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서(蔭敍)로 벼슬에 올라 태학(太學)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1190년(명종 20) 급제하여 내시(內侍)에 임명되었다. 1209년(희종 5)에 국자좨주(國子祭酒), 1211년에는 대사성 한림학사(大司成 翰林學士)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겸임하였다.
이후 동북면 병마사 · 예부상서(禮部尙書)를 거쳐 1216년(고종 3)에는 문 · 무를 겸비했다고 하여 추밀부사 한림학사승지(樞密副使翰林學士承旨)로서 상장군(上將軍)을 겸임하는 등 최충헌 정권에 순응하며 관직에 나아갔다.
그 해에 몽고군에게 압박당한 거란유종(契丹遺種: 僞遼國人)이 고려 북방에 침입하였다. 그러자 참지정사(參知政事) 정숙첨(鄭叔瞻)이 행영중군원수(行營中軍元帥)가 되었는데, 그 휘하의 부원수로 임명되어 경도(京都) 사람 가운데 종군 가능자와 승군(僧軍)을 모아 출정하였다.
이듬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정방보(鄭邦輔)로 원수가 교체된 뒤 염주(鹽州)에서 적병을 물리쳤으나, 안주 태조탄(太祖灘)까지 추격했다가 패배하여 파직되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여진족의 황기자군(黃旗子軍)이 압록강을 건너 인주(麟州) · 용주(龍州) · 정주(靜州) 등지의 경계 내에 침입하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어 이를 대파(大破)하고, 그 공으로 파면 이전의 관작으로 복직되었다.
1218년에 수사공 상서좌복야(守司空尙書左僕射)가 되어 개경으로 돌아왔으나, 거란족의 침입이 날로 심해지고 관군이 유약해 복속시키지 못하자, 다시 서북면원수가 되어 김취려(金就礪) · 정통보(鄭通寶) 등을 인솔하고 출정하여 거란군을 대파하였다. 이에 거란군이 강동성(江東城)에 들어가 웅거하게 되었다.
이듬해 2월 몽고 · 동진(東眞) 군대와 연합해 강동성을 공격하여 거란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강동성전투가 종결되자 몽고군 원수인 합진(哈眞)과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었다. 그 내용은 고려가 매년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장소에서 몽고에 세공(歲貢)을 납부한다는 것이었다.
형제맹약의 체결은 당시 집권자였던 최충헌의 의사와는 반대되는 것이었으나, 조충이 나라의 안위를 위하여 이를 지지하였던 추밀원부사 최우(崔瑀)와 대몽화의론자들의 뜻을 받들어 이루어진 것이다.
조충은 개선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 판예부사(判禮部事)에 오르고, 곧이어 수태위 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 수국사(守太尉同中書門下侍郎平章事修國史)가 더해졌다.
조충이 세상을 떠나자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문하시중(門下侍中)이 추증되었고, 고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