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 국왕의 각종 정무를 시봉하기 위하여 문신 관료 중에서 선발한 근시 조직.
이칭
이칭
겁설관, 환관
제도/관직
설치 시기
고려 전기
폐지 시기
고려 공민왕 대
소속
내시성(內侍省), 내시원(內侍院)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내시는 고려시대에 국왕의 각종 정무를 시봉하기 위하여 문신 관료 중에서 선발한 근시 조직이다. 급제와 같은 개인적 능력과 가문이라는 혈연 배경을 고려하여 선발하였다. 내시성 또는 내시원에 겸직의 형태로 속하였으며, 주로 국왕의 정무를 시봉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 전기에는 대부분 문신 관료 중에서 선발하였으나 무신정권기 이후 무신이나 환관 중에서도 선발되는 이들이 늘면서 그 위상이 점차 하락하였다.

정의
고려시대, 국왕의 각종 정무를 시봉하기 위하여 문신 관료 중에서 선발한 근시 조직.
임무와 직능

내시들의 기구로 내시성(內侍省)이 있었는데, 인종 대를 전후하여 내시원(內侍院)으로 개편되었다. 내시원은 궁궐 내에 있어서 국왕의 부름에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별고(別庫)라고 하는 내시원 부속의 창고도 있었다.

주로 문반의 관료들 중에서 선발되었으며, 내시적(內侍籍)이라는 별도의 명단이 작성되었다. 이렇게 내시가 된 이들은 애초 지니고 있던 문반 관직과 함께 내시라는 두 개의 관직을 지니게 되어 복수의 업무를 수행하는 일종의 겸직(兼職) 형태로 운영되었다.

원래 지니고 있던 관직은 해당 관원이 어느 수준의 위계를 가지는지를 드러낸다. 관직을 통해 그 사람이 관직 구조상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그래서 봉록은 얼마나 받아야 하는지 등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내시로 임명되면서 내시 역할도 부가적으로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 내시원이라는 관사의 행정 실무를 담당하던 서리(胥吏)가 있었는데, 기록에는 내시인리(內侍人吏)로 나타난다. 이들은 겸직이 아니라 관사의 서리만을 담당하였다.

내시의 규모는 인종 대에 임완이 올린 상소문에 따르면, 문종 대에는 10여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숙종 대 이후 30~40명 수준으로 확대된다. 무신정권기에 50명이 넘는 수준까지 확대되기도 하지만, 왕권이 유명무실해지면서 무신(武臣)들이 명예를 탐하는 자리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최사추는 문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왕은 최사추가 명문가의 아들로 박학하고 견문이 넓다하여 내시성으로 불러들였다. 급제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뿐만 아니라 명문가의 아들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감안하여 내시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후기에 가까워질수록 실력이나 가문보다는 국왕과의 친연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운영되었다. 의종 대에 국왕의 측근인 환관(宦官) 정함(鄭諴)은 내시가 되어 많은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내시는 관청이 올린 보고를 궁궐의 승선에게 전달받아 국왕에게 직접 올리는 주사(奏事)의 역할 수행이 가장 중요하였다. 또 창고의 감독, 국왕이 직접 참여하는 의례에서 의전을 담당하였다. 이 외에도 때로는 국왕의 명을 받아 각종 사명(使命)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이 점은 남반(南班)에 속해 궁궐의 청소 등을 담당하였던 환관과는 구분되는 점이다.

변천사항

918년(태조 1) 10월에 광평시랑(廣評侍郞) 직예(職預)를 내시서기(內侍書記)로 임명한 기록이 있어서 건국 초기부터 내시라는 국왕의 근시 조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고려 나름의 정치제도를 갖추어 나가는 현종 대 즈음에 내시제가 갖추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063년(문종 17), 과거에 급제한 최사추가 내시로 임명될 때, 왕이 그를 내시성(內侍省)으로 불러들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내시의 관사인 내시성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내시성은 인종 대를 전후하여 내시원으로 개편되었다.

원간섭기를 거치면서 존재감이 약해지던 내시는 공민왕 대에 내시부(內侍府)가 등장하면서 관료들로 충원하던 근시 조직에서 환관으로 구성되는 근시 조직으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이 내시부가 조선으로 이어졌다.

의의 및 평가

내시는 궁궐에 있으면서 국왕에게 여러 일을 시봉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대단히 영예로운 경력이 되었다. 이에 1186년(명종 17)에 무신들이 중방(重房)을 통해 무신들도 내시로 임명될 수 있도록 집단적으로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는 내시로 선발되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겼다는 『고려사』 선거지의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내시는 고려 전기에 국왕 중심의 정치체제를 정비하고 관료층의 문벌화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나온 제도였다. 국왕과 지배층 사이의 정치적 연결 고리를 만들어 안정된 왕권과 지배층으로의 재생산 기제를 확보하려는 양자의 의도가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무신정권기 이후 왕권이 유명무실해지면서 내시의 위상도 약해지고, 나아가 몽골의 영향이 강해지는 후기에는 겁설관과 같은 새로운 방식의 측근 조직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논문

김보광, 「고려내시연구」(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1)
이정훈, 「고려 전기 내시와 국정운영」(『한국사연구』 139, 한국사연구회, 2007)
김재명, 「고려 내시제 운영의 일면」(『청계사학』 18, 한국학중앙연구원, 2003)
김재명, 「고려시대의 내시: 그 별칭과 구성을 중심으로」(『역사교육』 81, 역사교육연구회, 2002)
김재명, 「고려시대의 조관내시」(『한국학』 25-3, 한국학중앙연구원, 2002)
矢木毅, 「高麗時代の内侍と内僚」(『朝鮮学報』 184, 대한조선학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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