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성전투 ()

고려시대사
사건
1218년(고종 5) 8월부터 1219년(고종 6), 정월에 걸쳐 강동성(江東城)에 웅거한 거란유종(契丹遺種)을 섬멸한 전투.
사건/전쟁
발발 시기
1218년(고종 5)
종결 시기
1219년(고종 6)
발발 장소
강동성(江東城, 지금의 평안남도 강동)
관련 국가
몽골
관련 단체
거란유종(契丹遺種)
관련 인물
조충(趙冲), 김취려(金就礪), 합진(哈眞)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강동성전투는 1218년(고종 5) 8월부터 1219년(고종 6) 정월에 걸쳐 강동성(江東城)에 웅거한 거란유종(契丹遺種)을 섬멸한 전투이다. 거란유종의 침입으로 고려는 북부 지역으로부터 중부 지역까지 피해가 매우 컸다. 하지만 고려의 적극적인 대처와 몽골의 참전으로 이들 잔여 세력들은 퇴각로가 차단된 가운데 강동성으로 집결하게 되었고, 여기서 마침내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강동성전투에서 고려와 몽골의 첫 접촉이 이루어졌고, ‘형제맹약(兄弟盟約)’이 맺어지기도 하였다.

정의
1218년(고종 5) 8월부터 1219년(고종 6), 정월에 걸쳐 강동성(江東城)에 웅거한 거란유종(契丹遺種)을 섬멸한 전투.
배경 및 발단

13세기 초 몽골의 흥기로 금(金)나라의 세력이 위축되자, 지금까지 금나라의 지배를 받아 온 거란족(契丹族)은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1216년(고종 3) 그 세력 중의 하나인 대요수국(大遼收國)의 걸노(乞奴) · 금산(金山) · 금시(金始) 등은 몽골군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새로운 생활 근거지를 찾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의주(義州) 지역으로 침입해 왔다.

이에 고려에서는 군사를 보내 이들을 치게 했는데, 특히 대장군 김취려(金就礪)는 영변(寧邊) 지방과 묘향산(妙香山)에서 그들을 무찔러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들은 남하를 계속해 황주(黃州) · 연백(延白) 등지를 거쳐 국도 개성(開城) 근처까지 이르렀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철원(鐵原) · 춘천(春川) · 원주(原州) · 제천(堤川) 등지를 휩쓸고 다시 강릉(江陵)을 거쳐 북쪽 여진 땅으로 도망쳤다. 그 뒤 다시 여진과 합세해 남하하여 철령(鐵嶺) 이북의 여러 성을 짓밟다가, 1218년(고종 5) 평안도 지방을 휩쓸고 황해도 지방까지 출몰하였다.

경과 및 결과

고려에서는 조충(趙冲)을 서북면원수, 김취려를 병마사로 임명해 이들을 치게 하였다. 거란족은 거듭된 전투로 인해 전투력이 상당히 소진되었고, 그 잔여 세력들은 퇴각로가 차단된 가운데 강동성(江東城)으로 들어가 저항하였다. 강동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성곽은 “흙으로 쌓은 것으로 둘레는 5,759척(약 1.8㎞)이며 안에 우물이 둘이다.”라고 하였다. 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은 성곽에 많은 거란족이 집결한 것은 이미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진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때마침 1만의 몽골군과 2만의 동진(東眞, 대진(大眞))군이 거란족을 토벌하겠다고 말하면서 함경도 지역을 거쳐 성천(成川) · 강동 등지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몽골의 원수 합진(哈眞: 카치운)은 칭기즈칸[成吉思汗]의 명령을 받아 동진을 쳐 굴복시킨 다음, 지금의 간도 지방으로부터 함흥평야를 거쳐 고려장성(高麗長城)을 넘어 화주(和州) · 맹주(孟州: 지금의 평안남도 맹산) · 덕주(德州) · 순주(順州: 지금의 평안남도 순천) 등 4성을 공격한 뒤 강동성 방면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폭설로 군량의 보급로가 끊기고 거란족이 성을 굳게 지키자, 합진은 조충에게 충분한 군량미의 보급과 형제(兄弟)의 맹약(盟約)을 맺을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에서는 몽골의 저의를 의심하였으나, 눈앞의 거란족을 토벌하기 위해 그들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군판관 김양경(金良鏡: 후에 金仁鏡)에게 정병(精兵) 1,000명을 거느리고 쌀 1,000석(石)을 호송하게 하였다.

