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崔致遠, 857~?)이 당에서 귀국한 뒤 서서원(瑞書院) 학사(學士)로 재임하면서 왕명을 받아 사산비명(四山碑銘)을 찬술하였다. 비명(碑銘) 찬술 왕명은 885년(헌강왕11) 3월에 「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명」, 886년 7월에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명」, 890년에 「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의 순서로 내렸는데, 이 비명은 886년 봄에 왕명을 받아 작성하였다. 찬술 완성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각 비명의 내용 구성과 비명에 기재한 최치원의 관직명으로 보아, 890년에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보다 먼저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비명은 서문과 명문으로 구성되었는데, 서문은 도입부와 전개부로 나뉜다. 도입부에는 대숭복사 불사(佛事)를 주도한 임금의 덕과 나라의 태평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았다. 전개부에는 연혁을 적었는데, 대숭복사의 유래와 기원, 경문왕과 곡사(鵠寺)의 중창, 헌강왕의 등극과 대숭복사 개창, 정강왕의 비명 찬술 명령 계승, 진성여왕의 비명 찬술 독려, 최치원의 비명 찬술 동기와 과정 등 모두 여섯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경문왕이 불사를 통해 유교적 효성을 다하려는 군왕이었고, 헌강왕이 곡사의 이름을 대숭복사로 바꾸면서 관리를 파견하여 재정을 돌보는 한편 국가가 관할하는 정법사(政法司)에 예속시켜 조덕(祖德)을 기리기 위해 곡사를 중창하였던 경문왕의 뜻을 계승하였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정강왕이 대숭복사를 중히 여겼던 헌강왕의 노력을 이었고, 진성왕도 미처 완성되지 못한 비명의 찬술을 독려하였음을 적어 경문왕계 왕실과 대숭복사의 긴밀한 관계를 부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