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흥사의 위치 및 창건과 폐사 시기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규흥사종은 대중(大中) 10년인 856년에 제작되었는데, 언젠가 일본으로 반출되어 대마도(對馬島) 상현군(上縣郡) 봉촌(峰村)의 통칭 해신신사(海神神社)에 보존되어 왔다. 그러나 명치연간(明治年間)의 신불분리(神佛分離) 운동의 혼란기 때 사라졌다.
규흥사종명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대중 10년 병자 8월 3일에 규흥사의 종이 완성되었다. 들어간 놋쇠가 합하여 350정(廷)이니, 총 가격이 1,050석(石)이다. (결락) 애초에 이 서원(誓願)을 일으킨 청숭법사(淸嵩法師)와 광렴화상(光廉和上)이 원한 것은 여러 가지를 시납(施納)하신 이나 불법(佛法)을 듣고 쫓아서 기뻐한 이나 모두 더없는 깨달음을 이루기를.
당시의 현령(縣令)은 함량(含梁) 훤영(萱榮)이며 (결락)
당시의 도내(都乃)는 성안법사(聖安法師) (결락)
상촌주(上村主)는 삼중사간(三重沙干)인 요왕(堯王) (결락)
제이촌주(第二村主)는 사간인 용하(龍河) (결락)
제삼촌주(第三村主)는 급간(及干) 귀진(貴珍) (결락)
대장(大匠)은 대내말(大奈末) 온금(溫衾)이다.
규흥사종의 명문에는 ‘삼중사간(三重沙干)’과 ‘상촌주(上村主)’·‘제이촌주(第二村主)’·제삼촌주(第三村主)’ 등이 기록되어 있어 신라 하대의 중위제(重位制)와 촌주제(村主制)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