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횡성(橫城). 증(贈) 사공·상서좌복야(司空尙書左僕射) 조시언(趙時彦)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비범해 재상의 기량이 있었고, 박학해 글을 잘하였다. 의종 때 과거에 급제, 전주서기(全州書記)가 되어 정사에 명성이 있었다.
명종이 즉위하자 태자(太子)의 보도(輔導)를 맡았고, 1174년(명종 4)에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郎)으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승선으로서 잘못을 바로잡은 일이 많아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 1185년에 우승선으로 국자감시(國子監試)의 시원(試員)이 되어 시·부(詩賦)로 최문목(崔文牧) 등, 십운시(拾韻詩)로 정광우(丁光祐) 등과 명경(明經) 5인을 뽑았다.
1190년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고, 이듬해 참지정사(參知政事)·정당문학(政堂文學)·한림학사승지가 되었다. 1192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를 뽑아 손희작(孫希綽) 등 29인을 급제시켰다.
1194년에 수태위상주국(守太尉上柱國), 1196년에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가 되었다. 이듬해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었고, 이어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문하시랑평장사 감수국사(開府儀同三司守太師門下侍郎平章事監修國史)가 되었다.
1198년(신종 1)에 금나라 사신이 와서 전왕(前王: 명종)이 양위한 사유를 묻고 직접 만나보려 하였다. 이에 “전왕은 남주(南州)에서 요양 중이나 노정이 30일 걸리는 거리로 만나보려면 2∼3개월이나 머물러야 된다.”라고 하여 금나라 사신을 되돌려 보내 최충헌(崔忠獻)의 국왕 폐립으로 야기된 금나라와의 외교문제를 무난히 해결하였다.
1201년 문하시중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횡성의 세덕사(世德祠)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