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흥사 종명 ( )

고대사
유물
규흥사에 있었던 남북국시대 동종(銅鐘)의 명문.
정의
규흥사에 있었던 남북국시대 동종(銅鐘)의 명문.
개설

규흥사의 위치 및 창건과 폐사 시기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규흥사종은 대중(大中) 10년인 856년에 제작되었는데, 언젠가 일본으로 반출되어 대마도(對馬島) 상현군(上縣郡) 봉촌(峰村)의 통칭 해신신사(海神神社)에 보존되어 왔다. 그러나 명치연간(明治年間)의 신불분리(神佛分離) 운동의 혼란기 때 사라졌다.

내용

규흥사종명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대중 10년 병자 8월 3일에 규흥사의 종이 완성되었다. 들어간 놋쇠가 합하여 350정(廷)이니, 총 가격이 1,050석(石)이다. (결락) 애초에 이 서원(誓願)을 일으킨 청숭법사(淸嵩法師)와 광렴화상(光廉和上)이 원한 것은 여러 가지를 시납(施納)하신 이나 불법(佛法)을 듣고 쫓아서 기뻐한 이나 모두 더없는 깨달음을 이루기를.

당시의 현령(縣令)은 함량(含梁) 훤영(萱榮)이며 (결락)

당시의 도내(都乃)는 성안법사(聖安法師) (결락)

상촌주(上村主)는 삼중사간(三重沙干)인 요왕(堯王) (결락)

제이촌주(第二村主)는 사간인 용하(龍河) (결락)

제삼촌주(第三村主)는 급간(及干) 귀진(貴珍) (결락)

대장(大匠)은 대내말(大奈末) 온금(溫衾)이다.

의의와 평가

규흥사종의 명문에는 ‘삼중사간(三重沙干)’과 ‘상촌주(上村主)’·‘제이촌주(第二村主)’·제삼촌주(第三村主)’ 등이 기록되어 있어 신라 하대의 중위제(重位制)와 촌주제(村主制)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참고문헌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Ⅲ(한국고대사연구소 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신라 하대 육두품 촌주와 사찬중위제의 시행」(서의식, 『역사교육』 111, 2009)
「신라시대 이두문의 해독」(남풍현, 『서지학보』 9, 1993)
「재일조선범종고」(이홍직, 『한국고문화논고』, 을유문화사, 1954)
「竅興寺鐘」(藤田亮策, 『朝鮮學論考』, 藤田先生記念事業會, 1963)
「逸新羅竅興寺鐘銘釋文」(末松保和, 『靑丘學叢』 11, 1933)
집필자
김덕원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