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상 ()

목차
조선시대사
제도
고려 · 조선시대에 각 관아에서 사역시키기 위해 지방의 관노비를 중앙에 뽑아 올리는 제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고려 · 조선시대에 각 관아에서 사역시키기 위해 지방의 관노비를 중앙에 뽑아 올리는 제도.
내용

선상은 고려시대부터 있었으며, 당시에는 지방의 관노비 중에서 장정을 뽑아 중앙에서 사역시키는 것을 뜻하였다.

조선시대의 선상은 서울에 머무는 기간을 기준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다. 하나는 선상노비로, 중앙 각 관서의 잡역에 종사할 노비의 십중팔구가 지방에 살았으므로 이들을 7번 교대로 경중(京中)에 입역시켰다. 즉, 한 사람이 3년마다 6개월 동안 경중에 입역했고, 봉족(奉足) 2명이 주어져 이들에게서 면포 · 정포 각 1필을 거두었다.

선상노비의 수는 공안(貢案)에 올랐다. 『경국대전』의 각사이전노비(各司吏典奴婢) 2,804명, 차비노(差備奴) · 근수노(根隨奴) 3,371명, 모두 6,175명의 대부분이 이들로 충당되었다. 이들이 맡은 일은 관원 수행, 각 궁(宮) · 전(殿)의 잡일, 각 사의 장인(匠人) · 성상(城上) · 방직(房直) · 고직(庫直) · 침선(針線) · 주모(酒母) · 집찬(執饌) · 세답(洗踏) 등이었다.

선상노비 중에는 부모의 노환이나 가족의 생계를 위해 대립(代立)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대립법을 정해 대립 가는 1개월에 2필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하기도 했다.

한편, 여기(女妓) · 연화대(蓮花臺) · 여의(女醫)와 같이 지방 고을의 관비 중 나이 어리고 총민한 자를 뽑아 특별한 재예(才藝)를 갖추게 하여 서울에 계속 머물도록 하였다. 여의는 재예가 성취되면 본 고을로 돌려보냈다. 『경국대전』에는 3년마다 여기 150명, 연화대 10명, 여의 70명을 각 고을에서 뽑아 올리도록 규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후기(朝鮮後期) 노비신분(奴婢身分) 연구(硏究)』(전형택, 일조각, 1989)
『역주경국대전(譯註經國大典)-주석편(註釋篇)-』(한우근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조선초기(朝鮮初期)의 공노비노동력(公奴婢勞動力) 동원체제(動員體制)」(전형택, 『국사관논총』12, 1990)
「조선후기(朝鮮後期) 공노비(公奴婢)의 신분변동(身分變動)」(김상환, 『경북사학』12, 1989)
「조선전기(朝鮮前期) 공노비제도(公奴婢制度)의 구조(構造)와 변화(變化)」(지승종, 『한국학보』32, 1983)
「이조(李朝) 기녀제도(妓女制度)와 생활(生活) 연구(硏究)」(현문자, 『아세아학보』 10, 1972)
「조선전기(朝鮮前期)의 노비(奴婢) 연구(硏究)」(이재룡, 『숭전대학교논문집』 3, 1971)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