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993년(성종 12) 거란(契丹)의 침입을 시작으로 거란과 자주 충돌하였다. 이 때부터 고려에는 거란군 포로나 투항해 온 자들이 많이 살게 되었다.
1125년(인종 3) 요나라가 멸망하자, 유민들은 금나라에 대항해 광복운동을 펼쳤으나, 명맥을 유지하는 데 그쳤다. 그러다가 몽고의 부흥과 함께 유민들은 생존의 위협을 받아 고려로 남하했다가 몽골군과 고려군의 협공을 받았다.
당시 집권자 최충헌(崔忠獻) 정권의 내재적 모순으로 천시받던 발해 유민계의 양수척(楊水尺) 등 일부 고려인들의 도움을 받아 거란은 고려와의 전투에서 몇 차례의 승리도 거두어 고려로의 남하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고려와 몽골의 화친결성과, 고려의 장군 김취려(金就礪) · 조충(趙冲)의 활약과 몽골 장수 합진(哈眞)의 도움으로 거란유민들의 3년 동안에 걸쳤던 최후의 항전은 사라졌다(1219년(고종 6)).
그 때 합진은 거란의 부녀 · 사내아이 700명과 적에게 노략되었던 고려인 200명을 고려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15세 가량의 거란 여인 9명과 준마 9필을 조충과 김취려에게 보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몽골로 데려가 서루지방(西樓地方 : 내몽골 巴林)에 살게 하였다.
고려의 조충 또한 이러한 거란의 포로들을 각 도의 주현에 나누어 보내 사람이 살지 않고 놀고 있는 넓은 땅을 가려 모여 살게 하고, 그곳에 경작할 땅도 주어 농사를 짓도록 해 고려의 백성으로 삼았다. 고려 백성으로서의 대우는 천인에 가까웠다. 이들이 살던 곳은 고려 토착인이 살던 곳과 구별해 ‘거란장(契丹場)’이라 불렀다.
초기 거란인들은 거란〔遼〕이 건재하던 시기에도 전쟁 등을 틈타 수시로 고려에 투화하였다. 이들은 발해의 멸망과 더불어 거란인화 된 ‘발해계 거란인’들로서 친고려적 성향을 띠었다. 반면 거란 멸망 후 거란장에 살게 되었던 거란유민들은 전쟁포로로서 반고려적 거란인들로 고려에 어쩔 수 없이 살게 되었던 사람들이었다.
거란인의 고려 정착의 의미는 한편으로는 발해 유민의 고려 백성화를 뜻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발해계에서 전혀 이질화된 거란인의 고려 백성화를 뜻한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