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안검법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 광종 때 호족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본래 양인이었다가 노비가 된 사람을 안검하여 방량(放良)하게 한 정책.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고려 광종 때 호족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본래 양인이었다가 노비가 된 사람을 안검하여 방량(放良)하게 한 정책.
내용

956년(광종 7)에 실시하였다.

신라 말·고려 초에 전국의 대소 호족들은 각각 토지와 노비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증식시켜 경제적 기반을 공고히 하기에 노력을 경주하였다. 호족에게 노비가 증대된다는 사실은 곧 호족의 세력이 비대해져 왕권에 대한 위협도 증대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태조 때부터 호족의 노비소유에 대해 제한을 가하려했으나 호족세력의 반발을 우려하여 편의에 좇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지향했던 광종은 노비의 안검을 명하여 호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광종은 본래 양인으로 고려의 통일전쟁 때 포로가 되어 노비가 된 자들과 호족들이 스스로의 세력을 믿고 강제로 노비화시킨 자들을 본래의 신분인 양인으로 회복시켜 주었다.

이러한 노비안검법의 시행은 표면적으로는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의 신분을 바로 찾아준다는 의미였다. 실제로는 호족들의 사유물로 그들에게 귀속되던 세(稅)를 국가의 세로 전환시킨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호족의 사병(私兵)으로도 이용되던 노비의 수효가 격감되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호족세력의 약화와 왕권의 신장이라는 이중적 효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안검의 대상이 된 노비는 주로 노비 자신들의 신고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조처는 많은 반대에 부딪쳤다. 특히, 대목왕후(大穆王后)는 이 법의 폐지를 간곡히 간했으나 실패하고, 광종 때에는 계속해서 강행되었다.

변천과 현황

경종 이후 호족과 귀족관료의 세력이 비대해짐에 따라 이 때 해방된 노비의 환천이 다시 이루어졌다. →노비환천법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귀족사회(高麗貴族社會)와 노비(奴婢)』(홍승기, 일조각, 1983)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