 공노비로 신분이 전환될 수 있었다.

공노비는 10여 세부터 역 부담을 졌으며 60세가 되면 그 부담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국유지 경작에 동원되거나 관청에 소속되어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관청에 소속된 노비들은 노동력 제공의 대가로 일정한 급료를 받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개인에게 예속된 사노비는 주인의 호적에 기재되어 다양한 형태의 노동력을 제공하였던 솔거노비와 별도의 호적에 등재되어 주로 토지 경작에 참여하였던 외거노비로 나뉘었다. 강력한 예속 상태에 놓여 있던 솔거노비는 주인에게서 최소한의 의식주를 받아 생활하였다. 주인의 토지를 경작하였던 외거노비는 생산량 일부를 주인에게 납부하고 그 나머지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 외에 별도의 현물이나 노동력을 제공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외거노비는 솔거노비보다 주인의 간섭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별도의 자기 경리를 가지고 재산을 축적할 수도 있었다.

사노비는 재산 소유의 권리를 인정받았고 법의 보호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주인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받았으며 주인을 배반할 수 없었다. 모반과 같은 중대한 범죄가 아니라면 주인을 고발할 수도 없었다. 1049년(문종 3)에는 3차례 도망한 공사노비에게 삽면형(鈒面刑), 즉 얼굴이나 팔뚝에 죄명을 새겨 넣는 형벌을 주도록 규정하였다. 주인을 배반한 사노비는 주인의 사적인 처벌 외에 국가의 형벌까지 받을 수 있었다.

사노비의 신분은 세습되어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칙에 따라 부모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노비라면 그 자녀는 노비가 되었다. 노비 자녀의 소유권은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 어머니의 소유주에게 귀속되었다. 다만 노와 양인 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의 소유권은 노인 아버지의 소유주에게 귀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노비 신분은 세습되었으나 고려 후기의 정치 변동은 일부 노비가 중앙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하였다. 이의민(李義旼), 김준(金俊), 신돈(辛旽) 등은 노비 출신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한 대표적인 인물들이었으며, 이들 외에도 군공을 세워 관직에 진출한 노비들이 다수 있었다. 이와 함께 전주와 진주의 노비 봉기, 만적의 난 등 노비들의 저항과 신분 상승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노비들을 비롯한 하천민의 저항은 최씨 집권기에 대부분 진압되었다.

고려 말의 혼란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신분 변동은 억제되었다. 양인을 강제하여 천인으로 만드는 행위가 금지되었는데, 역으로 천인 역시 양인이 되기 어렵게 하였다. 이러한 기조는 이성계 일파에 의해 강화되었다. 양인과 천인의 결혼은 금지되었으며, 호적의 정비를 통해 개인의 신분을 명확히 하는 방안도 추진되었다. 국가 재정의 원천이었던 양인의 신분 하락을 막고 천인 신분을 고정하려는 움직임은 새 왕조로 이어졌다.

조선시대 노비의 존재 양상

조선 왕조는 고려 말의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이 권력자의 농장 확대와 압량위천(壓良爲賤) 행위를 억제하여 양인 농민을 보호하려 하였던 정책을 긍정하였다. 새 왕조는 재정과 지지 기반의 확보를 위해서도 양인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고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양인의 보호와 함께 법제적으로는 양인과 천인을 명확히 구분하여 두 신분 사이의 이동을 억제하였다.

천인의 다수를 이루었던 노비는 더는 전쟁을 통해 충원하기는 어려웠다. 모반과 같은 중요 범죄에 연루된 자와 그 가속이 노비가 되기도 하였으나 노비 대부분은 신분제의 원리에 따라 세습되는 이들이었다. 노비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크게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되었다. 공노비에는 중앙의 각사에 소속된 각사노비(各司奴婢, 寺奴婢), 내수사와 각 궁방에 소속된 내노비(內奴婢, 宮奴婢), 지방 군현이나 감영, 병영에 소속된 관노비(官奴婢), 역참에 소속된 역노비(驛奴婢), 향교에 소속된 교노비(校奴婢)가 있었다.

공노비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였던 각사노비는 고려 말부터 각사에 소속되어 있던 원속노비(元屬奴婢)와 조선 초 이래 각사에 분급되었던 속공노비(屬公奴婢)로 나뉜다. 속공노비의 주류는 1406년(태종 6)에 사원을 정리하면서 나온 사사노비(寺社奴婢)였다. 당시 전국의 공인 사찰을 232사로 한정하고 나머지 2,000여 사를 혁파하여 소속 노비 8만여 명을 공노비로 삼았다. 이들은 전농시(典農寺) · 군기감(軍器監) · 내자시(內資寺) · 내섬시(內贍寺) · 예빈시(禮賓寺) 등에 소속되었다.

1419년(세종 1)과 1424년(세종 6)에 나머지 사사노비를 정리하여 대부분 전농시에 소속시켰다. 각사노비의 노비안은 3년마다 속안(續案), 20년마다 정안(正案)의 형태로 작성하여 형조 · 의정부 · 장례원 · 사섬시 및 노비가 소속된 각사와 거주지의 도, 군현이 관리하였다.

