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당구법순례행기 ()

고대사
문헌
일본 승려 엔닌[圓仁]이 당나라에서의 구법순례 과정을 서술한 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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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입당구법순례행기는 일본 승려 엔닌이 당나라에서의 구법순례 과정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기행문이다. 이 책은 전4권으로 838년 6월 13일부터 847년 12월 14일까지의 기간에 대한 기록이다. 그 내용은 견당사로 당에 간 엔닌이 불교 공부를 하고 불교탄압으로 귀국한 일련의 과정이다. 이 가운데 주목할 점은 엔닌이 당의 여행 허가를 받을 때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에 머물며 재당 신라인의 도움을 받았고 귀국 시에 청해진을 거쳐 일본에 도착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재당 신라인과 장보고의 활동에 대해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정의
일본 승려 엔닌[圓仁]이 당나라에서의 구법순례 과정을 서술한 견문록.
개설

일본 승려 엔닌이 당(唐)에서의 구법(求法) 과정을 전4권으로 기록한 일기체의 기행문이다.

편찬/발간 경위

엔닌은 794년에 지금의 회목현(栃木縣) 하도하군(下都賀郡)인 하야국(下野國) 도하군(都賀郡)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임생씨(壬生氏)이지만, 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 수 없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9세 때 대자사(大慈寺)의 광지(廣智)에게 맡겨졌으며, 15세 때에는 일본 천태종(天台宗) 개조(開祖)이며 연력사(延曆寺)를 창건한 최징(最澄)의 제자가 되었다.

813년 20세 때 관시에 급제한 이후 다음 해에 득도하였으며, 816년에 동대사(東大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비구가 되었다. 다음 해에는 스승인 최징의 동국순석(東國巡錫)에 수행하여 상야국(上野國)의 연야사(緣野寺)에서 최징으로부터 전법관정(傳法灌頂)을 받았다.

822년 최징이 입적(入寂)한 후에는 수년 동안 비예산(比叡山)에 머무르며 불법(佛法)을 설파하며 수행을 계속하였다. 이후 속세로 나아가 불법을 전파하였는데, 828년에는 법륭사(法隆寺)에서 『법화경(法華經)』](E0018856)을 강론하였고, 다음 해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에서 『법화경』과 『인왕경(仁王經)』을 강론하며 불법수행에 매진하였다.

835년에 제17차 견당사(遣唐使)에 천태청익승(天台請益僧)으로 임명되어 당으로 구법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폭풍우로 인하여 두 번이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838년 6월 17일 일본의 박다(博多)를 출발하여 7월 2일 당의 양주(揚州) 해릉현(海陵縣) 백조진(白潮鎭) 상전향(桑田鄕) 동양풍촌(東梁豊村)에 도착함으로써 목적을 이루었다.

엔닌은 당에서 구법순례를 하며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우고, 양주 개원사(開元寺)의 전아(全雅), 장안(長安) 대흥선사(大興善寺)의 원정(元政), 청룡사(靑龍寺)의 의진(義眞) 등으로부터 밀교(密敎)를 배웠다. 또 오대산(五臺山)을 순례하였고, 상행삼매(常行三昧)의 기초가 되는 법조류염불(法照流念佛)을 배웠다. 그러나 당 무종의 불교 탄압인 회창폐불(會昌廢佛)을 피해 847년 9월 2일에 산동반도의 적산포(赤山浦)를 출발하여 청해진(淸海鎭)을 거쳐서 9월 17일에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귀국한 이후 엔닌은 848년 3월에 전등대법사(傳燈大法師)의 위를 제수받았고, 7월에는 내공봉십선사(內供奉十禪師)에 보임되었으며, 854년에 연력사의 주지가 되면서 일본 천태종의 제3세 좌주(座主)가 되었다. 이후 계속 불법을 수행하다가 864년 1월에 71세로 입적하였다.

일본 조정에서는 그해 2월에 법인대화상(法印大和尙)의 위를 수여하였고, 866년 7월에는 자각대사(慈覺大師)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이것은 일본에서 처음으로 ‘대사’라는 시호를 내린 것이다. 저서로는 『입당구법순례행기』 이외에도 『금강정경소(金剛頂經疏)』와 『현양대계론(顯揚大戒論)』 등 10여 편이 있다.

