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물왕의 7대손이며, 급찬(級飡) 구리지(仇梨知)의 아들이다. 진골 출신으로 풍채가 청수(淸秀)하고 지기(志氣)가 방정(方正)하였다. 화랑으로 추대되어 1,000여명의 낭도를 거느렸으며, 562년(진흥왕 23) 9월 이사부(異斯夫)가 대가야를 정벌할 때 십오륙세의 어린 나이로 종군을 신청하였다.
귀당비장(貴幢裨將)으로 출정, 기병 5,000을 거느리고 국경선에 있는 적군의 성문인 전단량(旃檀梁)을 기습하여 대가야를 멸망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왕에게서 가야인 포로 300명(혹은 200명)을 노비로 하사받았으나 모두 놓아주었다.
다시 왕으로부터 전지를 하사받았으나 사양하다가 왕이 이를 억지로 권하므로 어쩔 수 없이 알천(閼川)의 불모지만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관랑(武官郎)과 우정을 맺어 사우(死友)를 약속하였는데, 무관랑이 병사하자 7일간을 통곡하다가 17세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