내노비는 태조 이래 왕실 재산을 관리하던 본궁 소속의 노비와 혁파된 사사노비 일부로 구성되었다. 각사노비의 노비안과는 달리 별도의 선두안(宣頭案)을 작성하여 장례원 · 형조 · 내수사 및 내노비 거주지의 도, 군현에서 관리하였다.

관노비는 사사노비나 각사노비, 범죄자로 적몰된 노비 등으로 충원되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관노비의 정원은 병마절도사진 200명, 수군절도사진 120명, 부 600명, 대도호부 · 목 각 450명, 도호부 300명, 군 150명, 현 100명, 속현 40명이었다.

역노비도 사사노비로 충원되었는데, 관수품을 운반하는 전운노비(轉運奴婢)와 문서를 전송하는 급주노비(急走奴婢)가 있었다. 역노비의 정원은 역의 규모에 따라 상등역 50명, 중등역 40명, 하등역 30명, 수운 20명으로 규정되어 있다. 향교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교노비는 사사노비를 속공하여 관리하였던 전농시에서 충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원은 유수관 30명, 대도호부 · 목관 25명, 단부관 20명, 지관 15명, 현령 · 현감 10명이었다.

공노비의 전체 규모는 정확하게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1484년(성종 15)의 추쇄 노비 파악 기록에 의하면 각사노비 26만 1984명, 각 고을과 역의 노비 9만 581명 등 모두 35만여 명이었다. 추쇄되지 못한 노비를 비롯하여 이 기록에서 빠진 노비까지 합하면 공노비의 규모는 더 늘어난다. 이처럼 방대한 수의 노비는 그들이 소속된 기관의 주요한 재정 원천이었다. 조선 왕조는 양인의 확보를 통해 국가 재정을 안정적으로 유지해 나갔지만 또 다른 재정 기반이었던 공노비 역시 철저하게 관리하였다.

공노비들은 자신들의 소속처에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현물을 바쳐야 하는 의무가 있었는데, 전자를 선상노비(選上奴婢), 후자를 납공노비(納貢奴婢)로 구분할 수 있다. 선상하여 역을 졌던 각사노비는 서울에 거주하면 2번으로 나누어 서로 교대하였고, 지방에 거주하면 7번으로 나누어 교대하였다.

지방 거주 노비를 7번 교대하게 한 것은 한 번의 입역 기간이 6개월이나 되었으므로 그들의 경제 기반 악화와 서울 거주의 어려움을 고려한 것이었다. 이들은 입역 기간 동안 소속처에서 잡역을 수행하거나 관원들을 수발하였다. 의무 입역 나이는 15세에서 60세까지였다.

선상노비는 입역의 내용에 따라 다시 차비노(差備奴)근수노(根隨奴)로 구분되었다. 궁궐의 각종 잡역을 담당한 궐내차비(闕內差備)는 서울 거주 노비로 충원하였고 잡직의 체아직을 주어 우대하였으므로 각사노비들은 궐내차비가 되기를 원하였다. 각사의 잡역을 담당한 각사 차비노 역시 서울 거주자로 충원하였다.

차비노와 달리 근수노는 각사의 관원이나 종친에게 주어져 그들의 관청 출입이나 지방 공무 수행에 수발을 들도록 하였다. 근수노는 주로 지방 거주 노비로 충당되었다. 종친이나 공신에게는 별도로 선상노비 가운데 구사(丘史)를 지급하여 수종을 맡기기도 하였다.

『경국대전』의 규정을 보면 선상노비는 궐내차비 390명, 각사 차비 2,416명, 근수노 1,480명이었다. 선상노비에게는 2명의 봉족을 주어 입역 기간의 생계를 보조하도록 하였으나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선상 입역하지 않는 노비들은 신공을 바치는 납공노비였다. 납공노비의 주류는 내수사 노비와 각사노비 가운데 지방 거주 노비들이었다. 그들의 입역 나이는 선상노비와 마찬가지로 15세에서 60세까지였다. 신공액은 여러 차례 조정되었는데, 세종 초에는 포로 납부하는 원공(元貢)과 저화로 내는 여공(餘貢)으로 나누어 노는 원공 정포(正布) 1필과 여공 저화 2장을, 비는 원공 정포 1필과 여공 저화 1장을 바치도록 하였다.

이후 『경국대전』에서 노는 면포 1필과 저화 20장으로, 비는 면포 1필과 저화 10장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저화의 유통이 원활하지 않자 신공을 면포로 통일하여 노는 2필, 비는 1필 반을 바치도록 하였다. 당시 저화 20장은 면포 1필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납공노비에게는 정해진 신공 외에도 수전가(輸轉價)와 작지(作紙) 등의 부가적인 부담이 별도로 있었다. 전반적으로 선상노비나 납공노비할 것 없이 역 부담은 양인보다 훨씬 무거웠다.

