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석 재위연간(871∼893)에 당나라로 건너가, 빈공과(賓貢科)에 진사로 합격하였다. 그때 함께 응시하였던 신라의 이동(李同)보다 석차가 위에 있는 영광을 얻었다.
이를 가리켜 최치원(崔致遠)은 “한 나라(신라)의 수치로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아들 광찬(光贊)이 906년 당나라의 빈공과에 합격하였으나, 석차가 신라의 최언위(崔彦撝)보다 밑이었다. 마침 오소도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이 사실을 알고 전에 자신이 이동보다 위였음을 상기시키면서, 그의 아들 광찬 역시 윗 석차에 놓이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조정은 최언위의 재주와 학식이 광찬보다 빼어남을 들어 허락하지 않았다. 이 쟁장사건은 신라와 발해 사이의 대립양상이 당나라를 매개로 한 문화적 우열의 경쟁으로 기울고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