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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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 / 사천조
경국대전 / 사천조
조선시대사
제도
우리 나라의 전통적 신분사회에서 개인에게 예속되어 세전(世傳)되면서 사역되었던 최하층 신분.
내용 요약

사노비는 우리 나라의 전통적 신분사회에서 개인에게 예속되어 세전(世傳)되면서 사역되었던 최하층 신분이다. 사천(私賤)이라고도 하였다. 토지·가옥과 함께 중요한 재산으로 간주되었으며, 상속·매매·증여의 대상이 되었다.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 어머니를 따라 신분이 결정되었다. 16세기 납속면천책이 실시되면서 양인이 되는 문이 넓어졌고, 부를 축적한 노비가 속전(贖錢)을 면천되는 사례도 늘어났다. 18세기 이후 법제적으로 노비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되면서 1886년 노비신분세습이 폐지되었다. 1894년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소멸되었다.

목차
정의
우리 나라의 전통적 신분사회에서 개인에게 예속되어 세전(世傳)되면서 사역되었던 최하층 신분.
내용

흔히 사천(私賤)이라고도 하였다.

사노비의 발생요인으로, 고대에는 가야정벌 뒤에 사다함(斯多含)에게 전공으로 포로 300명을 주었던 것처럼 전쟁포로가 사노비로 된 예가 있고, 고조선금법에서 도둑질한 자를 그 집의 노비로 삼았으며, 부여에서는 살인자의 가족을 노비로 삼고, 도둑질 한 자가 12배의 배상을 할 수 없을 때에는 그 자녀를 노비로 삼았으며, 남의 소나 말을 죽인 자도 노비로 삼았다.

백제에서는 간음한 부인이 남편집의 노비가 되도록 하였으며, 고구려신라에서는 채무를 이행할 수 없는 자, 극도의 빈곤으로 자녀를 파는 경우 등 절도 · 도살 · 간음 · 채무 따위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고려시대 이후 이러한 요인들이 공식적으로 노비 공급원이 된다는 규정은 보이지 않아 국가로부터의 사급(賜給) · 매입 · 세전 등이 중요 공급원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사노비는 그 상전의 토지 · 가옥과 함께 중요한 재산으로 간주되었으며, 상속 · 매매 · 증여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상전의 호적에 종파 · 나이 · 전래변별 · 부모의 신분 등이 등재되었는데 원칙적으로 성은 없고 이름만 있었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부모 중 한 쪽이라도 천인이면 천인신분으로 정해졌고, 이들의 소유권은 1039년(정종 5) 제정된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 원칙적으로 모(母)의 상전에게 있었으나, 모가 양인일 경우에는 부(父)의 상전에게 있었다.

이와 같은 노비법은 병역부담이 없는 노비의 수를 증가시켜 국방책과 관련하여 때때로 문제가 제기되었다. 상전과 사노비의 관계에 있어서 상전은 죽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떻게 다루든 법의 제재를 받지 않았으며, 상전이 국가에 반역을 하지 않는 한 어떠한 죄를 범하여도 관청에 고발할 수 없었으며, 상전을 관청에 고해바치는 것은 도덕적으로 주1을 짓밟는 것으로 간주되어 중죄(重罪)로 규정하였다.

사노비는 솔거노비(率居奴婢)외거노비(外居奴婢)로 구분되는데, 솔거노비는 주인의 경리(經理) 속에서 최소한의 의(衣)와 식(食)을 공급받았으며, 무기한 · 무제한의 노동을 제공하였다.

이들은 다시 그들의 사역활동에 따라 잡무를 담당하는 소수의 사령노비(使令奴婢)와 주로 주거지 근처의 토지경작에 치중하는 농경노비로 구분되는데, 온전한 가정생활은 불가능하였고 노비 가운데 가장 낮은 위치에 있었다.

