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와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에 의하면 신라 선덕왕 이전에 파진찬(波珍飡)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하여 ‘곡사(鵠寺)’라 하였는데, 원성왕이 죽자 이곳에 능을 만들고 지금의 위치로 절을 옮겼다.
그 뒤 경문왕이 즉위하여 꿈에 원성왕을 보고 이 절을 증축한 뒤 능원수호와 명복을 빌게 하였다. 헌강왕 때 이 절의 이름을 대숭복사로 하였다고 하나 그 뒤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지만,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편으로 미루어 볼 때 조선시대까지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근래까지 절터가 어디인지 알지 못하다가 1931년에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1931∼1935년 사이에 발견된 비편(碑片)을 통하여 이곳이 숭복사지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숭복사 비편은 그 뒤로도 절터와 골동품점 등에서 잇달아 발견되어 현재까지 13편을 헤아리게 되었고, 총 약 100자에 달하는 글씨가 판독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이곳의 지세 및 금당지(金堂址), 석단(石壇)은 규모면에서 불국사와 비슷하며 석통(石桶)이 있다. 또 이곳에서 ‘國寺大雄(국사대웅)’과 ‘蓋瓦大雄(개와대웅)’ 등의 문자가 새겨진 평와(平瓦)를 비롯, 쌍두귀부(雙頭龜趺)가 발견되었고, 최근에는 금동제 금구(金口)와 비석의 부서진 조각 3개가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동서로 탑 2기가 있다. 숭복사지 삼층석탑은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으며, 기단부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양각되어 있고 1층 옥신의 4면에는 문비(門扉)가 조각되어 있으며 각 옥개석(屋蓋石)의 받침이 4단으로 된 삼층석탑이다. 동탑은 서탑과 같은 크기와 양식으로 보이나 현재는 일부 파괴된 기단부와 1층 옥신, 2개의 옥개석만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