공노비와 달리 개인에게 예속되었던 사노비는 일반적으로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구분되었다. 솔거노비는 주인의 호적과 가호에 속한 채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비였다. 반면 외거노비는 독자적인 호적과 가호를 유지하며 주인에게 주로 신공을 바쳤다. 따라서 주인가에 대한 예속성은 솔거노비가 훨씬 컸으며, 조선 전기 노비의 다수를 이루었던 외거노비는 양인 전호와 유사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주인의 의지에 따라 노비의 존재 방식은 바뀔 수도 있었다.

솔거노비는 한편으로 가내사환노비(家內使喚奴婢)와 솔하노비(率下奴婢)로 구분하기도 한다. 가내사환노비는 주인가에 완전하게 예속되어 가내 노동이나 직영지 경영에 참여하였던 노비를, 사환노비는 주인가의 울타리 안에 따로 거주하면서 농장 경영에 동원되었던 노비를 가리킨다. 외거노비 가운데에는 주인가의 토지를 경작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자신이나 제3자의 토지를 경작하고 신공만을 바치는 이들도 있었다.

노비 소유주는 왕족이나 양반 사족이 많았으나 양인, 심지어 노비도 노비를 소유하였다. 노비 소유 규모는 일률적이지 않았지만 태종 대 홍길민(洪吉旼), 세종 대 안망지(安望之)의 처 허씨, 문종 대 유한(柳漢) 등은 1,000여 명, 성종 대의 영응대군(永膺大君)은 1만 명 이상의 노비를 소유하였다. 이들 대다수는 외거노비로 주인의 농장이나 자신 혹은 타인의 토지 경영에 종사하였다.

외거노비가 바치는 신공 액수는 공노비와 유사한 수준이었다. 노비주들은 정해진 신공 이상으로 가혹하게 수취하기도 하였으며, 이에 맞서 노비들은 신공 납부를 기피하기도 하였다. 신공을 효과적으로 수취하기 위해 주인들은 외거노비가 거주하는 지역의 지방관에게 청탁하는 일도 많았다.

양천제를 기반으로 한 조선의 신분, 국역 운영 체제에서 원칙적으로 사노비들은 군역 부담을 지지 않았다. 하지만 노비 중에는 잡색군(雜色軍), 장용대(壯勇隊), 만강대(彎强隊) 등의 특수군에 편제되어 군역을 지는 경우가 있었다.

세종 대에 설치된 잡색군에는 외거 사노비가 포함되었고 그들에게는 대신 잡역을 면제해 주었다. 세조 대에 만들어진 장용대에는 공사노비 중 무예가 있는 자를 입속시키고 체아직으로 상림원(上林園)의 잡직을 주었다. 이들은 거관한 뒤에 면역이라는 특혜를 받았는데, 사노비의 주인에게는 비슷한 나이의 공노비를 대신 주었다. 역시 세조 대 만들어진 만강대에도 노비들을 입속시켰고 근무 성적이 뛰어난 자는 양인으로 신분 상승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를 통해 외거노비는 주인에 대한 신공 부담 외에 잡역을 지거나 군역에 편입될 수 있었으며, 국가가 사노비를 면역, 종량시킬 경우 그 주인에게 공노비를 대신 지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장용대와 만강대에는 성종 대부터 기존 입속자를 제외한 노비의 입속이 금지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생하면서 기존의 군사 체계로 적을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군제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여 지방에는 속오군을 두었다. 초기 속오군은 양반부터 천민까지 다양한 신분의 남정으로 편성되었으나 영조 대 이후 사노비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지방군의 핵심인 속오군이 사노비로 구성됨으로써 국가의 사노비에 대한 통제력, 간접적으로는 노비주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되었다.

사노비를 포함하여 전체 노비 인구의 규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노비가 많게는 전 인구의 30% 이상을 차지하였다고도 하지만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호적대장을 보면 18세기 말 이후 노비가 주호인 호의 수는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하지만 노비 인구수는 그것과 상응하여 감소하지는 않았다. 호적은 부세 운영과 결합하여 일정하게 편제되었으므로 많은 호구가 누락되었다. 호적 작성 과정에서 노비주들이 소유 노비를 모두 기재하지 않은 흔적도 발견된다. 같은 가계의 분재기와 호구 자료를 비교하면 분재기에 더 많은 노비가 기록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호적의 노비 수보다 현실에 존재하였던 노비들이 더 많았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 노비 수가 늘어나면서 호당 한 명의 노비를 기계적으로 수록하였던 19세기 중엽 이후 호적의 노비가 실재하였던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호적의 기재 내용으로 노비 수를 추정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다만 조선 후기 호적에서 공노비와 외거노비는 꾸준히 감소하면서 소멸하는 추세였고 솔거노비는 외거노비만큼 감소하지 않으며 오랫동안 유지되는 경향을 보였다.

