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家系)의 연속이 중요시된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가족제도하에서는, 넓게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좁게는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가 가정내에서 발생하는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우선하는 근원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흔히 부자관계(父子關係)로 표현되는 이 관계는, 부모와 자식이 각기 독립적인 인격자임을 상호간에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발생하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자식의 부모에 대한 일방적인 예속과 종속에 따른 상하관계였다. 부자관계를 지배하는 행위규범은 효(孝) 또는 효도(孝道)로 집약될 수 있다. 이 효에 기초한 부자관계를 알아보기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태도에서 약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자식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모를 존경하는 태도를 배우고 몸에 익힌다. 그러나 아버지의 경우는 한 가족의 우두머리로서 자식에 대한 엄격한 훈육을 담당할 지배적인 인물로 모시고 섬길 것이 요구되지만, 어머니의 경우에는 인자하고 너그럽고 별로 무서워할 것이 없는 모성상(母性像)이 어려서부터 심어진다. 이런 태도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친족호칭(親族呼稱)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현대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는 호칭이기는 하지만, 전통사회에서는 아버지에게 엄친(嚴親) · 가엄(家嚴) 등과 같은 ‘엄격한’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는 호칭이 사용되었으며, 이와는 반대로 어머니는 자주(慈主) · 자친(慈親) · 자위(慈闈) · 자정(慈庭) · 노자(老慈) · 자당(慈堂) · 선자(先慈) · 선자당(先慈堂) 등과 같은 부드럽고 인자하고도 자상한 이미지가 부각된 용어로 호칭되었음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미지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아버지에게 무슨 일로 상의 또는 간청할 일이 있어도 아버지에게는 우선 ‘어려워서’ 심지어는 ‘두려워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어머니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해결해나가는 예는 오늘날 가정생활에서도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혹시 아버지의 뜻에 불복하였을 때에는 엄벌의 대상이 되거나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로 간주되지만, 어머니에게는 설령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도 비교적 쉽게 용서받을 수 있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아버지로부터 심한 꾸중을 받게 되는 경우, 어머니가 오히려 그런 자식을 너그럽게 감싸주는 예는 전통사회의 가정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자식의 어머니에 대한 비공식적인 태도 및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는 대체로 유년기의 자식에게 한정된다. 즉, 자식이 어렸을 때에는 어머니는 자식의 행동에 비교적 많은 자유를 허용하지만, 청년기로 접어들면서 행동에의 구속력이 강화되어 아버지에게 적용되는 것과 같은 존경이 요구된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지배한 전통적인 규범으로서의 효 또는 효도는 부모가 살아 있을 때 정성껏 모시는 것뿐만 아니라 사망한 뒤에도 극진히 제사를 모시는 것 등을 포함한다. 이이(李珥)는 ≪성학집요 聖學輯要≫에서 사친(事親)의 도리를 언급하면서 “대체로 효도는 부모를 섬기는 일에서 시작하고, 임금을 섬기는 일이 중간이 되며, 입신하는 것을 맨 마지막에 둔다.”는 공자(孔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이렇듯 자식의 일체의 행동은 효도와 관련하여 평가되었고, 자식은 그의 일생을 통하여 이 효도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부모의 뜻이 만일 의리에 해로운 것이 아니면 마땅히 말씀하기 전에 받들어서 조금도 어기지 말 것이요, 만일 이치에 부당한 것이면 화한 기색과 좋은 낯빛과 부드러운 말소리로 반복하여 아뢰어 꼭 들으시도록 할 것이니라.” 이이는 ≪격몽요결 擊蒙要訣≫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즉, 부모의 뜻이 부당한 것이라고 판단되면 그 잘못을 지적하고 ‘꼭 들으시도록’ 간청하라고 하였지만, 결국 부모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대로 따르든가 아니면 이를 거역하고 자유로이 행동하여도 좋다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세 번 간청하여 듣지 않으시면 부모의 뜻을 그대로 따르라.”는 말은 조선시대의 각종 교과서에 포함되어 자녀교육에 누누이 강조되어온 교훈들 중의 하나였다.
