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성은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와 건천리 사이에 있는 해발 438m의 성재산(城在山)의 백령(栢嶺 : 일명 잣고개) 정상부를 감싸면서 축성된 백제 말기의 테뫼식산성이다. 백령성은 ‘백령산성(栢嶺山城)’이라고도 하는데, 남동쪽 성벽은 정상부 가까이를 지나고 있고, 북쪽 성벽은 약간 내려와 있어 전체적으로는 남고북저(南高北低)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207m인데, 동벽 50m, 서벽 50m, 남벽 70m, 북벽 37m이다. 남벽에 비해 북벽의 길이가 짧기 때문에 전체적인 평면 형태는 사다리꼴이다. 동벽은 모두 유실되었지만, 나머지 부분은 잔존 상태가 양호하여 성벽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현재 1990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백령성의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토층은 단일 문화층이며, 유물은 백제 말기까지의 유물들만이 출토되었을 뿐 이후 시기의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리고 남문과 북문, 목곽시설 내에서 조사된 토층에는 불탄 흔적과 목탄 및 탄재들이 확인되어 화재를 확인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백령성은 백제 말기까지 단기간 동안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어느 시점에 이르러 화재와 함께 각종 시설물들이 소실되면서 성의 기능도 폐쇄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백령성은 2003년 2월에 정밀 지표조사를 실시하였고, 이것을 바탕으로 같은 해 8월에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2004년에 1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이때는 백령성 내부를 포함한 남벽 구간 일대를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하여 남문, 보도(步道)시설, 토광유구 3기, 원형 주공(柱孔), 목곽(木槨)시설 등을 확인하였다. 또한 2005년에는 2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이때는 북벽 구간 일대를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하여 북문지(北門址)와 치(雉)를 확인하였다.
성벽은 기저부를 생토층까지 50㎝ 굴착하여 기저부를 조성하였으며, 성돌은 길이 40∼50㎝, 넓이 20∼25㎝의 것이 중심 크기를 이루고 있다. 현재 잔존하고 있는 성벽의 높이는 외벽 7.6m, 내벽 2.2m 정도이며, 내외벽의 폭은 4m 내외이다.
성벽과 관련한 부대시설은 치 1개소와 성문 2개소가 있다. 치는 북서벽 모퉁이 성벽구간에 돌출되어 있는데, 평면 형태는 길이 6.4m, 넓이 1.1m로 양쪽변이 길쭉한 세장방형이며, 잔존높이는 4.2m 정도가 남아 있다. 성문은 남문과 북문이 설치되었다. 남문은 현문식(懸門式) 즉 다락문식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북문은 대부분이 훼손되어 측면 및 바닥의 일부만이 남아 있다. 이밖에 성내 부대시설로는 보도시설, 구들시설, 목곽시설 등이 있다.
유물은 기와·토기·철기·목기 등이 출토되었다. 기와는 대부분이 삼국시대의 백제 기와편들이다. 이 가운데는 명문(銘文)이 찍힌 다수의 인장와(印章瓦)가 출토되었는데, ‘이정(순)신 정사와(耳停(淳)辛 丁巳瓦)’, ‘무오와 이정(순)신(戊午瓦 耳停(淳)辛)’, ‘율현병진와(栗峴丙辰瓦)’ 등이 있다. 토기와 철기는 대부분이 편들로서 성내 곳곳에서 발견되었으며, 삼국시대 말 백제 토기로 판단되고 있다.
백령성은 금산군의 서남쪽에 치우친 산간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645m의 오대산과 해발 878m인 대둔산에서 뻗어 있는 높은 산봉들로 인해 주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없다. 대체로 산성은 주변 일대를 한눈에 감시할 수 있는 곳에 축조하는데, 백령성은 일반적인 산성의 입지와는 다르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백령성의 문지는 현문식 구조인데, 이것은 주로 신라 산성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백제 산성에서는 보고된 예가 없다. 또한 치도 백제 산성에서는 거의 확인되지 않은 것이다.
백령성은 산간 협곡통로에 위치하여 주변으로 연결되는 능선 일대를 장악하면서 교통로를 차단하고, 백제 중앙과 동계(東界)의 주현(州縣)을 연결하는 길목을 감시·차단하는 관문(關門)과 같은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와 함께 낙동강유역의 가야세력과 연결되는 신속한 이동 통로로서 매우 중요한 거점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백령성이 위치한 교통로는 신라의 백제 침공로 가운데 하나인 탄현(炭峴)으로 통하는 주요 통로로 주목되어 왔다. 따라서 금산지역은 신라에게는 백제 침공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요충지였으며, 백제에게는 내륙 깊숙한 곳에서 신라를 방어하는 전초기지의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지정학적·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와 함께 백령성은 다양한 시설과 유물이 확인되어 백제 산성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특히 명문이 찍힌 다수의 인장와가 출토되어 문자기록이 부족한 백제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