노비의 신분 세습

노비의 열악한 사회경제적 지위는 양인보다 무거운 신공 부담, 주인의 의지에 따라 매매 · 증여 · 상속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는 점과 함께 그들의 신분이 대대로 세습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시대 이래로 노비의 신분은 천자수모법에 따라 결정되었다. 우선 노비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노비가 되었고 그들의 소유권은 어머니의 주인에게 귀속되도록 하였다. 또한 양인 남성과 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 역시 천자수모법에 따라 신분과 소유권이 결정되었다.

반면 예외가 있었는데 노와 양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의 경우 아버지의 신분에 따라 노비가 되었고 그들의 소유권은 아버지의 주인에게 귀속되었다. 결국 노비 사이의 결혼은 물론 양인과 노비 사이의 결혼에서 태어난 자녀들도 모두 노비가 되는, 다시 말해 부모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노비라면 그 자녀 역시 노비인 일천즉천의 강력한 노비 신분 세습 원칙이 적용되었다.

조선 초에는 이러한 노비 신분 세습 원칙이 일시적으로 변용되었다. 조선은 법제적으로 양인과 천인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상호 간의 신분 이동을 억제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원칙이 양인의 확보나 양반 관료와 비첩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의 처리에 어려움이 있다는 데에 있었다. 이를 고려하여 태종 대에 각 품의 대소인원과 공사 천첩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아버지의 신분에 따라 양인으로 삼고 사재감 수군에 입속시켰다가 이후 보충군으로 옮겼다. 각 품의 대소인원이 아닌 일반 양인과 공사천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차등을 두어 신량역천의 직역에 편입시켰다.

양인 남성과 비 사이의 자녀를 양인으로 삼으면서 노비의 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자녀를 양인으로 만들기 위해 비들은 자녀의 아버지를 노가 아닌 양인으로 꾸며 신고하는 일도 있었다. 세종 때에는 노비의 수 감축을 막기 위해 양인 남성과 비 사이의 교혼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그 자녀는 종모법을 적용하여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노비로 삼았다. 다만 각 품의 대소인원과 공사 천첩 사이의 자녀는 그대로 종량을 인정하였다.

양인 남성과 비 사이의 자녀 일반에 대해 종량하도록 하는 조처는 세조 말이나 성종 대 일시적으로 시행되기도 하였으나 폐지를 반복하였다. 결국 『경국대전』에서는 일천즉천의 원칙에 입각한 노비 세전법을 확정하였다. 각 품의 대소인원과 공사 천첩 사이의 자녀에 대한 일부 예외가 있었으나 부모 가운데 한 사람만 노비이면 그 자녀들도 모두 노비가 되는 가혹한 신분 세습의 원리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일천즉천의 원칙과 양천교혼의 관행은 노비의 수를 증가시키려는 노비주들의 이익에 부합하였다. 하지만 국가의 양인 확보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국역 부담을 지는 양인을 늘이기 위한 다양한 방편 가운데 하나로 노와 양인 여성 사이의 자녀를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양인으로 삼는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奴良妻所生從母從良法), 즉 종모법이 고려되었다.

종모법은 선조 대 이이가 주장하였으나 바로 실시되지 못하였고, 1669년(현종 10)에 송시열의 주장으로 시행되었다. 하지만 집권 세력의 변화에 따라 양인 확보와 신분 질서 유지를 두고 의견이 충돌하여 종모법은 시행과 폐지를 반복하였다. 종모법이 안착된 것은 1731년(영조 7)이었다. 노와 양인 여성 사이의 소생을 양인화하여 국가는 양인 군역자를 늘렸고, 아울러 속오군을 통해 노비 군역 자원도 확보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 재정과 군역 운영상의 변화와 함께 국가의 노비주에 대한 통제 강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종모법은 특수 직역 자원의 확보 필요에 따라 변용되기도 하였다. 전국적으로 분포하였던 역의 운영을 위해 역리(驛吏)와 역노(驛奴)는 일정한 수가 필요하였지만 고역으로 기피되었다. 이들 역민을 확보하기 위해 『 속대전』에는 역노와 비 사이의 소생이 아들이면 아버지의 역을, 딸이면 어머니의 역을 따르게 하였고, 역노와 양인 여성 사이의 소생은 역에 속하기를 자원하면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종량하고 역리로 승격시키도록 하였다. 역노와 양인 여성 사이의 소생은 신분을 양인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역노승리법(驛奴陞吏法)을 적용하여 역리로 지위를 올려 역리 자원을 확보하려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조처로 역리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하고 역노가 감소하면서 정조 때 역노승리법은 폐지되었다.

한편 함경도 무산 이북의 각 진보(鎭堡)에 속하였던 토졸(土卒) 역시 확보가 어려워지자 토졸과 비 사이의 소생 가운데 딸은 어머니의 역을 따르고 아들은 노비안에서 뺀 뒤 아버지의 역을 따르게 하였다. 이는 종모법이 아닌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게 하여 토졸 자원을 확보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외적 사례가 있었으나 종모법의 흐름이 관철되었고, 이는 노비의 수 감소와 양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노비의 생활상

종모법이 정착하기 이전 신분 세습제의 원칙에 따라 노비들은 대대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더구나 반복된 고역으로 가계의 재생산마저 어려울 수도 있었다. 선상 입역하는 공노비에게 봉족을 지급하거나 연로한 노비의 소생 가운데 일부를 시정(侍丁)으로 인정하여 역을 면제하고 출산한 노비 부부에게 휴가를 준 것은 그들의 생활 안정을 위한 장치였다.

