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위학생은 통일신라 때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익히게 하려고 당나라 국자감에 파견한 유학생이다. 유학승(留學僧)과 함께 신라 대당 외교의 상징이다. 이들은 당 중심의 국제 질서를 인용하면서, 인적 · 물적 교류를 활발히 전개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신라 고유 문화와 제도를 당은 물론 주변 국가에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다만, 신라 골품제 사회의 구조적 한계 때문에 능력과 경험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오히려 새로운 국가에서 발휘하게 되었다.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 견당유학생(遣唐留學生)이라고도 한다.
648년(진덕왕 2) 김춘추(金春秋)의 셋째 아들인 문왕(文王)이 입당하여 숙위(宿衛)로서 질자(質子)이자 시위(侍衛)하는 신하가 되었다. 신라는 당의 기미정책(羈縻政策)에 따른 국제질서를 수용하여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익히고 수용하기 위해서, 또한 당나라의 문호 개방에 따른 국학 입학 장려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서 학생을 선발하여 국자감(國子監)에서 수학하도록 하였다.
처음 파견된 인물과 시기는 알 수 없지만, 675년(문무왕 15)에 김진주(金眞珠)의 아들 김풍훈(金風勳)이 설인귀(薛仁貴)가 이끄는 당 군사의 향도(嚮導)로 신라에 들어왔으므로, 그 이전에 이미 왕족이나 진골 귀족의 자제들이 숙위학생으로 파견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숙위학생은 당나라의 국자감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714년(성덕왕 13)에 생도(生徒) 7인이 파견되었는데, ‘생도’는 학관(學館)의 학생을 가리키므로, 국자감 생도로 보인다.
국자감은 국자학(國子學) · 태학(太學) · 사문학(四門學) · 율학(律學) · 서학(書學) · 산학(算學) 등의 학제로 구성되었는데, 숙위학생은 대체로 국자학이나 태학에서 수학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경덕왕 때 신라 관서와 군현의 이름을 한식(漢式)으로 고친 것은 숙위학생이 당의 문물과 제도를 신라에 적용한 결과인 듯하다. 다만, 789년(원성왕 5)에 당에서 학생이었던 자옥(子玉)이 국학(國學)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수(少守)라는 지방관을 맡게 되면서, 대체로 6두품 출신이 관리 진출을 위해서, 또한 왕실이 도당유학한 6두품 출신을 중용하여 왕권 강화를 꾀하면서, 진골 출신의 숙위학생보다는 6두품 출신의 도당유학생이 크게 증가하였다.
특히 821년(헌덕왕 13)에 김운경(金雲卿)이 신라 유학생 중 처음으로 국자감의 졸업시험인 생도시(生徒試) 가운데 빈공진사시(賓貢進士試)에 급제하면서, 도당유학생 중에 빈공진사시 급제 출신도 증가하였다.
『 동사강목(東史綱目)』에는 신라 말까지 58인, 당 이후 오대에는 32인이 빈공진사시에 급제하였다고 하였다. 숙위학생은 국가 간 인적 교류 차원에서 파견되었고 칙령으로 입학을 허가하였으므로, 도서 구입비는 신라와 당이 공동 부담하였으나 체재 비용은 당연히 당나라 조정에서 부담하였다. 따라서 도당유학생 역시 국비(國費) 유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837년(희강왕 2) 3월 숙위 왕자를 당에 보내면서, 당 조정에 옛 사례에 따라 체재하고 있거나 새로 입당하는 학생과 수령 216인에게 옷값과 식비를 내려달라고 요청하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국자감에 대한 조정의 관심과 지원이 줄어 재정 상태도 좋지 않았기에, 840년(문성왕 2)에는 당나라 문종이 질자와 함께 수학 기한이 다 된 학생 105인을 신라로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한편 빈공 급제자 출신은 당 조정에서 관직을 맡거나 황제의 사신으로 신라에 오기도 하였지만, 주로 귀국 후 국왕의 측근 문사나 문한 기구의 문한관(文翰官)을 맡아 대당 외교의 실무를 주도하거나 지방관을 맡아 신라 사회에 유교적 정치이념을 실현하고자 애쓰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라 골품제 사회에서 신분적 제약과 한계를 느끼며 신라 사회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신라 국가의 안녕을 바라기도 하였지만, 점차 후백제나 후고구려 등지로 활동처를 옮기도 하였다.
숙위학생은 유학승과 함께 신라 대당 외교의 상징이다. 이들은 당나라 중심의 국제 질서를 인용하면서, 인적 · 물적 교류를 활발히 전개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신라 고유 문화와 제도를 당은 물론 주변 국가에 알리는 데도 공헌하였다. 다만 신라 골품제 사회의 구조적 한계 때문에 능력과 경험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오히려 새로운 국가에서 발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