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1년(명종 21) 조충(趙冲)·이규보(李奎報)·유승단(兪升旦) 등과 함께 이지명(李知命)에 의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다.
1196년 최충헌(崔忠獻)의 지시를 받고 지후(祗候)로서 경주에 파견되어 앞서 주살된 이의민(李義旼)의 삼족을 없앴으며, 1219년(고종 6) 몽고의 용장 카진[哈眞]이 우호관계 맺기를 요구할 때 그 누구도 가기를 꺼렸으나 지병마사(知兵馬事)로서 김취려(金就礪)와 함께 가기도 하였다.
1220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었으며, 다음해 동지추밀원사 호부상서(同知樞密院事戶部尙書)가 되고 1222년 추밀원사(樞密院使), 이듬해 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가 되었다. 1224년 추밀원부사로서 다시 지공거가 되어 손완(孫琓) 등 진사(進士) 33인을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