각사노비 가운데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기관에 동시에 입역하여 생계가 어려운 경우에도 같은 기관에 속하도록 배려하거나 일부의 역을 면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혜택은 역으로 지방에서 선상 입역하는 노비들의 생활이 얼마나 불안정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노비들은 선상 입역하는 동안의 경비와 식량을 스스로 마련해야 하였고 거처할 곳도 달리 없었다. 지방에 남아 있는 가족들의 생계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선상노비들은 될 수 있으면 역 부담이 가벼운 곳에 들어가려 하였고 농사를 돌보기 위해 다른 노비를 대립(代立)시키기도 하였다. 대립가는 한 달에 면포 2.5~3필 수준이었으나 대립이 확산하면서 그 액수도 증가하였다. 세조 대에는 대립가가 한 달에 2필을 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등 정부는 대립 자체를 막지 못하고 대립가의 급등만 억제하였다.

관청에 따라서는 선상노비에게서 대립가를 직접 수취하여 활용하는 일도 있었다. 이는 노동력 수취가 아닌 사실상의 포납(布納)에 해당하였다. 대립이 어려웠던 가난한 노비들은 생계가 어려워지면 도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망 노비가 늘어나면 남아 있는 노비들의 부담은 더 커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마련이었다.

주인집 행랑채나 인근에 거주하였던 솔거노비들은 일상에서 온갖 잡다한 일들을 도맡아야 하였다. 청소, 취사, 땔감 마련, 방아 찧기, 베 짜기, 물품 매매, 토지의 경작과 관리, 외거노비의 신공 징수 등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일의 종류는 무수하게 많았다. 반면 외거노비는 보통 신공의 납부로 의무를 끝내고 나머지 시간에는 자신의 경제력을 늘려나갈 수 있었다. 외거노비는 자신의 토지는 물론 다른 사람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상행위에 종사할 수도 있었다.

조선의 노비는 사적 소유와 부의 축적이 용인되었다. 노비들이 부를 확보하는 경로는 부모에게서 상속 받거나 매득과 같은 경제활동에 있었다. 법전의 규정에 따르면 노비인 얼자녀는 적자녀의 1/10에 해당하는 재산을 상속받을 권리가 있었다. 이 재산은 다시 그들의 자녀에게 상속되었고 여기에 경제활동의 성과가 더해지면 큰 부를 소유할 수도 있었다.

성종 때 8,000여 석의 곡식을 보유하였던 진천의 사노 임복(林福)은 자신의 네 아들을 노비 신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국가에 2,000여 석을 납부할 정도로 부유한 노비였다. 1540년(중종 35) 사노 복만(卜萬)이 두 딸에게 재산을 물려주면서 작성한 상속 문서를 보면 그는 기와집 2채와 큰 소 3마리, 적지 않은 전답, 다양한 가재도구, 농기구, 곡식을 소유하였다. 복만은 당시 양반들의 상속 방식과 유사하게 두 딸에게 재산을 균분하였다.

물론 부유한 노비는 전체 노비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대다수 노비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는 매우 열악하였다. 다만 많은 노비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외거노비였고 그들의 재산 축적이 가능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노비의 결혼은 신분 내혼이 일반적이었지만 양인과의 양천교혼, 양반이나 중인 남성의 비첩과 같은 방식으로도 이루어졌다. 양천교혼은 노비의 수를 늘리려는 노비 소유주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결혼 방식이기도 하였다. 노비주의 입장에서 자신의 노와 비가 결혼하여 자녀를 출산할 때는 특별한 이익도, 손해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노와 양인 여성, 비와 양인 남성이 결혼하면 일천즉천의 원칙에 따라 그 자녀들도 모두 자신의 소유가 되었다. 1550년(명종 5) 김연(金緣) 남매 상속 문서를 보면 전체 190명의 노비 가운데 65명이 양천교혼으로 태어난 이들이었다. 양천교혼 중에는 양인 남성과 비와의 결합보다는 노와 양인 여성 사이의 결합이 더 많았다.

같은 주인을 둔 노비 사이의 결혼이나 양천 교혼과 달리 노비 부부의 주인이 달랐을 때는 갈등이 발생할 소지가 있었다. 주인이 다른 노비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천자수모법에 따라 어머니인 비의 주인에게 소유권이 귀속되었다. 이 경우 아버지인 노의 주인은 자신의 노비 간 결혼이나 양천교혼으로 확보할 수 있는 노비 자녀의 소유권을 상실하게 된다. 이때 주인에게 손해를 입힌 노는 경제적인 보상을 하거나 처벌을 받아야 하였다.

