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에 있는 삼국시대 포곡식으로 축조된 백제의 성곽. 산성.
개설
역사적 변천
내용
성벽은 기저부를 생토층까지 50㎝ 굴착하여 기저부를 조성하였으며, 성돌은 길이 40∼50㎝, 넓이 20∼25㎝의 것이 중심 크기를 이루고 있다. 현재 잔존하고 있는 성벽의 높이는 외벽 7.6m, 내벽 2.2m 정도이며, 내외벽의 폭은 4m 내외이다.
성벽과 관련한 부대시설은 치 1개소와 성문 2개소가 있다. 치는 북서벽 모퉁이 성벽구간에 돌출되어 있는데, 평면 형태는 길이 6.4m, 넓이 1.1m로 양쪽변이 길쭉한 세장방형이며, 잔존높이는 4.2m 정도가 남아 있다. 성문은 남문과 북문이 설치되었다. 남문은 현문식(懸門式) 즉 다락문식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북문은 대부분이 훼손되어 측면 및 바닥의 일부만이 남아 있다. 이밖에 성내 부대시설로는 보도시설, 구들시설, 목곽시설 등이 있다.
유물은 기와·토기·철기·목기 등이 출토되었다. 기와는 대부분이 삼국시대의 백제 기와편들이다. 이 가운데는 명문(銘文)이 찍힌 다수의 인장와(印章瓦)가 출토되었는데, ‘이정(순)신 정사와(耳停(淳)辛 丁巳瓦)’, ‘무오와 이정(순)신(戊午瓦 耳停(淳)辛)’, ‘율현병진와(栗峴丙辰瓦)’ 등이 있다. 토기와 철기는 대부분이 편들로서 성내 곳곳에서 발견되었으며, 삼국시대 말 백제 토기로 판단되고 있다.
특징
의의와 평가
또한 백령성이 위치한 교통로는 신라의 백제 침공로 가운데 하나인 탄현(炭峴)으로 통하는 주요 통로로 주목되어 왔다. 따라서 금산지역은 신라에게는 백제 침공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요충지였으며, 백제에게는 내륙 깊숙한 곳에서 신라를 방어하는 전초기지의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지정학적·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와 함께 백령성은 다양한 시설과 유물이 확인되어 백제 산성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특히 명문이 찍힌 다수의 인장와가 출토되어 문자기록이 부족한 백제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참고문헌
- 『금산 백령성 종합정비기본계획: 최종보고서』(충청남도역사문화원, 2012)
-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편』(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 『금산 백령산성: 지표·시굴조사 보고서』(충청남도역사문화원, 2004)
- 「금산 백령산성 유적 출토 문자 자료와 현안」(이재철, 『목간과 문자』 13, 2014)
- 「금산 백령산성 출토 문자기와의 명문에 대하여: 백제 지방통치체제의 한 측면」(이병호, 『백제문화』 49, 2013)
- 「금산 백령산성의 구조와 성격」(최병화, 『호서고고학』 17, 2007)
- 「금산 백령산성 발굴조사 개보」(최병화, 『한국성곽학보』 9, 2006)
- 「금산 백령산성 출토 명문와 검토」(강종원, 『백제연구』 39,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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