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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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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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전통적 신분 사회에서 왕실과 국가 기관에 소속, 사역되었던 최하층 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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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우리 나라 전통적 신분 사회에서 왕실과 국가 기관에 소속, 사역되었던 최하층 신분.
내용

흔히 ‘공천(公賤)’이라고도 하였다.

공노비 중에서도 내수사(內需司) 소속의 노비는 내노비 또는 왕실의 노비라는 뜻에서 ‘궁노비(宮奴婢)’라고 하였다. 그리고 관서가 보통 행정기관일 경우 그 소속 노비를 ‘관노비(官奴婢)’라고 했는데, 관아가 역(驛)이라든가 향교와 같이 특수한 관아일 경우 ‘역노비’ 또는 ‘교노비’라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공노비를 ‘사노비(寺奴婢)’ 또는 ‘사사노비(寺社奴婢)’라고도 하였다. 건국 초기에 공노비가 주로 사사(寺社)에서 몰수된 노비로 충당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는 관노비만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공노비의 공급은 전쟁 포로·특정 범죄자가 대부분이었다. 정복 전쟁과 삼국간의 항쟁이 치열했던 삼국시대에는 전쟁 포로가 가장 중요한 공급원이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올수록 전쟁 포로보다는 특정 범죄자가 주종을 이루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반역 또는 난동, 강·절도(强竊盜)와 장도(贓盜) 및 강상(綱常)을 어긴 자나 간음·용간(用奸)·위조·유기·도망 등의 범죄자와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아 속공(屬公)했고, 그 소유 노비까지 관몰하였다. 따라서, 공노비가 되는 것은 특정 범죄행위에 대한 처벌의 한 방법이었다.

16세 이상 60세까지의 공노비는 독자적인 가계를 유지하면서 자유스러운 가정 생활을 할 수 있는 대신, 소속 관서에 의무를 부담해야 하였다. 따라서 그 내용이 노역인지 현물인지에 따라, 다시 선상노비(選上奴婢 : 供役奴婢)와 납공노비(納貢奴婢)로 구분되었다.

대체로, 서울에 사는 공노비는 당연히 선상노비가 되었으나, 지방에 사는 공노비는 선상노비와 납공노비로 구분되었다. 납공노비는 초기 ≪경국대전≫에 신공(身貢)으로 매년 노는 면포 한 필과 저화(楮貨) 20장, 비는 면포 한 필과 저화 10장을 바치도록 규정하였다.

당시 저화 20장은 면포 한 필에 해당했으므로 노는 면포 두 필, 비는 한 필 반을 바친 셈이었다. 따라서, 3구의 남녀 장년으로 구성된 노비 가정이 있다면, 1년에 5, 6필의 면포를 바쳐야 했다. 이들의 부담은 후기에 점차 감액되어 1774년(영조 50) 비의 신공을 없애고 노에게만 한 필을 부과하였다.

이들에 의해 납입되는 신공은 국가 재정에 중요한 몫을 하여 1485년(성종 16)을 예로 들면, 면포 72만 4500여 필, 정포 18만여 필에 이르렀다. 공노비의 의무 부담은 양인(良人)에 비해 두 배 이상 무거운 것이었다. 즉, 양인의 경우에는 정남(丁男)에게만 국역(國役)이 부과되었지만, 공노비의 경우 노뿐만 아니라 비도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선상노비는 지방 또는 중앙의 각 관서에 차출되어 일정 기간 노역에 종사해야 하였다. 그리고 지방 관서에 입역할 경우에는 일곱 번으로 나누어 교대하였다. 별도의 봉족(奉足)이 주어지지 않았으나, 경중(京中)의 관서에 입역할 경우 두 번으로 나누어 교대하였다. 또한, 2인의 봉족노비가 주어져 선상노비의 호수(戶首)에게 매년 면포·정포 각 한 필을 바쳤다.

그들 공노비들은 일반 양인과 같이 온전한 가족 생활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입역체제(立役體制) 하에서 그 연령에 해당하는 세 가족으로 구성된 노비 가정이 있다면, 경중에 입역하는 호수에게 나머지 가족 2인이 봉족으로 주어졌다. 때문에, 사실상 1호당 1정의 입역을 기준으로 하였다.

경중에 입역하는 선상노비는 각 사(司)의 차비노(差備奴 : 잡역에 종사하는 노비)·근수노(根隨奴 : 관원의 몸종) 등으로 사역되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그들의 정수는 91개 사에 총 3,886구이다. 그 밖에 문소전(文昭殿)·대전(大殿) 등 궁궐 안의 잡역에 종사하는 노비도 다수 있었다.

