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고려시대 거란 유민들이 고려에 와서 함께 모여 살았던 생활구역.
내용
1125년(인종 3) 요나라가 멸망하자, 유민들은 금나라에 대항해 광복운동을 펼쳤으나, 명맥을 유지하는 데 그쳤다. 그러다가 몽고의 부흥과 함께 유민들은 생존의 위협을 받아 고려로 남하했다가 몽골군과 고려군의 협공을 받았다.
당시 집권자 최충헌(崔忠獻) 정권의 내재적 모순으로 천시받던 발해 유민계의 양수척(楊水尺) 등 일부 고려인들의 도움을 받아 거란은 고려와의 전투에서 몇 차례의 승리도 거두어 고려로의 남하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고려와 몽골의 화친결성과, 고려의 장군 김취려(金就礪) · 조충(趙冲)의 활약과 몽골 장수 합진(哈眞)의 도움으로 거란유민들의 3년 동안에 걸쳤던 최후의 항전은 사라졌다(1219년(고종 6)).
그 때 합진은 거란의 부녀 · 사내아이 700명과 적에게 노략되었던 고려인 200명을 고려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15세 가량의 거란 여인 9명과 준마 9필을 조충과 김취려에게 보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몽골로 데려가 서루지방(西樓地方 : 내몽골 巴林)에 살게 하였다.
고려의 조충 또한 이러한 거란의 포로들을 각 도의 주현에 나누어 보내 사람이 살지 않고 놀고 있는 넓은 땅을 가려 모여 살게 하고, 그곳에 경작할 땅도 주어 농사를 짓도록 해 고려의 백성으로 삼았다. 고려 백성으로서의 대우는 천인에 가까웠다. 이들이 살던 곳은 고려 토착인이 살던 곳과 구별해 ‘거란장(契丹場)’이라 불렀다.
성격
거란인의 고려 정착의 의미는 한편으로는 발해 유민의 고려 백성화를 뜻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발해계에서 전혀 이질화된 거란인의 고려 백성화를 뜻한다 하겠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고려시대사(高麗時代史)』(김상기, 동국문화사, 1961)
- 「고려내투·내왕거란인(高麗來投·來往契丹人)」(한규철, 『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47,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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