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색은 고려 후기에 도교 제사를 관장하였던 관청이다. 고종 때에 성신(星辰)에 대한 도교 제사인 초제(醮祭)를 지내기 위해 궁궐 안에 설치한 관청으로, 성신에 대한 초제를 지냈다는 기록을 통해 도교 계통의 초제를 담당한 기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충선왕 때에 재초도감으로 바뀌었다.
1258년(고종 45)에 최씨 정권이 무너지자 권신의 집을 빼앗아 정사색의 기능을 회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애초 정사색은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기구였으며, 최씨 정권 시기에 그 기능이 무력화되었던 듯하다.
정사색이 복구되면서 내시 중에서 근면하고 성실한 이를 뽑아 정사색에 배치하니, 이들을 ‘내시정사색’이라 지칭하였다. 무엇보다 고종은 이들을 자품을 뛰어넘어 승진시켰으므로, 권세가의 자제들이 다투어 들어오면서 규모도 커지게 되었다. 고종은 정사색을 자신의 측근 세력을 키우는 데에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충선왕 때에 재초도감으로 개편되었다가 1391년(공양왕 3)에 폐지되었다. 그런데 1379년(우왕 5), 1380년, 1385년(우왕 11)을 비롯하여 1392년 3월에 정사색이 초제를 지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어 도교에 대한 제사 자체가 없어진 것이 아니며, 재초도감의 폐지도 정사색으로의 개편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시대 태종 대에 소격전을 개성의 정사색 옛터에 지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 소격전이 개성 귀산사 서쪽에 위치하였으므로, 고려시대에 정사색의 위치를 대략 궁궐의 북쪽, 송악산 남쪽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정사색 또는 재초도감은 성신에 대한 초제를 지냈다는 기록을 통해 도교 계통의 초제를 담당한 기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변천에서와 같이 두 기구의 관계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부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