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은 뒤, 당은포(唐恩浦)와 같은 주요 항구를 거점으로 사신이나 유학생, 유학승을 파견하였다. 이들을 태운 배는 당은포에서 서해의 북쪽 연안으로 따라 가다가 요동반도의 끝 노철산(老鐵山)에서 장산군도(長山群島)를 따라 산동반도의 등주(登州)에 도달하였다. 그 뒤에는 장산곶(長山串)에서 바로 서해를 횡단하여 산동반도의 등주나 적산(赤山)에 이르는 항로가 빈번히 이용되었고, 나주(羅州) 회진(會津)에서 서해를 비스듬히 건너 당나라의 양주(揚州)나 명주(明州)에 이르는 항로도 활용하였다.
따라서 이곳에는 사신이나 유학생, 유학승 등 신라의 공식적 업무를 맡은 이들이 주로 왕래하였으므로, 당나라는 이들을 위해서 공식적인 숙박소로 신라관을 설치하였다. 그 뒤 이곳에서 장안(長安)에 이르는 간선도로의 주변에도 신라관이 꾸준히 설치되었다. 아울러 신라의 당은포에도 당나라 사람들을 위한 객관(客館)이 설치되었다.
신라소에 거주하던 신라인들은 자치기구인 신라소(新羅所)를 설치하여 당나라 연해 각지의 신라인을 통할하였다. 일본의 승려 엔닌이 기록한 일기체의 기행문인 『 입당구법순례행기』 권2에는 엔닌이 탄 귀국선은 풍랑에 떠밀려 문등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 이르렀는데, 그는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 기거하면서 재당 신라인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를 받으며 당에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을 구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신라와 당나라의 외교 관계를 상징하는 시설이자 재당 신라인의 활동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고려 때에도 당대의 신라관을 이어 곳곳에 객관이 설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