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등은 함통(咸通) 9년인 868년에 제작되었으며, 높이는 350㎝이고,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화사(火舍)의 팔각기둥에는 136자의 명문이 음각되었고, 서체는 해서체이다. 한 기둥에 각각 두 줄씩 10행에 걸쳐서 명문을 기록하였으며, 9행과 10행의 세주(細注)는 다시 각각 두 줄로 구성되었다.
명문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행에서 6행까지는 868년에 경문대왕과 문의왕후(文懿王后), 큰 공주가 주관하여 승려 영□(靈□)이(가) 석등을 건립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7행에서 10행까지는 891년에 추가한 것으로 승려 입운(入雲)이 석등의 유지비를 위해서 곡식 100석으로 오호비소리(烏乎比所里)에 사는 공서(公書)와 준휴(俊休) 두 사람이 논을 매입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등기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경문대왕(景文大王)님과 문의황후(文懿皇后)님, 그리고 큰 공주님께서는 등불을 밝힐 석등을 세우기를 바라셨다. 당(唐) 함통 9년 무자해 2월 저녁에 달빛을 잇게 하고자 전(前) 국자감경(國子監卿)인 사간(沙干) 김중용(金中庸)이 (등을 밝힐) 기름의 경비로 3백석을 날라 오니 승려 영□(靈□)이(가) 석등을 건립하였다.
용기(龍紀) 3년 신해년 10월 어느 날 승려 입운(入雲)은 서울에서 보내준(또는 서울에 보내야 할) 조(租) 1백석으로 오호비소리의 공서와 준휴 두 사람에게서 그 몫의 석보평(石保坪) 대업(大業)에 있는 물가의 논 4결[논은 5뙈기로 되어 있는데, 동쪽은 영행(令行)의 토지이고 북쪽도 마찬가지다. 남쪽은 세택(洗宅)의 토지이고, 서쪽은 개울이다]과 물가로부터 멀리 있는 논 10결[논은 8뙈기로 되어 있는데, 동쪽은 영행의 토지이고, 서쪽도 북쪽도 같은 토지이다. 남쪽은 세택의 토지이다]을 영구히 샀다.
석등의 명문을 읽는 것과 관련하여 종래에는 많은 혼란이 있어 내용을 이해하는데 불분명하였다. 그러나 1983년에 정조묘(鄭早苗)의 판독 이후 서쪽의 기둥에서부터 왼쪽에서 오른쪽의 차례로 읽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9행과 10행의 세주(細注)도 각기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읽어야 한다.
명문의 7행에서 10행까지의 내용은 일종의 토지매매문서의 성격으로, 현재 통일신라시대 토지매매의 관행과 토지의 종류, 그리고 토지의 소유관계 및 생산력 등 당시의 사회경제사 연구에 기초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와 함께 이 석등은 신라의 석등 중에서 유일하게 명문이 있기 때문에 그와 비슷한 다른 석등의 연대를 추정하고 각 부의 양식 및 조식(彫飾)의 비교에도 표준이 되고 있다. 또한 명문의 서체는 북위(北魏)와 당(唐) 초기의 글자가 융합된 것으로, 우리나라 서체의 변모를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