1219년(고종 6) 정월 합진은 강동성의 공격을 위해 다시 고려군의 증파를 요구해 왔다. 이에 병마사 김취려는 지병마사 한광연(韓光衍)과 함께 십장군(十將軍)의 군사와 신기(神騎) · 대각(大角) · 내상(內廂)의 정병을 거느리고 몽골군에 합세했으며, 뒤에 서북면원수 조충도 가세하였다. 이리하여 고려의 정병을 비롯해 몽골 · 동진의 연합군이 거란족이 웅거한 강동성을 총공격하게 되었다.

당시의 전략은 우선 적이 도망쳐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성 아래에 너비와 깊이 각 10척의 못을 팠으며, 성의 남문에서 동 · 남문까지는 동진의 완안자연(完顔子淵)이 맡고, 동문 이북은 김취려가 맡았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궁지에 몰린 거란인 40여 명은 성을 넘어 몽골군에 항복하고 괴수 함사왕자(喊舍王子)는 목매어 자살하였다. 그 뒤를 따라 관인 · 군졸 · 부녀자들이 항복했는데, 수가 5만여 명에 달하였다. 이때 합진과 조충이 함께 적이 항복하는 상황을 순시해, 거란 왕자의 처자와 승상 · 평장 이하 주요 인물 100여 명의 목을 베고 나머지는 용서해 군사의 보호를 받게 하였다. 마침내 1219년에 여몽(麗蒙) 연합군에 의해 강동성의 거란족은 완전히 소탕되어 3년 동안 고려에 침입해 소란을 피우던 거란의 침략은 일단락되었다.

한편, 강화 직후 카치운은 거란인의 부녀와 남자아이 700명만을 고려에 남기고, 소수는 전투에서 세운 공로의 대가로 조충과 김취려에게 주고, 나머지는 모두 내몽골의 파림(巴林)으로 이주시켰다. 이에 조충과 김취려는 거란인 포로를 고려의 백성으로 삼아 각 도의 주현에 나누어 토지를 주어 농사를 지으며 모여 살게 했는데, 이를 ‘ 거란장(契丹場)’이라 불렀다.

의의 및 평가

강동성 전투에서 거란유종을 진압한 것은 3년이라는 긴 전쟁을 종식할 수 있었던 반면, 고려와 몽골이 ‘형제맹약’을 체결함으로써 새로운 국제 환경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몽골이 고려 지역으로 들어오면서 내세운 것이 ‘거란족을 토벌하고자 한다.’라는 명분이었다. 즉 거란족의 토벌은 몽골로서는 금나라와 남송(南宋)을 공략하기 위해 지금까지 외교 관계가 없었던 고려와 접촉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던 셈이다. 이런 점에서 ‘적을 깨뜨린 후에 조약을 맺어 형제가 되고자 한다.’라는 것은 그들의 최종적인 명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맹약으로 고려는 정치적 · 경제적으로 몽골의 간섭을 받는 굴욕스러운 외교 관계를 이루게 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단행본

김상기, 『고려시대사』(동국문화사, 1961)
한국중세사학회, 『13세기 고려와 김취려의 활약』(혜안, 2011)

논문

고명수, 「몽골-고려 형제맹약 재검토」(『역사학보』 225, 역사학회, 2015)
고병익, 「몽고·고려의 형제맹약의 성격」(『백산학보』 6, 백산학회, 1969;『동아교섭사의 연구』, 일조각, 1970)
신안식, 「고려 고종초기 거란유종의 침입과 김취려의 활약」(『한국중세사연구』 30, 한국중세사학회, 2011)
이개석, 「여몽형제맹약과 초기 여몽관계의 성격: 사료의 재검토를 중심으로」(『대구사학』 101, 대구사학회, 2010)
이익주, 「1219년(고종 6) 고려-몽골 ‘형제맹약’ 재론」(『동방학지』 175,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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