지방 관서에 입역하는 선상노비는 각 고을마다 정수가 규정되어 있었다. ≪경국대전≫에는 부(府) 600구, 대도호부(大都護府)와 목(牧)에 450구, 도호부 300구, 군(郡) 150구, 현(縣) 100구, 속현(屬縣) 50구와 제영(諸營)은 병사진(兵使鎭) 200구, 수사진(水使鎭) 120구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경중 각 사에 입역하는 노비 가운데 십중팔구는 지방에 거주하고 있었다. 때문에 선상은 상당한 고역이어서 도망자가 잇따랐고, 조금 부실(富實)한 자는 비싼 선상대립가(選上代立價)를 치르고 입역의 면제를 받고자 하였다.

그러한 풍조에 따라 가난한 노비까지 눈앞의 고역을 피하기 위해 선상대립가를 치르고 면역하려 하였다. 이에 대립가는 날로 높아져 납공노비의 신공에 몇 배가 되는 면포 15필까지 되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선상된 노비는 어쩔 수 없는 가난한 노비들뿐이었다.

그리하여 선상의 각종 폐단을 막기 위해 호적 작성, 도망에 대한 책임, 피역 노비 등에 관한 제 규정을 ≪경국대전≫에 법제화하였다. 공노비의 원적인 정안(正案)은 3년마다 소속 관서의 관원과 장례원 관원이 함께 새로 태어난 자, 사망자, 도망자 등 변동 사항을 파악해 작성하였다.

이 속안(續案)을 토대로 20년마다 재작성, 의정부·형조·장례원·사섬시, 소속관서, 본 도, 본 읍에 간직하였다. 도망하여 장적에 누락된 노비를 신고하는 자에게 매 4구(口)에 1구를 상으로 주도록 규정한 것으로 보아 도망 노비가 매우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노비의 자손에 대한 신분 전승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동색혼(同色婚 : 부부가 같은 신분)은 물론이고, 이색혼(異色婚 : 부부가 다른 신분)일 경우에도 그 소생 자녀는 공노비로 되어 부모와 같은 관서에 소속되었다. 부모의 소속 관서가 다를 경우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어머니의 소속 관서에 속하였다.

그러나 좁은 기회이기는 하지만, 공노비의 경우 관직을 제수받는 경우도 있었다. 즉, 전란과 같은 비상시에 특별한 공을 세워 7품 사정(司正) 이하의 하급 서반직을 부여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6품을 한계로 별도로 규정한 잡직품계를 받는 각종 잡직에도 종사하였다.

동반의 잡직은 공조·선공감·사복시·장악원 등 14개 관서에서 물품 제조, 토목 공사, 말 기르기, 악기 연주 등을 맡았다. 서반의 잡직은 파진군(破陣軍)의 근사·종사·추사·대졸 등과 팽배(彭排)의 대장·대부 등 군인직에 종사하였다.

또한 공노비는 간혹 종량(從良)되거나 사노비(私奴婢)로 되는 경우도 있었다. 군공(軍功)·포도(捕盜)·역모 고발 등의 공을 세울 경우 상(賞)으로 종량되기도 하였다. 또 같은 공을 세운 사노비를 종량시킬 경우, 국가는 그 상전에게 국가 소유의 공노비로 보상해주었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 이후 때때로 납속자(納粟者)에 대해 종량시켜 주었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후 한층 성행하였다. 이에 따라 대구속신(代口贖身)도 성행하였다.

이는 면천종량할 노비가 자기의 자리에 타노비를 대신 밀어넣고 자기는 빠져나오는 것으로 ≪속대전≫에는 이를 법제화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규정과 같이 속신과 대구가 잘 되지 않아 공노비의 수는 계속 감소하였다.

1484년(성종 15) 35만 2000여 구였던 공노비는 1654년(효종 5) 19만여 구로 집계되었다. 18세기 이후 신분제가 크게 동요되는 추세에 따라 1801년(순조 1) 내수사 노비와 사노비들을 해방, 종량시켰는데, 그 수는 모두 6만 6067구였다. →사노비

참고문헌

『태종실록』
『세종실록』
『세조실록』
『성종실록』
『효종실록』
『영조실록』
『경국대전』
『속대전』
『대전회통』
『조선후기 노비신분연구』(전형택, 일조각, 1986)
『조선후기노비제연구』(平木實, 지식산업사, 1982)
「조선시대 납속제에 관한 연구」(문수홍, 성균관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86)
「조선후기 공노비의 신분변동」(김상환, 『경북사학』 12, 1989)
「조선후기 서원노비 신공에 대한 연구」(이수환, 『민족문화논총』 10,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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