이에 비하여 외거노비는 주인의 호적 외에 현거주지에 별도의 호적을 가지고 비교적 온전한 가정생활을 유지하며 실제로 재산소유도 가능하였다. 이들 외거노비들은 상전의 토지나 타인의 토지를 차경(借耕)하였는데, 여력이 있는 자는 다수인의 토지를 경작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수확 가운데 대략 절반을 조(租)로서 전주에게 바치는 외에, 공노비(公奴婢) 가운데 납공노비가 그들의 소속 관아에 신공(身貢)을 바치는 예에 따라 그들의 상전에게 신공을 바치고 나머지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이들을 납공노비(納貢奴婢)라고도 한다. 사노비 중에는 농작뿐만 아니라 상전의 수족이 되어 상판(商販)에 종사하거나 농장의 관리를 맡아 장리(長利)를 관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사노비를 소유하는 상전은 관인(官人) · 사족(士族) · 양인(良人)뿐만 아니라, 노비로서 노비를 소유하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재상의 집에 노동(奴僮)이 3,000명이었다는 예나, 조선 성종영응대군 염(永膺大君 琰)이 무려 1만 명 이상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예도 있다. 이것으로 볼 때 이들의 대부분은 외거노비가 틀림없으며, 노비 가운데 외거노비가 절대다수를 차지하였다고 하겠다.

이들 사노비가 대체로 양반 · 양인에 비하여 경제적으로 열악(劣惡)한 위치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능력에 따라서는 엄청난 재력을 보유할 수도 있었다.

1486년(성종 17) 8,000여 섬을 보유한 진천(鎭川)의 사노 임복(林福)은 3,000섬을 국가에 납곡(納穀)하여 그의 네 아들을 주2시켰으며, 남평(南平)의 가동(家同) 또한 그 아들을 종량시키기 위하여 2,000섬을 납곡하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토지의 사유화가 심화되어 가는 15세기 말 이후 농장주 가운데는, 귀족 · 사족 · 관인 · 양인과 더불어 천인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사노비는 상전의 의사에 따라 자유로이 매매할 수 있었는데, 조선시대 『경국대전』에는 나이 16세 이상 50세 이하의 장년노비값을 저화(楮貨) 4,000장, 15세 이하 51세 이상은 3,000장으로 규정하여 상등마(上等馬)의 4,000장과 비슷하게 정하였으며, 가옥과 토지의 경우와 같이 매매한 뒤 물릴 수 있는 기한을 15일 이내로 규정하고, 100일 이내에 관청에 신고하여 증명서를 발급받도록 규정하였다.

이 밖에 상속에 관해서도 상세하게 규정하였는데, 대체로 적처(嫡妻) · 양첩(良妾) · 천첩(賤妾) 자녀의 순으로 후박(厚薄)을 가렸고, 특히 승중자(承重子)를 우선하도록 하였다.

또한, 공노비가 사노비로, 사노비가 공노비로 되기도 하고 같은 상전 소유의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는 상전의 요구에 따라 전가족 또는 가족의 일부가 서로 교체되기도 하였다. 양 · 천의 분별을 엄격히 하고 있던 전통적 신분제 사회에서 노비로서 종량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 사노비가 상전을 대신하여 참전, 군공(軍功)을 세우거나 삼년여묘(三年廬墓)를 대행하여 공을 인정받으면 상전의 보고에 따라 종량되었다. 또, 모반사건에 공을 세우거나 열녀 · 효자로서 면천종량되기도 하였는데, 이런 경우 종량으로 인한 재산상의 손실을 보전(補塡)하기 위하여 국가는 그 상전에게 공노비로써 보상하였다.

『경국대전』에는 80세 이상이 되면 천인도 양인과 마찬가지로 노인직을 주도록 규정하였는데 이는 경로사상에 따른 것이었다. 노비들에 대한 종량의 문이 넓혀진 것은 16세기 이후 납속면천책(納粟免賤策)을 실시하면서부터이다.

1553년(명종 8) 전에 없던 한재(旱災)를 당한 경상도 지방의 재해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50섬 내지 100섬을 납속한 공사노비를 종량하도록 하였는데, 그 이후 계속되는 재난과 변방의 소요 때문에 납속제는 계속 실시되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납속책을 무제한 실시하였다.