노비가 자신의 주인에게 재산을 바치는 행위를 기상(記上)이라고 하였다. 앞의 사노 복만도 남의 집 비와 결혼하여 자녀의 소유권이 비의 주인에게 돌아가자 복만의 주인은 그가 76세가 되도록 신공을 면제하지 않았고 다양한 요구를 덧보태곤 하였다. 이에 복만은 약간의 토지와 소 2마리, 놋화로 1개, 놋동이 1개를 주인에게 기상하여 손실을 보상해 주었다. 사노비는 상속할 자녀가 없는 경우에도 그 재산은 주인에게 귀속되었다. 자녀 없는 공노비의 재산은 속공되었다.

노비는 오랫동안 성과 본관을 갖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성관의 사용은 삼국시대 이래 왕족에서 귀족, 평민 순으로 확대되었고 조선시대에는 노비들의 성관 획득도 서서히 늘어났다. 노비들이 평민으로 신분 상승을 이룬 경우에는 반드시 성관을 갖추었다. 그들이 성관을 처음 사용할 때는 주변에서 흔하면서도 유력한 양반들의 성관을 피해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비의 후손 중에는 사회적 성장 과정에서 성은 바꾸지 않더라도 본관을 좀 더 유력한 것으로 변경하는 이들이 있었다. 본관의 변경 사례는 호적대장에서 다수 발견된다.

노비의 이름은 흔하거나 천하게 지어 쉽게 부를 수 있도록 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예로 호적에는 개똥〔㖋同〕, 돌쇠〔乭金〕, 마당쇠〔馬堂金〕, 강아지〔江牙之〕, 도야지〔道也之〕, 개부리〔介不里〕, 곱단〔古邑丹〕, 넙덕〔汝邑德〕, 작은년〔自斤連〕, 어린년〔於仁連〕 등의 이름이 나타난다. 노비의 이름을 이처럼 함부로 짓거나 표기한 것은 그들의 인격이 일상에서 존중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한자식 이름을 짓는 비율이 늘어났는데, 평민으로 성장한 뒤에는 대다수가 한자식 이름을 선택하였다. 성과 본관을 갖추고 한자식 이름을 사용하면 그나 그의 가계가 노비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성관과 이름만으로는 확인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관의 부재나 흔하고 천한 이름은 노비임을 드러내는 하나의 장치이기도 하였다.

노비들의 열악한 위치는 그들이 증여나 매매의 대상이었음에서도 확인된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15~50세 노비의 가격은 저화 4,000장이었다. 이는 쌀 20석이나 면포 40필에 해당하였고 당시 말 1마리의 가격과 비슷하였다. 『속대전』에서도 노비 가격은 100냥(쌀 20~30석)을 유지하였으나 18세기 이후 실제 노비 가격은 하락하고 있었다.

노비의 속오군 편제 등 사노비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강화되고 도망하는 노비도 크게 늘었으나 추쇄는 쉽지 않았다. 노비가 도망간 지역을 알기도 어렵지만 그 지역을 확인하고 추쇄에 나섰던 노비주가 자신의 노비로부터 봉변을 당하기도 하였다. 더구나 농업 경영에서 노비보다 소작인을 활용하는 방식이 이미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노비 가격은 하락하였고 반면에 토지의 가치는 상승하였다.

상속은 소유주의 변화만이 아니라 노비 가족의 해체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균분 상속의 관행이 유지되었을 때 노비주들은 노비의 나이와 건강 상태까지 고려하여 수적, 질적인 균분을 추구하였다. 철저한 균분 상속은 노비 가족의 해체를 동반하였다. 노비 가족 구성원을 묶어서 한 사람의 상속자에게 상속할 수도 있지만 가족 구성원을 해체하여 여러 상속자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균분 상속이나 일상적인 관리와 통제에도 유리하였다. 물론 어린 노비들이 자신의 어머니와 떨어져 바로 새 상속자에게로 가지는 않겠지만 이들은 일정하게 성장하면 새 주인의 솔거노비나 외거노비로 귀속되기 마련이었다.

노비들은 한편으로 일상에서 주인의 사적인 형벌에 노출되어 있었다. 노비주는 자신의 노비를 마음대로 죽이거나 지나치게 가혹한 형벌을 가하지 않는 이상 다양한 형벌로 통제할 수 있었다. 더구나 노비는 모반 행위가 아니라면 주인의 여타 불법 행위에 대해 고발할 수 없었으며, 주인에게 죄를 지으면 일반인보다 더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예를 들어 노비가 자신의 주인을 구타하면 참형에, 주인의 친족 또는 외조부모를 구타하면 교수형에 처하였으며, 과실이라도 주인에게 상처를 입혔을 경우 장일백(杖一百)에 유삼천리(流三千里)의 형벌을 받았다.

