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제국대장공주를 따라온 겁령구가 몇 명인지 알 수 없으나, 몽골인 인후(印侯), 회회인(回回人) 장순룡(張舜龍), 고려인 차신(車信), 하서국인(河西國人) 노영(盧英)을 비롯하여 출신을 알 수 없는 정공(鄭公) 등 5명이 확인된다.
이들은 본래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신의 측근으로 삼으려는 충렬왕의 의도에 따라 인후, 장순룡 등 고려식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들 중 인후, 장순룡, 차신 등 3인은 고려에서 오래 활동하면서 재상의 지위에까지 올라 고위 지배층의 위상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원 간섭기에 원의 부마국이 된 첫 왕이었던 충렬왕은 겁령구를 자신의 측근으로 삼고자 이들에게 사전(賜田)을 지급하기도 하고, 장군(將軍)을 비롯한 여러 관직을 왕이 직접 내리기도 하였다.
겁령구는 공주에게 사적으로 종속된 노복이었으므로, 기본적으로 공주의 심복 측근이었다. 그래서 공주의 명을 받아 충렬왕의 본처였던 정화궁주와의 불화를 쿠빌라이에게 보고하기도 하고, 정화궁주를 감금하기도 하였다.
겁령구는 몽골 출신이고 공주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고려와 몽골 사이에 외교적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이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하는 등 고려와 몽골 관계에 일정하게 기여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인후에 대해 “(그는) 명을 전달하는 데에 능해서 충렬왕이 입조할 때마다 인후가 반드시 따라갔으며, 황제에게 아뢸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인후를 보내 처리하였다”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이들은 국왕과 공주의 신임을 빙자하여 국정에 관여하기도 하고, 백성들의 토지와 재물을 약탈하는 등 그 피해가 매우 심하였다.