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적의 난 ()

고려시대사
사건
1198년(신종 1), 개경에서 사노비 만적(萬積) 등이 신분 해방을 위해 일으킨 노비 저항.
사건/사회운동
발생 시기
1198년(신종 1)
종결 시기
1198년(신종 1)
발생 장소
개경(開京)
관련 인물
만적(萬積)|미조이(味助伊)|연복(延福)|성복(成福)|소삼(小三)|효삼(孝三)
내용 요약

만적의 난은 1198년(신종 1) 개경에서 사노비 만적(萬積) 등이 신분 해방을 위해 일으킨 노비 저항이다. '노비'는 남자 종 '노(奴)'와 여자 종 '비(婢)'를 합하여 부른 말이다. 개경은 정치와 경제·문화 등의 중심지였다. 그곳의 노비들은 다른 지방의 노비들보다 사회의식이 상대적으로 높았을 것이다. 무신 정변 이후 정치적 격변 속에서 만적은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국가 권력을 잡겠다는 이상을 가졌다. 하지만 같은 노비 출신인 순정(順貞)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정의
1198년(신종 1), 개경에서 사노비 만적(萬積) 등이 신분 해방을 위해 일으킨 노비 저항.
발단

고려 사회는 엄격한 신분 질서가 강조되는 가운데 특히 노비(奴婢)는 그 사회적 처지가 가장 열악하였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소수의 권신(權臣)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그들의 권력에 기생하던 노비의 정치적 ·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무신정변 이후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현저해져 천민들의 신분 해방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무신 집권기에 천민 출신의 인물이 관직에 오르고 출세하는 사례가 있었으므로 신분에 대한 전통적인 권위 의식이 무너져 갔다.

당시 일반 백성의 봉기 또한 빈번하게 발생하여 천민들이 이에 합세하거나 독자적으로 신분 해방을 위한 저항을 일으키게 되었다. 1176년(명종 6)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일어난 망이 · 망소이의 난(亡伊 · 亡所伊)이나, 1182년(명종 12) 전주(全州)에서 일어난 관노(官奴)들의 봉기 등이 대표적이다. 1196년(명종 26)에는 최충헌(崔忠獻)의 집권에 반발해 상장군 길인(吉仁)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노비들도 이에 참여한 사례가 있다.

경과 및 결과

1198년 5월에 사동(私僮) 만적(萬積) · 미조이(味助伊) · 연복(延福) · 성복(成福) · 소삼(小三) · 효삼(孝三) 등 6명이 개경 북산(北山)에서 나무를 하다가 공 · 사 노예들을 불러 모아 “무신란 이후에 고관이 천한 노예(奴隸)에서 많이 나왔으니, 장상(將相)이 어찌 종자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선동하면서 저항을 계획하였다.

만적은 국도 개경의 모든 정치 기구를 장악하고 권력가들을 단숨에 제거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노비의 숫자가 상당히 많았고, 모의 단계에서 노비들을 체계적으로 조직하려고 했던 사실이 주목된다. 만적은 동조하는 자들에게 누런빛의 종이에 '정(丁)' 자의 표식을 주었는데, 준비된 종이가 수천 장에 달하였다고 한다. 거사 당일의 행동 방법에 대해서도 그는 흥국사(興國寺)에 모여 일제히 북을 치고 소리치면서 대궐의 뜰로 몰려가면 환관(宦官)들과 관노(官奴)들이 반드시 호응할 것이라고 하였다. 환관은 궁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세세하게 알 수 있는 자들이고, 관노는 주로 대궐이나 관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공공 기관을 장악하거나 관리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유리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만적 자신과 다른 노비들은 최충헌(崔忠獻)과 자신들의 주인을 살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약속한 날에 수백 명밖에 모이지 않았으므로 4일 후에 다시 보제사(普濟寺)에 모여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때 율학박사(律學博士) 한충유(韓忠愈)의 노비 순정(順貞)이 주인에게 이를 고발함으로써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로 끝났고, 만적 등 100여 명은 죽임을 당하였다.

이 저항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무신 집권기에 신분 해방을 목표로 일어난 천민 저항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200년(신종 3) 진주(晋州)에서 공 · 사 노예들의 저항이 일어나 합주(陜州)의 저항에 가세한 일이 있었고, 밀성(密城)에서 관노 50여 명이 운문(雲門)의 저항에 합세하는 등 천민들의 저항이 계속되었다. 또한 1203년(신종 6) 개경에서 여러 가동(家僮)이 땔감을 한다는 핑계로 동교(東郊)에서 분대를 편성하고 전투 연습을 하는 사건도 있었다.

의의 및 평가

중세적 신분 질서 속에서 만적이 난을 주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신 정변 이후 대대적인 문신 살육, 잦은 권력 쟁탈로 인한 집권 세력의 빈번한 교체, 향촌 사회의 지속적인 저항 등 격변했던 사회적 상황에 따라 기존의 권위가 상실되었기 때문이었다. 만적 등의 저항은 그들이 지향한 이상이 원대하고, 세력의 조직화에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저항보다도 격렬할 수 있었다. 이들의 저항이 비록 실패했지만, 성패를 떠나 신분제 사회를 철폐하려 했던 그들의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신안식, 『고려 무인정권과 지방사회』(경인문화사, 2002)
이정신, 『고려 무신정권기 농민·천민항쟁 연구』(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1)
홍승기, 『고려귀족사회와 노비』(일조각, 1983)

논문

변태섭, 「만적난 발생의 사회적 소지: 무신난 후의 신분구성의 변질을 기반으로」(『사학연구』 4, 한국사학회, 1959; 『고려정치 제도사 연구』, 일조각, 1971)
변태섭, 「농민·천민의 난」(『한국사』 7, 국사편찬위원회, 1973)
신안식, 「공경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더냐」(『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한국역사연구회, 2022)
이정신, 「농민·천민의 봉기」(『신편한국사』 20, 국사편찬위원회, 1994)
홍승기, 「평량의 몸부림과 만적의 반항」(『한국사 시민강좌』 39, 일조각 2006)
홍승기, 「고려 무인집권시대의 유교와 민란」(『진단학보』 81, 진단학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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