서지적 사항

『입당구법순례행기』는 전4권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서 권2는 4월 28일부터 5월 16일까지의 내용이 권3과 중복되어 기록된 부분이 있다. 그리고 중복된 부분의 내용은 거의 동일하지만, 권2에는 누락된 부분이 권3에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내용

『입당구법순례행기』 권1은 838년 6월 13일부터 839년 4월 18일까지의 기록이다. 6월 17일에 일본을 출발하여 7월 2일에 당에 도착한 후 견당사 일행은 장안으로 향하였다. 엔닌은 양주 개원사에 머무르며 불경(佛經)을 필사(筆寫)하고 불법을 배우는 와중에도 당 조정에 천태산(天台山)으로의 순례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의 요청은 거절당하였고 견당사 일행과 귀국하기 위하여 초주를 거쳐서 해주에 이르렀다. 그러나 엔닌은 당에서의 구법을 결심하고 귀국선에서 내렸지만 곧 발각되어 839년 4월에 다시 견당사 일행과 귀국길에 올랐다.

『입당구법순례행기』 권2는 839년 4월 19일부터 840년 5월 16일까지의 기록이다. 엔닌이 탄 귀국선은 풍랑에 떠밀려 6월에 문등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 이르렀다. 그는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 기거하면서 재당 신라인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를 받으며 당에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을 구하였다. 마침내 840년 2월에 당 조정으로부터 여행 허가를 받은 엔닌은 오대산으로 구법순례를 떠나 5월에 오대산 대화엄사(大花嚴寺)에 도착하였다.

『입당구법순례행기』 권3은 840년 5월 17일부터 843년 5월 26일까지의 기록이다. 엔닌은 오대산의 여러 지역을 순례하면서 천태종의 고승들에게 강론을 들으며 불경을 필사하였다. 그리고 840년 8월에 장안에 도착하여 자성사(資聖寺)에 머무르면서도 일본에 없는 불경을 필사하였고, 또한 고승들을 찾아 지념(持念)의 비법을 전수받으면서 범어(梵語)도 익혔다. 그러나 842년 10월에 당 무종에 의한 대대적인 불교탄압인 회창폐불(會昌廢佛)을 만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입당구법순례행기』 권4는 843년 6월 3일부터 847년 12월 14일까지의 기록이다. 845년 5월에 엔닌도 강제로 환속(還俗)되자 귀국 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장안을 떠나 양주 · 초주 · 등주 등을 거치면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구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그러나 재당 신라인들의 도움으로 847년 7월에 귀국 길에 오르게 되었으며, 9월 2일에 당의 적산을 출발하여 청해진을 거쳐 9월 17일에 일본의 박다에 도착하였다. 엔닌은 일본을 떠난 지 9년 3개월 만에 귀국하였다.

의의와 평가

엔닌은 자신의 견문을 근거로 당시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문헌에 전해지지 않는 다양한 사실들을 『입당구법순례행기』에 기록하였다. 특히 재당 신라인과 장보고의 활동에 대하여 많은 내용들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통하여 장보고가 청해진을 중심으로 당-신라-일본을 연결하는 교역 네트워크(net work)를 형성하며 동아시아의 해상교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입당구법순례행기』(신복룡, 선인, 2007)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엔닌 지음·김문경 역주, 중심, 2001)
『입당구법순례행기』(신복룡, 정신세계사, 1991)
「『입당구법순례행기』를 통해 본 신라의 교역과 불교의례」(이형우, 『민족문화논총』 54, 2013)
「『입당구법순례행기』 해제」(이유진, 『동국사학』 48, 2010)
「엔닌의 입당구법과 재당신라인사회의 정보력 -『입당구법순례행기』를 중심으로-」(이유진, 『동국사학』 46, 2009)
「엔닌의 당 유학과 신라인」(이병로, 『한일기업경영의 제문제』 2, 2009)
「『입당구법순례행기』고 –재당신라인들과의 교류를 중심으로-」(이영아, 『일어일문학연구』 36-1, 2000)
「9세기 재당 한국인에 대한 고찰 -『입당구법순례행기』를 중심으로-」(이영택, 『논문집』 17,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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