노비는 주인의 사적인 처벌 외에도 국가의 엄격한 형벌에 처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양인과 천인을 명확하게 구분하였던 신분 정책에 부합하는 것이었으며 노비주는 이를 일상에서의 통제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노비주와 노비의 관계를 강상의 차원에서 규정하였던 것 역시 신분 질서의 유지와 노비 통제의 수단이 되었다.

노비의 성장과 노비제의 해체

국가와 노비주의 통제에 대한 노비들의 반응은 크게 3가지 방식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신분적 억압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노비의 삶을 지속하는 방식이다. 부를 축적하거나 주인에게 저항하기도 어려웠던 노비들은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과 달리 축적한 부를 통해 합법적으로 신분 상승을 도모하는 방식이 있었다. 노비들이 소유한 부의 규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지만 내수사에 속공된 무후(無後) 노비의 전답을 기록한 『내수사무후노비모기상전답타량성책(內需司無後奴婢某記上田畓打量成冊)』이나 양반가의 고문서에 나타나는 무후 노비의 기상전답(記上田畓)에는 1결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이들이 여럿 있다.

양인이나 양반 못지않은 경제력을 가진 노비들은 경제적 속박에서는 이미 벗어난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부를 바탕으로 신분적 속박에서도 해방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다. 정부도 재정상의 문제로 부유한 노비의 경제력을 확보하고 그들을 속량시키는 정책을 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국가 재정 위기를 타개하고 군량미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납속면천(納粟免賤)이 널리 시행되었다.

임란 이후로는 기근이 심해 진휼 곡식이 부족할 때 노비면천첩(奴婢免賤帖)을 팔아 진휼 비용을 마련하였다. 부유한 노비는 한편으로 자신의 역을 대신할 노비를 세우고 자신은 면천하는 대구속신(代口贖身)을 통해 노비 신분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부유한 노비가 아니라도 군공을 세우거나 무재(武才)가 있거나 주요 범죄자의 체포에 공을 세우는 일도 면천의 방편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적을 참수하거나 모반사건 관련자의 처단에 공을 세운 노비들은 물론 명화적(明火賊)이나 범월인(犯越人)을 잡아들인 노비들도 면천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시기에는 공사천 무과를 실시하여 군사 자원을 확보하였고, 이후 친기위(親騎衛)별무사(別武士)에 노비를 소속시키고 무재를 시험하여 뛰어난 자를 면천하였다. 이처럼 합법적인 노비 해방의 길이 열린 주요한 계기는 임진왜란이었다. 전쟁이라는 위기는 노비에게 신분 상승의 기회가 되었고 이후로도 간헐적으로 실시된 면천 정책을 노비들은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사노비의 주인들도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거나 노비 통제가 원활하지 않으면 자신의 노비를 매매하거나 혹은 속가를 받고 면천해 주었다. 숙종 대에 노비 속량가는 나이에 따라 미곡으로 10~50석 수준이었다. 『속대전』에 규정된 노비 속량가 100냥도 이 범위에 들어간다. 조선 후기 노비의 가치는 하락하고 있었으므로 속량가 역시 하락하였을 수 있다. 노비주의 입장에서도 관리가 쉽지 않았던 노비들을 장기간 소유하는 것보다는 최소한의 솔거노비 외에는 고공이나 소작인을 토지 경작에 이용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었다.

합법적인 신분 상승과는 달리 노비들이 선택하였던 또 다른 삶의 방식으로는 도망과 같은 저항의 길이 있었다. 임진왜란 중에 사망하거나 도망한 노비들이 많았는데, 이후로도 노비의 도망은 갈수록 늘어났다. 조선 후기 호적을 보면 상당수의 노비가 도망 노비로 표기되었다. 호적에는 이들 노비 이름 아래 단순히 도망이라고 표시한 경우가 많았지만 그들의 나이나 도망간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지속해서 기재하기도 하였다.

18세기 경상도 단성 호적에는 심지어 100세나 200세가 넘는 노비들이 여러 명 등장하기도 하였다. 노비주들은 호적이 만들어지는 3년마다 노비가 도망갔을 때의 나이에 세 살씩 더해 도망 노비의 나이를 계속 기재하였다. 이는 노비주들의 추쇄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실제 추쇄가 이루어지면 도망간 노비와 그 후손들을 다시 자신의 소유로 귀속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쇄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호적에 기재된 도망 노비의 수가 늘어나는 현상이나 그들의 나이만이라도 지속해서 기록하려 하였던 것은 그 단적인 예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 결국 도망 노비들은 호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도망한 노비들은 다양한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자신의 원 거주지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은 물론이고 추쇄가 어려운 서북 지역으로 흘러들어 가기도 하였다. 이들은 섬에서 어민으로, 광산에서 광군으로, 도시에서 상인으로 생활하기도 하였으며 농촌에서 고공이나 소작인으로 살았다. 기근이 심할 때는 유민 집단에 합류하였다가 도적으로 전환되기도 하였다.