전란 중 절대적으로 부족한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하여 전국 각처에 모속관(募粟官)을 파견하여 노비로 납속한 자에게 면천첩(免賤帖)을 발급하였다. 이듬해에는 납속사목(納粟事目)을 발표하고 모속하였는데 이 때 종량에 필요한 납속량은 15섬 정도였다. 이 정도의 재력만 있으면 아무런 제한없이 종량이 되었으며, 일단 종량된 자가 다시 납속하여 신분을 상승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전란 중 군사의 사기를 높이기 위하여 군공절목(軍功節目)을 제정하고 군공이 현저한 자에게 논상하였는데, 공사노비로 1급(級)을 참수(斬首)하면 종량, 2급이면 우림위(羽林衛) 입속, 3급이면 허통(許通), 4급이면 6품직인 수문장(守門將)을 제수하였다.

또, 그 뒤에는 모자라는 군사를 노비로 충당하기 위하여 공사천무과(公私賤武科)를 실시하여 이에 합격하면 우림위에 입속하도록 하였고, 참급무과(斬級武科)를 실시하여 공사노비도 양인과 동등하게 응과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써 노비들은 종량뿐만 아니라 벼슬할 수 있는 기회까지 주어졌다. 또 임진왜란 이후부터 지방의 속오군에는 양인뿐만 아니라 천인들도 편성되어 있어 천인들도 양역인 군역에 종사하였는데, 천인 신분으로 양역에 2대 이상 종사한 자[身賤良役]는 양인신분으로 간주하는 전통적 관례에 따라 면천종량되는 자가 계속하여 나왔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경제생활의 발달에 따라 노비들도 부력(富力)을 축적할 수 있게 되었는데 재정난 · 기근 등으로 납속제를 계속 실시함에 따라 이들을 납속, 면천토록 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 몰락하여 스스로의 생계마저 위협받는 처지에서 수많은 노비들을 부양할 경제력을 상실한 상전에게 속전(贖錢)을 지불하고 종량하는 사례가 일반화되었다. 이런 추세에 따라 1745년(영조 21)의 『속대전』에는 속전가를 100냥(兩), 즉 쌀 13섬으로 규정하였다.

조선 후기 신분제가 동요되는 추세에 따라 노비의 신분판정에 있어서도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신분이 다른 부모 사이의 소생자녀에 대하여 무조건 천계(賤系)를 따르도록 하였던 전통적 신분 세전법은 1669년(현종 10)부터 종모법을 적용하여 노의 양처(良妻) 소생 자녀에 대하여 양인이 되도록 하였는데, 이 후 몇 차례 치폐를 거듭하다가 1731년(영조 7)부터 종모법으로 확정되었다.

이로써 18세기 이후 사노비로 재력만 있으면 노비신분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문호는 항상 열려 있었으며, 이 시기에 조정에서는 ‘노비’라는 명칭 자체를 없애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법제적으로 노비제를 유지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엄격하였던 신분제도가 붕괴될 시기가 도래하였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801년(순조 1) 공노비의 해방에 이어 1886년(고종 23)부터 노비신분세습을 폐지하여 노비의 자녀들은 노비신분이 아닌 양인신분이 되게 하였으며, 이어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제출한 진의안(進議案)에 따라 신분제의 폐지와 함께 노비제 또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공노비

참고문헌

『고려사』
『태종실록』
『세종실록』
『성종실록』
『명종실록』
『선조실록』
『경국대전』
『속대전』
『대전회통』
『朝鮮後期奴婢制硏究』(平木實, 知識産業社, 1982)
「조선후기노비신분변동연구」(전형택, 서울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86)
「조선시대납속제에 관한 연구」(문수홍, 성균관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86)
「고문서를 통해본 노비의 경제적 성격」(이영훈, 『한국사학』 9, 1983)
「조선시대 사노비연구」(김용만, 『교남사학』 4, 1989)
주석
주1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이른다. 우리말샘

주2

천민이 양민이 되던 일. 납속(納粟)이나 국가에 대한 공훈 따위로 양민의 신분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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