우리 나라의 속담에 ‘아비만한 자식 없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해 주는 것 같다. 즉, 자식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 아버지만은 못하다고들 한다. 효도를 중요시한 조선시대의 문화적인 전통은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효자를 낳았고, 그들의 지극한 효심은 학자들의 문집에 담기거나 효자비(孝子碑)의 비문에 실려서 가문의 자랑거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덕행(德行)의 표준이 되어왔다.
효행의 본보기로 기록에 남아 있는 사례들 중에서 특히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면서 교화의 일익을 담당하였던 효자의 전형적인 행위는 아마도 자기희생적인 정신으로 사경의 부모를 구출하여낸 효자들과 3년상 기간중 여막생활(廬幕生活)을 해낸 효자들인 것 같다. 조선시대에 유교적인 인간상을 정립하는 데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던 ≪오륜행실도≫에 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효자 4인, 충신 6인, 열녀 6인 등 모두 16인이 실려 있는데, 그 중 효자의 두 가지 사례를 보기로 하자.
첫번째 예는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고산현(高山縣: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의 아전이었던 유석진(兪石珍)은 아버지가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려서 날마다 한번씩 발작을 하며 기절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를 밤낮으로 곁에 모시고 간호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하늘을 쳐다보고 울면서 사방으로 의원과 약을 구하러 다니기도 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그 병에는 살아 있는 사람의 뼈를 피에 섞어서 먹이면 낫는다.”고 한 말을 듣고, 그는 곧 자신의 왼쪽 무명지를 잘라 그것을 피에 섞어 아버지에게 먹였더니 병이 씻은듯이 나았다고 전한다.
두 번째 예는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에 경상도 성주(星州) 사람인 김자강(金自强)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이 잘 받들었다. 어머니가 늙어서 죽으니 김자강은 ≪가례 家禮≫에 의하여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와 합장을 하였다. 그런 다음 3년 동안 여막에서 살면서 삼년상을 마쳤다.
그런 뒤에 자강은 또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하여 3년 동안 여막생활을 더 하겠다고 하여 집으로 돌아갈 것을 거절하매, 그의 처가사람들이 억지로 집에 돌려보내려고 그 여막에 아예 불을 질러버렸다. 자강은 그 여막이 타는 불빛을 돌아다보고 하늘을 향하여 통곡하고 땅을 치면서 그를 붙들고 가던 사람들을 뿌리치고 부모의 무덤으로 돌아가 사흘 동안 무덤 앞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감동한 처가사람들은 다시 여막을 지어주고 살게 하였다. 자강은 그 뒤 3년 동안 이 여막에서 어머니의 상 때와 똑같이 살았다고 한다. 첫번째 예에서와 같이 손가락을 끊는 극단적인 수단으로 생명을 구하려는 노력은 효자뿐만 아니라 효녀 및 효부(孝婦)들의 사례에서도 더러 보이고, 심지어는 남편의 생명을 구하려는 열부(烈婦)들도 간혹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점은 그것이 대등한 인간관계에 기초해서 우러난 행동은 아니라는 점이다. 효나 열(烈)의 대상은 평등한 관계에 있는 어느 한 쪽이 아니라 상하관계의 상위에 있는 부모 또는 시부모 및 남편이라는 사실이다.
혹시 예외적인 경우로 알려지지 않은 사례가 있을는지도 모르지만 자식이나 며느리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부모나 시부모가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여 생명을 구해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남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곧 전통사회의 가족생활이 철저한 부모 중심이요, 남편 중심이라는 점을 말하여주고 있다. 부모가 사망한 뒤 삼년상 기간에 여막생활을 하는 일은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면 흔히 따랐던 관습이었다.
즉, 상복을 입는 3년 동안 부모의 무덤 옆에다 여막이라고 불리는 임시거처로서의 움막을 지어 생명을 부지할 만큼 최소한의 음식만을 들면서 매일 상을 올리고 곡을 하면서 생활하는 것이다. 이 여막살이를 하는 기간에는 일체의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혹시 관직에 있던 상주라면 그 관직도 버리고 삼년상을 치러야 했다.