도망 노비들은 여전히 어려운 삶을 살았을 수도 있지만 신분 해방과 사회적 성장의 가능성은 훨씬 커졌다. 무수한 노비들이 지속해서 도망을 시도한 것은 적어도 국가나 타인의 소유로 예속되었던 삶에서 벗어나거나, 나아가 평민이나 그 이상의 신분으로 상승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노비에서 벗어난 이들 가운데 사회경제적 위치가 여전히 열악한 이들은 수군이나 역졸과 같은 기피 직역에 충정되었다. 경제력이 있는 이들은 비교적 수월한 역을 맡으려 하였으며 여러 세대에 걸쳐 업유(業儒), 업무(業武)와 같은 중간층의 직역을 획득한 뒤 최종적으로 유학(幼學)에 이르기도 하였다. 평민 중에는 중간층을 거처 유학 직역에 이르는 가계들이 갈수록 늘어났는데, 노비 가계에서도 평민들의 궤적을 뒤따라가는 이들이 있었다. 평민 이상의 신분층은 노비나 노비에서 해방된 이들을 차별하였으나 노비나 그들의 후손은 상위 신분을 따라잡고 그들의 삶을 모방하면서 사회적 성장을 이루어나갔다.

이와는 달리 주인이나 그 가족에 대한 폭행, 살해와 같은 극단적 방식으로 신분적 모순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사례도 있었다. 숙종 대에 있었던 살주계(殺主契)는 주인 살해를 목적으로 한 비밀 조직이었다. 합법적, 비합법적 신분 상승이나 주인에 대한 저항 역시 노비제의 해체로 가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노비들의 저항이나 성장은 신공의 부담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 초 이래 선상 입역은 공노비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그들은 대립을 모색하고 도망과 같은 방식으로 피역을 시도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노비의 수가 많이 감소하면서 공노비의 노동력으로 충당되었던 역 부담을 고립(雇立)의 방식으로 해결해 나갔다.

이와 함께 지방에 거주하는 노비들에게는 선상 입역보다 부담이 적었던 신공 납부만으로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하였다. 공노비들은 선상으로 인한 경제적 불안정성을 일부 해소하고 정부는 노비의 신공과 여타 재정을 통해 유휴 노동력을 고용하여 기존의 노비 노동을 대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노비가 납공노비 중심으로 재편된 뒤에도 노비들의 피역 저항은 사라지지 않았다. 도망으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지속되면서 정부는 공노비의 신공 부담을 줄여나갔다. 납공노비의 부담은 노의 경우 1년에 면포 2필, 비는 1필 반이었으나 1667년(현종 8)에는 노 1필 반, 비 1필로 반 필이 줄어들었고, 1755년(영조 31)에 노 1필, 비 반 필로 다시 반 필이 줄어들었다. 1774년(영조 50)에는 노 1필은 유지한 채 비의 신공은 폐지되었다. 이는 양인의 군포 부담을 줄이는 과정과 상통하였고 결과적으로 양인의 군역 부담과 공노비의 신공 부담이 같게 되었다. 공노비의 신공 축소는 사노비의 신공 부담 감소에도 영향을 주었다.

정부는 공노비의 신공을 감소해 나가면서도 공노비의 수는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하였다. 효종 대에 대대적인 노비 추쇄가 실시된 이후로 추쇄 노력은 지속되었으나 노비들의 저항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영조 대에는 각 도의 공노비 수를 고정하는 노비 비총법(比摠法)을 시행하여 신공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 하였다. 하지만 노비의 도망과 남은 노비의 부담 가중, 다시 도망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노비제도 자체를 유지할 수 있는 동력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공노비의 신공 부담을 지속해서 줄여주면서 공노비 소속 관청의 재원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를 호조와 균역청의 재원으로 충당하면서 중앙 재정의 부담이 커졌고, 결과적으로 양인에게 수취한 부세로 노비 신공을 보충하는 셈이 되었다. 공노비의 신공과 양인의 군역 부담마저 같아지면서 공노비를 유지할 필요성은 더욱 줄어들었다. 결국 1801년(순조 1)에 내시노비 혁파 조처가 이루어졌다. 이때 대상이 되었던 이들은 내노비 3만 6974명, 중앙 각사의 시노비 2만 9093명 등 모두 6만 6067명이었다.

내시노비 혁파 이후 중앙에 남아 있던 노비는 형조로 이속되었으며, 각 군현과 역에 소속되어 노동력을 제공하였던 관노비와 역노비도 남아 있었다. 사노비도 유지되었지만 도망 현상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고 합법적 신분 상승의 기회 활용 및 종모법의 시행에 따라 노비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확대되었다. 마침내 1886년(고종 23)에 노비 세습제가 폐지되고 이어 노비 소생의 매매 금지와 양인화가 법적으로 보장되었다.

1894(고종 31)년에는 신분제의 폐지와 함께 노비제 역시 제도적으로는 사라지게 되었다. 다만 민간에서 노비는 일부 남아 있었지만 그들도 근대사회의 진전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조선의 신분제 변동에 관해서는 다양한 논쟁이 있지만 천인의 주류였던 노비의 소멸 과정은 사실상의 신분제 해체 과정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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