여막살이를 하는 상주는 물론이고, 여막살이를 하지 않는 경우에도 관직에 있는 사람이 부모상을 당하면 관직을 그만두는 것이 통례였던 것 같다. 정약용(丁若鏞)도 부친상을 당하여 여막살이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31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을 그만두고 여막살이를 시작해서 33세에 복을 벗고 다시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에 올랐다.
이 여막과 관련해서 ‘여막방’의 관습에 대하여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여막방은 사람이 죽었을 경우 매장하기 전에 몇 달 동안 관을 대체로 사랑채에 있는 한 방에 안치해놓고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여막살이를 아예 집안에서 하는 풍습이다. 달레(Dallet,C.C.)는 ≪조선교회사≫의 서론에서 여막방의 풍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선 시체를 두꺼운 나무관 속에 넣고 그것을 특별히 이 목적을 위하여 차리고 꾸며놓은 방에 몇 달 동안 둔다. 시체를 둘 만한 방을 가지지 못한 평민은 집 밖에다 두고, 비를 가리기 위하여 짚으로 엮은 거적으로 덮는다. 이 시체가 있는 방에는 하루에 적어도 네 번은 곡(哭)을 하러 가며, 그 방에 들어가려면 특수한 옷차림을 한다.” 달레가 여막방이라는 용어는 쓰지 않았지만 그것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또한 여막방을 갖추지 못한 평민들이 하는 관습으로 초분(草墳)의 관습이 있다. 이 초분의 관습은 남해의 도서지방에서 비록 드물기는 하지만 아직도 행해지고 있는데, 여막방은 어느 지방의 풍습인지 또는 그 분포상황 등에 대하여 달레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여막방을 두는 풍습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보고는 없다.
앞에서 우리는 ≪오륜행실도≫에 담겨 있는 효자의 사례 두가지를 인용하였지만, 이는 단지 교훈적인 사례일 뿐 효도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는 없다. 즉, 손가락을 잘라 부모의 생명을 구한다든가 여막살이로 효도의 의무를 수행하는 예에서 마치 부모가 생명의 위기에 처하였거나 사망한 뒤에 효의 진위(眞僞)가 판명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효도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부모가 살아 있을 동안에 잘 모시고 기쁘게 해드리는 일인 것 같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어버이를 섬기는 일은 부모의 뜻을 거역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일이고, 부인들에 대해서는 의복이나 음식, 거처하는 것에 마음을 기울여야 효도하고 봉양하는 법을 안다 할 것이다. …… 너희 형제는 새벽이나 밤에 방이 찬가, 따뜻한가 항상 점검하고 요와 이불 밑에 손을 넣어보고 차면 항상 따뜻하게 몸소 불을 때드리고, 그러한 일에 종들을 시키지 않도록 하여라. 그 수고로움도 잠깐 연기 쏘이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네 어머니는 무엇보다 더 기분이 좋고 기쁠 것이다. 어머니가 기뻐하시면 너희들도 즐겁지 않겠느냐? …… 두 아들이 효자가 되고 두 며느리가 효부가 된다면 나야 유배지에서 이대로 늙어죽는다 하여도 아무 슬픔이 없겠다. 명심하길 바란다.”
이와 같이 그는 온갖 방법을 다 짜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것을 아들에게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림으로써 자식은 즐거움을 얻을 것이고 이것이 결국 화목한 가정생활을 가져올 것이라는 정약용의 당부이다.
이렇게 본다면 효도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서의 가족내에서 일어나는 일상생활, 즉 가정생활의 조화 있는 운영을 보장하는 하나의 제도적 장치였으며, 이 장치는 적어도 전통사회에서는 가정생활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사회의 질서확립에 크게 이바지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는 물질중시의 풍조가 만연되면서 전통사회의 미풍양속이 사라져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로 나타나자 인간성 회복의 한 수단으로 효도를 강조하게 되었고, 드디어는 효자 · 효녀를 대학입시에서 특례입학시키는 제도까지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